경남 합천군 합천읍에는 일해공원이 있다. ‘일해’는 전두환 아호다. 공원 입구에 있는 표지석은 압권이다. 앞면에는 전두환의 ‘일해공원’ 친필 휘호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전두환 대통령이 출생하신 자랑스러운 고장임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표지석을 세웁니다'라는 글이 적혀 있다. 2008년 합천군이 3000여 만 원을 들여서 세웠다고 한다. 이 낯 뜨거운 조형물이 15년째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일해공원에서 1km 남짓 떨어진 곳에는 작은 영화관이 하나 있다. 합천읍에서 유일한 영화관인 ‘합천 시네마’다. 군에서 민간업체에 위탁해서 운영한다. 12·12군사 반란을 소재로 한 영화 ‘서울의 봄’을 이곳에서도 상영한다. 경남지역에서는 전두환 고향 합천에서 ‘서울의 봄’이 흥행할지가 관심사였다. 좌석 수가 적긴 하지만, 개봉 후 첫 주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임시휴관을 하기도 했던 합천시네마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일당 덕에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일해공원 명칭 변경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도 지난 12일 이곳에서 영화를 단체관람했다. 이 단체는 2008년 쯤부터 줄곧 명칭 변경을 요구해 왔는데 드디어 “일해공원 없는 합천의 봄”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이 기대감이 무력감으로 변하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합천군민 모두가 한때 고향 출신 대통령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느냐. 지금도 누가 뭐라 해도 전 전 대통령은 합천 출신 대통령이다. 출신만으로도 자랑스럽다.”

이한신(국민의힘, 합천읍·율곡면·대병면·용주면) 합천군의원이 21일 오전 군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 말이다. 그는 이날 전두환을 추켜세우며 "유해 안장 문제에 합천군이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전한 언론 보도를 살펴봤다. 제목만 보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하나는 군의원과 시민단체간 갈등·공방·대립 구도로 보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합천군 일각에서 동정론 일고 있다’는 식으로 군의원 한명의 발언을 ‘합천군 여론’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두 유형 모두 합천군의원 한 명의 주장이 ‘과다대표’됐다.

이번 발언은 언론이 충분히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다. 하지만 상당수 언론들은 스쳐지나가는 여러 기사 중 하나라서 그런 것인지, 공방·찬반·대립으로 손쉽게 처리하고 지나가버렸다. 문제는 이번처럼 전국적으로 관련보도가 한번 휩쓸고 가버리면, 지역에서는 정말 갈등이 들불 번지듯 퍼진다.

▲ 12월21일 MBC경남 '"전두환 유해 합천에 묻어야" VS "어처구니가 없다"' 기사 갈무리
▲ 12월21일 MBC경남 '"전두환 유해 합천에 묻어야" VS "어처구니가 없다"' 기사 갈무리

아니나 다를까, 기사 댓글창을 보니 벌써 난리가 났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댓글들은 이런 것이다. “외부세력은 빠져라.” 합천지역 주민들이 찬성한다는데, 왜 ‘외부세력’이 왈가왈부하냐는 것일 테다. 정말 합천지역 주민들은 전두환 유해가 합천으로 오기를 바랄까? 그것은 단정적으로 말할 순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한 명의 군의원이 한 뜬금없는 발언이 ‘대립각’을 세울 만큼 대표성 있는 발언으로 증폭되어서, 샤이한 찬성자들의 목소리가 분출되는 것이다. 이는 찬성자들이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반면, 문제제기를 하는 시민단체에게 ‘외부세력’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면, 사안에 별다른 관심이 없거나, 문제의식은 있지만 소극적인 이들은 더 입을 꾹 닫게 된다. 굳이 의견을 피력했다가, 졸지에 싸잡아서 ‘외부세력’이 되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닐 테니 말이다. 다수가 침묵하면 득을 보는 사람은 뻔하지 않은가.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과 권력자들은 살 판난다.

벌써 시민단체를 ‘외부 세력’으로 규정하는 댓글들이 많이 보여서 노파심이 생긴다. 지역신문에 일하다 보면 ‘외부세력’ 이라는 말을 너무나도 많이 접한다. 2007년 일해공원이라는 명칭을 결정할 때는 관변단체가 ‘일해공원 명칭 반대자들은 더 이상 외부세력을 끌어들이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마을에 내걸었다. 2021년 명칭 변경 논의가 불이 붙었을 때도 관변단체는 “외부세력이 이름을 바꾸라고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양산 천성산 터널공사 때도, 밀양 송전탑 사태 때도, 하동 지리산 산악열차 사업 때도 어김없이 외부 세력은 빠지라는 말이 나왔다.

▲ 2020년 6월9일 오전 경남 합천군 일해공원 앞에서 경남 시민단체 '적폐청산과 민주사회 건설 경남운동본부'가 공원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2020년 6월9일 오전 경남 합천군 일해공원 앞에서 경남 시민단체 '적폐청산과 민주사회 건설 경남운동본부'가 공원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숱한 사례로 짐작건대, 군의원이 운을 띄우고 언론이 이를 확대 생산한 지금 타이밍에 합천군수가 “유해를 합천으로 모셔 오겠다”라고 하면 얼마든지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관변단체를 동원하고, 문제제기하는 쪽을 외부세력으로 몰아세우면 안 될 것도 없다. 뭐, 꼭 그렇지 않더라도 유해를 합천에 안장하느냐 마느냐 공방하는 마당에 일해공원 명칭 변경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일련의 보도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레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 곱씹게 된다. 기계적 중립을 이유로 대립 구도를 만들어서 양쪽의 말을 다 전시하는 게 기자의 일은 아니다. 단 하루동안 쏟아진 대립·갈등·공방 기사들로, ‘합천의 봄’은 또다시 아득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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