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7일부터 매주 tvN과 넷플릭스에서 동시 방영된 드라마 ‘스타트업’이 6일 종영했다. ‘스타트업’은 한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성공을 꿈꾸며 스타트업에 뛰어든 청춘들의 도전과 실패, 방황과 성공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 주인공 도산(남주혁 분)은 코딩 천재로 초등학교 때 수학올림피아드 최연소 금상을 수상한 엄친아다. 공대 동기생 철산(유수빈 분), 용산(김도완 분)과 함께 ‘삼산텍’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한다. 삼산텍은 인공지능 기반의 이미지 인식 서비스로 엔젤 투자자를 찾아 나선다. ‘엔젤(Angel)’이란 스타트업 초기에 자금지원과 경영지도를 해주는 투자자를 뜻한다.

삼산텍은 드라마에서 최고의 벤처캐피탈 기업인 SH가 운영하는 엔젤투자사 ‘샌드박스’ 입성을 목표로 마케터 출신 서달미(수지 분)와 변호사 출신 디자이너 정사하(스테파니 리 분)를 영입한다. 샌드박스 지원을 앞둔 어느 날, 멤버들과 야외에서 차를 마시던 달미는 안내견과 산책하는 시각장애인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안내견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말을 던진다. 이를 들은 삼산텍 멤버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이미지 인식기술과 음성인식 서비스를 결합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한다.

얼마 후, 투자자들 앞에서 삼산텍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인공지능 서비스 ‘눈길’을 공개한다. ‘눈길’ 서비스는 휴대폰 카메라가 사물을 인식한 후 음성으로 데이터를 제공하는 서비스다. 삼산텍 CEO 서달미는 수많은 투자자와 경쟁자들 앞에서 음성인식 인공지능 ‘영실이’를 호출한 후 명령을 내린다. 서대표가 스크린을 향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비추며 “영실아, 지금 내 앞에 있는 거 읽어줄래? ”라고 말하자, 인공지능 영실이가 “눈길 서비스는 안내견에서 모티브를 얻어 시력을 잃은 분들의 생활을 보조하고자 만들어진 시각장애인용 인공지능 안내 서비스입니다.”라고 답한다.

이어 카메라를 관객석으로 돌린 후 심사위원석을 향해 “영실아, 지금 내 앞에 뭐가 보이지? ”라고 묻자 “두 명의 남자와 네 명의 여자가 앉아있습니다.”라고 정확하게 답변한다. 성공적인 피칭을 마치고 우승을 거머쥔 삼산텍 멤버들은 꿈에 그리던 샌드박스 입성에 성공한다. 그러나 샌드박스의 수석팀장 한지평(김선호 분)은 ‘눈길’ 서비스의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로 혹평을 하며 멤버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평소 창업자들에게 모진 독설로 유명한 한지평은 ‘눈길’ 서비스의 비즈니스 모델이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가져다줄 확률이 낮다며 무시한다. 그가 실패를 장담한 회사는 반드시 망한다는 설이 있을 정도로 그의 독설은 창업자들에겐 좌절의 신호다.

▲드라마 '스타트업' 포스터.
▲드라마 '스타트업' 포스터.

투자계의 고든 램지라 불리는 한지평은 돈의 흐름을 읽어내는 뛰어난 투자실력으로 억대 연봉과 초호화 주택, 외제차를 소유한 성공의 아이콘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픈 성장기가 있었다.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독립자금 200만원을 받고 자립하게 되었을 때 지독한 가난과 외로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의지할 곳 없는 그를 받아준 사람은 삼산텍 대표 달미의 할머니 최원덕(김해숙 분)이었다. 최원덕 역시 벤처를 꿈꾸던 아들이 투자가 확정된 날, 불운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아빠 잃은 가엾은 손녀를 키우며 살아온 인물이다. 돈이 부족해서 밤늦도록 방을 구하고 월세방 전단지가 붙은 전봇대 앞에 서 있는 지평 앞에 갑자기 원덕이 나타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 모의투자 대회에서 우승 상품으로 받은 사이버머니 1억 교환권 종이 피켓을 우산 삼아 처량하게 서 있던 지평에게 원덕은 자신의 핫도그 점포 뒷방에서 지내라고 말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원덕의 깊은 상처와 외로움이 지평의 막막함과 쓸쓸함을 품어주는 대목이다.

덕분에 안정을 찾은 지평은 원덕이 맡긴 통장의 800만원을 열심히 굴려 주식 투자로 10배의 수익을 낸다. 이후 대학 진학에 성공한 지평은 자신이 불린 원덕의 돈 7천여만원을 들고 독립을 한다. 자신 몰래 통장 돈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몽땅 들고 떠나겠다고 말하는 지평에게 원덕은 새 운동화를 신겨주며, 언제든 힘들 땐 연락하라고 배웅한다. 꾸준한 노력과 투자 실력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벤처캐피탈 SH의 수석팀장으로 큰 성공을 거둔 지평이지만 그의 유일한 가족은 인공지능 스피커 ‘영실이’다.

“영실아, 오늘 스케줄 얘기해줘.” “영실아, 오늘 날씨 얘기해줘.” “영실아, 불 켜줘.” “영실아, 나 왜 잠이 안 올까?”

한지평에게 ‘영실이’는 업무 관련 브리핑을 전담하는 똑똑한 비서이자 집안의 온도와 조명, 가전들을 관리하는 집사이며, 외로울 때 대화할 수 있는 가족이다. 대외적으로는 한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는 냉혹한 투자 전문가로 살아가지만 여전히 혼자서 모든 걸 감당해야 하는 외로운 존재인 것이다.

차가운 독설가 한지평이 삼산텍의 ‘눈길’ 서비스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달미의 할머니 최원덕이 실명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된 때다. 우연히 병원에서 달미 할머니의 병명을 알게 된 도산이 ‘눈길’ 서비스 개발에 몰두한 진정성을 인정한 지평은 삼산텍의 글로벌 진출을 위한 투자 설명회를 적극 돕는다. 삼산텍과 한지평의 협업으로 ‘눈길’ 서비스는 미국의 사회공헌 재단에 인수되어 전 세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플랫폼으로 성장한다. 그 사이 거의 시력을 잃은 원덕은 눈길 앱을 이용해서 실생활에 많은 도움을 얻으며 살아가게 된다.

드라마 속 착한 기술, 과연 현실은?

삼산텍의 ‘눈길’ 서비스는 음성인식 스피커의 기능을 이미지 인식 기반 기술과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다. 사람이 음성으로 내린 명령을 인공지능이 인식한 후 데이터를 취합한 후 음성으로 제공하는 기술이다. 인공지능 스피커 시장은 2014년 11월 아마존의 에코(Echo)가 런칭된 것이 처음이다. 스마트 스피커 시장은 국내에서도 2019년 말을 기준으로 이미 500만대 이상 판매가 될 만큼 대중화된 서비스다.

이노션월드와이드의 ‘디지털커맨드센터’가 2016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언론 기사와 주요 포털, 블로그, 카페, 커뮤니티 등에서 생산된 인공지능 관련 키워드 약 48만개를 분석한 보고서 ‘인공지능에서 감성지능으로’를 보면 사용자들은 이미 인공지능 서비스에 대해 ‘친구와 대화하는 느낌이 든다’, ‘힘든 일이 있거나 장난을 쳐도 받아준다’와 같이 교감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음성인식 서비스는 스피커 외에도 냉장고, TV와 같은 가전과 자동차 등 다양한 사물과 결합하면서 사물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플랫폼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강조했던 ‘손’의 역할과 의미가 이제 ‘입’으로 옮겨가고 있는 현실을 눈앞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음성으로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하고, 데이터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바로 사용자의 개인정보와 명령어, 요청 데이터에 대한 알고리즘 분석이다. 목소리를 텍스트로 분석하고, 기계학습한 후 다시 음성처리를 통해 제공하는 과정은 첨단 기술의 융합이다. 이를 빠르고 정확하게 수행하는 역할은 개인 디바이스가 아닌 인터넷으로 연결된 인공지능 플랫폼을 통해 가능하다. 클라우드 기반의 플랫폼들은 사용자들의 이용기록, 명령어, 요청데이터, 데이터 분석 결과 및 이용행태 등을 모두 저장하고 분석한다. 사용자의 음성 역시 호출과 동시에 녹음되는데, 녹음 파일의 저장기간과 삭제 권한은 기업마다 상이하다.

▲드라마 '스타트업' 사진 스틸.
▲드라마 '스타트업' 사진 스틸.

문제는 손으로 입력하는 텍스트 기반에서는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검색을 하지만, 음성인식 서비스의 경우 호출 명령어로 인공지능이 활성화되면 모든 소리가 녹음된다는 점에서 텍스트 기반 디바이스보다 개인정보 유출이나 도청, 해킹 위험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2017년 중국 저장(浙江)대학교 연구팀은 ‘돌핀어택(Dolphin Attack) 프로젝트’라는 실험을 통해 음성인식 서비스의 맹점을 지적했다. 돌핀어택은 ‘숨겨진 음성 명령 시스템’을 통해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20kHz 이상의 초음파 범위에서 소리를 재생시켜 사용자의 디지털 기기를 해킹한 실험이다. 연구팀은 사무실이나 집 등에 무단으로 숨겨 둔 스피커를 명령을 통해 재생시키거나, 사용자의 옆으로 걸어가면서 휴대용 스키퍼를 통해 공격을 실행했다.

애플의 시리(Siri), 아마존의 알렉스(Alexa), 구글 나우(Now), 삼성의 S보이스, 화웨이 하이(Hi) 보이스 등의 음성 인터페이스를 해킹한 결과 전화기가 갑자기 비행기모드로 전환되거나 영상통화가 시작되기도 하고, 가짜 문제 메시지가 발송되는 일이 발생했다. 자동차의 내비게이션이 활성화되는가 하면 스마트폰의 화면이 어두워지거나 볼륨이 낮아지고, 악의적인 불법 사이트를 무단으로 방문하기도 했다. 이는 친절한 ‘영실이’가 언제든지 지평이나 원덕의 디지털 기기를 해킹해서 그들의 사생활을 엿듣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검색당하지 않을 자유, 녹음되지 않을 권리가 필요한 시대

작가 애덤 클라크 에스테스(Adam Clark Estes)는 “스마트 스피커를 구입하는 것은 거대 기술 기업이 당신을 효과적으로 감시하도록 비용을 지불하는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빠른 검색과 사용자 맞춤형 정보를 통해 삶의 편이성이 높아지는 것은 기술이 가져다준 그린 라이트다. 그러나 인간의 음성을 복제하고, 인간의 삶을 엿듣고, 인간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친절하게 제공해주는 인공지능 에이전트는 푸코가 목놓아 비판했던 파놉티콘(Panopticon)을 연상케 한다. 스마트 디바이스 제조사와 통신사들이 수집한 데이터로 강력한 알고리즘을 구축해서 통제와 감시의 플랫폼을 운영하는 거대 미디어 기업들의 형태야말로 소리없는 감시, 일상화된 통제의 현시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은 사라지고, 추천과 푸시가 난무하는 알고리즘의 지옥 안에서 어떻게 하면 투명 망토를 쓰고 우리의 음성과 얼굴을 가림으로써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한다. 디자이너 페드로 올리베이라와 세디 첸이 개발한 ‘스마트 복면’은 얼굴을 가리는 동시에 QR코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을 장착해서 고립된 시위대의 메시지를 외부의 저널리스트들이 해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컴퓨터 시각예술가 아담 하비(Adam Harvey)는 ‘안티 페이스(Anti-face)’라는 주제로 얼굴을 가리는 헤어스타일, 얼굴 윤곽선을 흐릿하게 하거나 얼굴을 비대칭으로 만드는 화장법 등을 소개하면서 안면 인식 기술에 대한 저항 의식을 표출한다. ‘얼굴 무기화 세트’로 유명한 자크 블라스(Zach Blas)는 지역 주민들 대상으로 진행한 워크숍에서 참가자들의 얼굴 데이터를 수집하여 ‘집단 가면’을 제작한 바 있다. 이 가면들은 동성애자의 안면 인식 데이터를 모아 성적 지향을 결정짓는 과학 연구에 대응하거나, 생체 인식 기술이 피부색을 감지하지 못한다는 특징에 근거해 인종차별, 페미니즘, 국경보안 기술이 초래한 폭력을 비판하는 프로젝트다.

물론 이러한 저항의 기술은 ‘눈길’ 서비스가 필요한 시각장애인이나 사회적 약자들에게 또 다른 차별과 소외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간의 목소리와 얼굴을 닮은 기술 주체들이 일상의 곳곳으로 스며들고 있는 기술적 전환의 시기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철학적 물음을 던져야 할 때다. 모두에게 데이터가 필요하고, 모두에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기술의 신화 뒤에 가려진 알고리즘의 통제와 감시망을 탈주해서 나만의 시간과 공간,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진정한 ‘나’와 ‘너’ 그리고 ‘우리’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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