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기본소득’이 가능할까. 인공지능(AI)의 역습이 현실화되면서 인간 노동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AI가 일상 속 깊숙이 들어와 있는 세상. 더 이상 노동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기술 발전이 만든 과실을 누리기 위해 기본소득으로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이전부터 제기됐던 이유다.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동계층 ‘프레카리아트’(precariat) 용어를 널리 알린 세계적 석학 가이 스탠딩 런던 SOAS 교수는 기본소득의 도입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I 등 기술 발전이 입힌 안정성의 타격을 기본소득이 보완해줘야 한다고 본다. 그는 오랜 기간 국제노동기구(ILO)에서 근무하며 사회경제안전성사업을 총괄했고, 기본소득을 기본권 중 하나로 주창하는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asic Income Earth Network)를 창립해 현재 명예공동의장을 맡고 있다.

2~3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AI 시대, 다시 쓰는 경제 패러다임>을 주제로 열리는 ‘SBS D포럼’(SDF) 발표를 위해 한국을 찾은 가이 스탠딩 교수를 1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만났다. 가이 스탠딩 교수는 한국은 기본소득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뿐더러 세계적으로 부유한 나라보다 오히려 더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 AI의 발전 속도가 무섭다. 이전부터 AI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클 것이라고 강조해왔는데 최근 챗GPT가 등장하면서 그 영향력이 체감되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의 사회 변화가 올 것이라 보는가.

“우리는 항상 기술 변화를 겪어왔지만 지금은 쉽지 않은 시기다. 최근 발간한 책에서도 언급했는데, 우리는 오늘날 ‘불로소득 자본주의’(Rentier Capitalism)에 살고 있다. 취약한 경제시스템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른 때보다 AI와 기술의 영향이 훨씬 더 파괴적(disruptive)이고 퇴행적(regressive)이며 정치적으로 (풀기) 어려울 것이다.”

- ‘퇴행적’이라는 말이 인상 깊다. 어떤 의미인가.

“퇴행적이란 말은 상황을 더 불평등하게 만든단 뜻이다. 기술 변화는 경제학자들이 ‘기능별소득분배’(functional distribution of income)라고 부르는 것을 변화시켰다. 점점 더 많은 소득이 자본가에 돌아가고 노동자에 돌아가는 소득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그렇게 글로벌 자본주의의 불평등이 심화됐다.”

- 기술로 인한 사회 변화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우선, 1990년대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94년에 ‘TRIPS’(무역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가 통과돼 미국의 지적재산권 시스템이 세계화됐다. 그 결과 사람들이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훨씬 쉽게 취득하게 됐다. 산업 브랜드에 대한 저작권을 늘려 독점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게 된 거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1600만 개의 특허권이 작동한다. 특허는 20년간 독점적 이익을 제공해 타인을 배제시킨다. 빅테크, 대형 제약회사, 대형 금융회사가 특허를 사들여 더 많은 재산을 벌게 되고, 결국 ‘재벌적 임대 기업’(plutocratic rentier corporation)이 된다. 이건 자유 시장 시스템이 아니다.”

“직업 정체성 잃은 노동계층 프레카리아트, 한국 40% 추정”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 저임금 불안정 노동계층을 의미하는 ‘프레카리아트’(precariat)를 세상에 알린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과정에서 프레카리아트 계층이 탄생한 건가.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프레카리아트 계층이 성장했다. 프레카리아트는 다양한 형태의 불안정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과 접근 방식을 배워야 한다. 이들은 자기가 일을 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노동을 계속 투입해야 하는 구조를 안고 있다. 대가도 없이 말이다.”

- 기술 변화에 따라가기 위해 오히려 비용을 들이는 현실이다. 

“우리는 컴퓨터처럼 생산수단을 소유한 최초의 대중 계층이다. 그럼에도 자신들의 자동화는 생각하지 못한다.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는 자동화만 생각하기 쉬운데 따지고 보면 이 모든 현대 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것들을 수행해내야 한다. 당신이 프레카리아트 계층에 속해 있다면, 대가도 받지 못하면서 불안정성에 기여하는 더 많은 종류의 일들을 다시 배우고 다시 훈련 받아야 한다.”

- 프레카리아트 계층의 특성을 설명해줄 수 있나. 한국엔 몇 퍼센트 정도가 될까.

“한국, 일본, 영국 등 선진국에 속하는 나라에선 성인의 약 40%가 프레카리아트에 속해 있다고 추정한다. 프레카리아트의 특성을 얘기하려면 먼저 이 계층을 정의해야 한다. 우선 이들은 소득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직업적 정체성이 없다. 한 주에는 기자로 일하다가 다른 주에는 바텐더로 일할 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프레카리아트 계층이 지속 불가능한 부채의 가장자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의 사고, 한 번의 질병, 한 번의 실수로 길거리에서 노숙자가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악인 건, 이들이 자국 시민으로서 권리를 상실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 프레카리아트에 속하면, 시민으로서 ‘정체성’이 사라진다는 의미인가.

“사회권에 대한 자격(entitlement to social rights), 시민권에 대한 자격(entitlement to civil rights), 정치적 권리에 대한 자격(entitlement to political rights) 모두를 잃고 있다. 프레카리아트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거의 ‘구걸’하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이 ‘프레카리아트화’(precariatized)되고 AI와 같은 기술과 연결에 문제를 가지게 된다. 소속감과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을 통해 기계와 연결을 찾고 있지만 이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 가이스탠딩이 출간한 책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 가이스탠딩이 출간한 책 ‘프레카리아트: 새로운 위험한 계급’

- 기자처럼 전문직으로 분류됐던 직군도 프레카리아트 계층이 될 수 있나.

“수년 동안 많은 나라에 강연을 다니며 느낀 것 중 하나는 나를 인터뷰하는 많은 기자들이 프로카리아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잘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건 그들이 이미 자신들이 프로카리아트에 속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기자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변호사, 교사, 의료계처럼 학식이 많은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프로카리아트 계층에 속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미래에 더 좋은 커리어 대신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을 위기가 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낀다.”

- 정말 그렇게 느낀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할 것 같다.

“이러한 통제력 상실에 대한 감각은 매우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많은 정신 질환과 자살 충동까지 이어질 정도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 기술은 변화 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다. 현재 우리는 전체 시스템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해 사람들이 기술 변화로 인한 경제적 이익의 일부를 공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 다른 나라의 변화 상황이 궁금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줄 수 있나.

“중국의 ‘탕핑족’(lying flat)을 들어본 적 있나. 더 열심히 일해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는 느낌에 그냥 누워버리는 사람들이다. 세상의 압력, 노동에 대한 ‘거절’의 의미도 있다. 다른 사례는 농담처럼 들릴 수도 있다. 전구 하나를 교체하는 데 얼마나 많은 프리랜서가 필요하냐는 농담인데, 그 대답은 500명이 지원해서 단 한 명만이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 한 명은 누가 결정하느냐. AI와 알고리즘이다. 프레카리아트 사람들은 한 번 면접을 보기 전에 수백 개 일자리를 지원하지만 알고리즘이 이를 가볍게 처리한다. 지원자들은 엄청난 스트레스와 불안감으로 많은 비용을 소모하고 있다.”

“AI 권리 침해, 개인정보 검열 가능성까지”

▲ 인공지능, AI. 사진=gettyimagesbank
▲ 인공지능, AI. 사진=gettyimagesbank

- AI로 인한 개인정보 침해 문제도 전 세계에서 불거지고 있다.

“그게 가장 심각하다. AI가 사람들을 감시하는 방식은 ‘판옵티콘’과 유사하다. 항상 감시당하고 있지만 그 사실도 모른 채 AI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 컴퓨터와 카메라를 통한 감시로 공포를 유발할 뿐 아니라 차별, 통제와 심지어 개인적 관계에까지 사용될 수 있는 기록이 만들어진다.”

- 실제 알고리즘으로 개인이 차별 받은 사례가 있나.

“원격 근무를 상상해보라. 직원 컴퓨터에 제어 시스템을 설치해 컴퓨터를 30분 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회사가 일자리를 잃게 만들 수 있다. 업무 이외의 다른 용도로 컴퓨터를 사용하다가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가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또 다른 흔한 사례는 환경, 여성 인권 등을 위한 NGO에 가입한 경험이 있는 경우다. 기록이 저절로 공유돼 당신이 직장에서 말썽을 일으킬 사람이라고 암시할 수 있다. 직장에서 트러블메이커가 될 거라고 알고리즘이 정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 AI의 역습이 개인에 대한 검열로까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우리 컴퓨터나 다른 사람 컴퓨터를 통해 내가 무엇을 했는지, 내 견해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섬뜩하다. 프라이버시뿐 아니라 자기 검열을 유도하고 시민이 상실감을 느끼게 만들어 행동과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신의 진짜 생각을 말하지 않게 된다.”

“훌륭한 인프라 갖춘 한국, 기본소득 불가하다는 건 웃기는 소리”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 1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 중인 가이 스탠딩 교수. 사진=SBS 제공

- 기본소득의 강력한 옹호자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말한 것이 기본소득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다.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기본소득은 시민권의 기본 권리로 주어진다. 기본소득이 있다면 이런 기술들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 것이다. 인공지능과 기술의 발전에서 우리가 직면한 최악의 문제는 두려움이다. 정부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해결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 하지만 기본소득은 국가 단위로 실현된 전례가 없다. 취지에 공감을 해도 재원 마련이나 효과에 의문이 있는 게 사실이다.

“모든 진보적 정책은 정치인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 필요하지만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는 상황이 온다. 지난 세기 가장 유명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정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난 토지, 바다 등 공유지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국가펀드(national capital fund)를 조성할 수 있다. 기금이 쌓일수록 기본소득이 늘어날 것이다. 모든 국가가 할 수 있다. 육지가 어렵다면 바다만이라도 세금을 부과할 수 있다. 바다의 자원은 매우 풍부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얻는 소득에 세금을 부과해 기금에 넣으면 모든 한국인에 기본소득을 지급할 수 있다.”

- 한국은 아직 완벽한 선진국 대열엔 합류하지 못했다는 평가다. 아직 복지보다 성장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이 가능하다는 건가.

“부유한 나라보다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본소득은 오히려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 국민들에게 기본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특히 재벌이 수십억을 버는 ‘불로소득 자본주의’ 체제에서 더더욱 필요한 제도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기득권들의 특권을 계속 유지하자는 주장이며 AI와 현대 기술, 임대료, 특허 등으로 발생하는 지금의 불평등은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프리카나 인도에서 실험한 결과 기본소득으로 인해 사람들은 더 많이 일을 하고, 생산성도 올라간다. 건강도 개선돼 의료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줄어든다. 일반적으로 기본소득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된다. 다른 나라들처럼 한국 역시 당연히 기본소득을 감당할 수 있다. 한국이 갖춘 이 멋진 현대적 인프라들을 보라. 이렇게 멋진 호텔과 시설들을 유지하면서 기본소득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건 웃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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