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깨에 닿지 않는 머리 길이를 하고 있어요. <정이>에서부터 기르기 시작했는데 많이 기르지는 못한 것 같고요. 평소에 옆가르마를 하는데 오늘은 좀 다르게 보이고 싶어서 중앙 가르마를 생머리로 했고, 남색 바지 정장, 안에는 브이넥 흰색 니트를 입고 있고요. 가볍게 운동화를 신고 있습니다.”

30일 저녁 서울의 한 영화관에서 관객을 만난 김현주 배우가 옷차림 이야기로 인사를 시작했다. 소리를 통해 자신을 만나고 있는 관객들에게 이날 어떤 모습으로 찾아왔는지 설명하는 중이었다. 배우의 등 뒤 스크린에선 한글 자막이, 옆에 선 통역사를 통해서는 수어통역이 시시각각 전달됐다. 김 배우는 자신의 이름과 새해 인사를 직접 수어로 전했다.

넷플릭스는 이날 장애인·비장애인 150명을 대상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콘텐츠인 <정이> 배리어프리(barrier-free) 상영 행사를 진행했다. 배리어프리는 사회적 약자를 가로막는 물리적·제도적 장벽을 허물자는 움직임을 의미한다. 영화관 로비에는 오디오 화면해설, 청각 장애인용 자막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배리어프리 체험존’이 설치됐다. 상영회를 위해 찾은 관객들을 비롯해 영화관을 오가는 이들이 배리어프리 상영을 체험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이 이어졌다.

▲1월30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상영관에서 '정이' 배리어프리 상영회에 참석한 연상호 감독과, 김현주 류경수 주연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1월30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상영관에서 '정이' 배리어프리 상영회에 참석한 연상호 감독과, 김현주 류경수 주연배우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넷플릭스

상영회 관객은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과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 SNS 홍보를 통해 모집됐다. 영화관 곳곳에는 두 기관이 지원한 자원봉사자들이 배치됐다. 15명가량의 취재기자, 시각장애가 있는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도 관람에 참여했다. 영화는 <정이>의 연상호 감독과 주연 김현주, 류경수 배우가 10분가량 인사를 한 뒤 상영됐다.

음성 해설은 빨간색 대문자 ‘N’이 다양한 스펙트럼의 색으로 펼쳐지면서 넷플릭스 로고가 만들어지는 형상과 이어진 제작사 타이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됐다. 폐허에서 시작된 영화의 첫 화면, 인공지능(AI) 전투로봇 ‘정이’가 쓰러진 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어둠이 짙게 빨린 공장 바닥에 부서진 로봇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고 곳곳에선 불길이 일고 있다”는 설명이 나왔다. ‘옅은 신음’ ‘기계음’ ‘로봇 작동음’처럼 대사가 아닌 현장음들은 자막으로 전달됐다.

98분의 러닝타임 동안 비장애인과 시·청각 장애인 모두 음성과 자막을 이용한 화면해설을 병행해 영화를 관람했다. 상호 이해를 넓혀 함께 즐기는 콘텐츠 환경을 조성하자는 취지라는 것이 넷플릭스 측 설명이다. 넷플릭스는 배리어프리영화위원회와 기획 단계부터 협업했고, 실제 장애인이 참여한 배리어프리 기능 검수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했다고 밝혔다.

2015년 시각장애인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데어데블’을 시작으로 화면해설을 도입한 넷플릭스는 배리어프리 콘텐츠를 위한 노력을 적극 홍보하고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을 위해서는 별도 대본을 만들어 숙련된 성우와 연출자를 배정한다는 것이다. 노인, 저시력자를 위해서는 활자 등 그래픽 크기를 조절하는 기능이 도입됐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자막은 한국어를 포함해 최대 33개 언어로 제공되며, 국내 주요 스트리밍 서비스 중 가장 많은 콘텐츠에 음성 해설을 제공 중이라고 넷플릭스는 밝혔다. 한국어 뿐 아니라 다국어 더빙이나 화면해설이 지원되는 콘텐츠도 있다.

반면 국내 주요 OTT 업계의 배리어프리 기능은 이제 도입되는 단계의 수준이다. 지난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의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는 “국내 OTT 사업자인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웨이브 등도 배리어프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에 대한 개선을 위해 노력 중이나, 예컨대 쿠팡플레이의 경우 폐쇄형 자막 기능만 제공하고 티빙이 제공하는 대부분의 작품은 자막 기능조차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1월30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상영관 앞 로비에 설치된 넷플릭스의 배리어프리 체험관. 사진=넷플릭스
▲1월30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 상영관 앞 로비에 설치된 넷플릭스의 배리어프리 체험관. 사진=넷플릭스

국내 OTT 가운데 티빙은 지난해 배리어프리 자막이 적용되는 콘텐츠를 연내 최대 1600편 이상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웨이브도 지난해 9월 기준 약 30만 편의 보유 영상 중 9만 편에 한글자막을 넣었고 관련 국책 과제를 진행하는 등 배리어프리 기능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지난해 12월 방송통신위원회가 주최한 콘퍼런스에서 시각장애인이 넷플릭스 외 OTT가 제공하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기능을 사용하기 어려운 현실을 지적하면서 근본적 관점의 변화를 촉구한 바 있다.

영화관에서의 배리어프리 상영도 숙제로 남아 있다.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2020년 멀티플렉스 3사(CGV·롯데시네마·메가박스)의 배리어프리 상영은 8편, 116회에 불과했다. 상영일은 80~90% 이상이 평일 비인기 시간대에 집중됐다. 지방자치단체나 복지단체 등이 지원하는 배리어프리 상영 기회는 많지 않고 개봉한 지 상당 시일이 지난 작품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2021년 11월엔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가 멀티플렉스 3사 대상으로 시청각 장애인들이 제기한 차별구제 소송 항소심에서 영화 상영업자의 자막, 음성해설 제공 의무를 인정했다. 다만 300석 이상 좌석이 있는 복합상영관 1개 이상 상영관에서 관련 편의를 제공하라는 전제를 달았는데, 3사는 항고한 상태다. 이후 영화진흥위원회가 배리어프리 전격 도입이 아닌 시범사업을 진행하면서 의지 없는 시간끌기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번 넷플릭스 상영회는 일회성 이벤트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OTT, 영화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이> 화면해설 검수에 참여한 시각장애인 권순철씨는 넷플릭스를 통해 “화면해설 수요자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뜻깊은 행사로, 이번 배리어프리 상영회를 계기로 더욱 많은 분들이 배리어프리 콘텐츠의 필요성에 공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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