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21일 초대 한겨레 사장을 지낸 청암 송건호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1961년 12월21일에는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1974년 12월21일엔 중앙일보와 TBC(동양방송)가 통합했다.  

송건호는 1926년 9월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서울대 재학 중인 1953년 대한통신 외신부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조선일보, 동아일보, 한국일보, 경향신문, 자유신문, 민국일보, 세계일보 등을 거쳤다. 

▲ 청암 송건호 선생. 사진=은평시민신문 영상 갈무리
▲ 청암 송건호 선생. 사진=은평시민신문 영상 갈무리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던 1968년에는 파리와 베를린에 파견돼 68혁명이 진행 중인 대학 풍경과 베트남 문제를 다룬 평화협상을 국내에 보도했다. 197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 당시 편집국장이던 그는 동아일보 광고 사태와 기자 해임에 항의하며 국장직을 사임했다. 이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남영동 치안본부에 끌려가 2주간 고문을 받았고 서대문구치소, 육군교도소 등에서 6개월 수감 생활을 했다.

1984년 해직언론인이 중심이 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을 맡았고, 1985년 6월 ‘말’지 창간에 참여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을 창간하는데 참여해 초대 사장을 맡았다. ‘한국 언론의 사표’, ‘해직기자의 대부’, ‘민족지성’ 등으로 불린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필독서였던 ‘해방 전후사의 인식’(공저) 이외에 ‘한국현대인물사론’, ‘서재필과 이승만’, ‘한국현대언론사’ 등 20여종의 책을 펴냈다. 일평생 언론운동에 종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제1회 심산학술상(1986), 한국언론학회 언론상(1991), 호암언론상(1994), 금관문화훈장(1999), 정일형자유민주상(2000) 등을 받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한국기자협회가 ‘20세기 최고 언론인’으로 선정했다. 

송건호 사후 고인의 바람인 민주적 언론 문화를 위해 청암언론문화재단이 설립됐고 2002년부터 매년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고 있다. 

▲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

1961년 12월21일,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이 사형 당했다. 1961년 ‘반공’을 국시로 내건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통일과 혁신을 내걸고 언론 활동을 벌이던 민족일보에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민족일보를 폐간하고 조용수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조 사장은 1960년 4·19혁명 직후 치른 5대 총선에서 진보정당인 사회대중당 후보로 경북 청송에 출마했다 낙선했고 이후 1961년 2월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등 4가지를 사시로 내걸었다. 조 사장은 취임사에서 “적극적으로 남북간의 민족의식의 추진과 생활공동체적 연대를 추구하는데 있는 지면을 과감하게 제공하는 것을 중요한 임무라고 생각한다”며 평화 통일을 주장했다. 

조 사장의 사형 선고에 국제신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 국내 언론인과 문인 등이 나서 구명 운동을 펼쳤지만 결국 조 사장은 이날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06년 11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 사장에게 사형을 선고한 혁명재판부 판단이 잘못됐다며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고 2008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조 사장에게 47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다. 

▲ TBC동양방송 갈무리. 사진=유튜브 'Vintage Archives' 갈무리
▲ TBC동양방송 갈무리. 사진=유튜브 'Vintage Archives' 갈무리

한편 1974년 12월21일, 중앙일보와 TBC(동양방송)를 통합해 상호명을 ‘(주)중앙일보·동양방송’으로 변경했다. TBC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 정치를 하려다가 언론사를 차리기로 마음을 바꾸면서 1964년 만든 방송사이며 중앙일보는 이듬해인 1965년 창간한 신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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