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오늘은 베토벤이 태어난 날이구나. 1770년 12월 17일에 태어났으니 241주년이구나. 그리 먼 옛날이 아니지. 인류가 얼마나 지구상에 더 살게 될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교향곡들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살아 있을 거야. 아니, 인류의 역사를 베토벤 교향곡이 없던 시절과 있는 시절로 나눠서 볼 수도 있겠네.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은 하나하나, 인류 음악사에 획을 그은 ‘혁명적’ 작품들이지.
 
앞의 교향곡 5번 <운명>과 같은 날, 1808년 12월 22일 같은 곳에서 초연된 6번 교향곡 <전원>을 들어볼까. 쌍둥이로 세상에 나온 이 두 곡은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야. 5번이 비극적 운명에 당당히 맞서 승리를 구가하는 베토벤의 강한 얼굴이라면 6번은 인간과 자연을 무한히 사랑하는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모습이야.
 
베토벤은 1802년 가을 비통한 마음으로 유서를 썼던 빈 교외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8년에 요양하고 있었는데, 그 때 쓴 작품이야. 이 때 그의 일과는 아침이 밝아오면 일어나서 오후 2시까지 일을 한 후 저녁때까지 산책을 하는 게 전부였대. 때로는 어둠이 내린 뒤까지 산책만 할 때도 있었다고 해. 귓병 때문에 사람과 만나는 걸 두려워한 그는 숲속에서 마음의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누렸던 것 같아. 그는 때로는 “사람보다 자연을 더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했지. 이때의 감상을 그는 이렇게 적었어.
 
“전능하신 신이여, 숲속에서 나는 행복합니다. 여기서 나무들은 모두 당신의 말을 합니다. 이곳은 얼마나 장엄합니까!”
 
청력 상실에 절망한 나머지 유서까지 썼던 베토벤이 새로운 삶의 욕구를 심어 준 자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 노래가 바로 이 곡이야. 모차르트 다큐 촬영을 위해, 빈필하모닉 취재를 위해, 장한나 지휘 데뷔 다큐를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 들를 때마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찾았었지. 베토벤의 발길이 닿았음직한 산책로를 탐욕스레 찾아 걸어다녀 봤지. 베토벤의 유물과 자필 악보가 있는 작은 박물관, 그리고 ‘호이리게스’(heuriges)라는 새로 담근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카페가 있을 뿐, 베토벤이 나이팅게일과 지빠귀새의 노랫소리 들으며 ‘시냇가의 풍경’ 악상을 떠올렸음직한 자연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어. 하일리겐슈타트의 텅 빈 산책로를 채운 건 내가 흥얼대는 <전원> 교향곡의 선율뿐이었어.^^
 
내가 이 곡을 처음 들은 건, 지난번 얘기한 5번보다 더 오래됐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 때 TV에서 만화영화로 봤으니까. 그런데, 오늘, 혹시나 해서 유투브를 뒤져보니, 그 옛날 만화영화가 있지 않겠어! 월트 디즈니가 1940년 만든 <판타지아>를 60년대 한국 TV 프로그램 <디즈니랜드>에서 방송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고 매혹됐던 기억이 또렷해. 올림포스산의 하루를 묘사한 이 영화에는 뿔 하나 달린 유니콘, 반인반수인 켄타우루스, 하늘을 나는 말들, 그리고 아기 요정들이 나와서 자연과 신들과 어울리지. 70년 전에 만든 애니메이션, 지금 봐도 재미있어. 꼬마들과 함께 보면 참 좋겠다. 거장 레오폴트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연주.

 
1악장, 아침 해가 밝아오고, 숲속의 모든 동물들이 깨어나 하루를 찬양하기 시작하지. 모든 출연자들이 삶을 구가하며 화면에 선보이지. 만화영화 전체의 인트로에 해당. 
http://www.youtube.com/watch?v=uKFiR8GvUY4
 
2악장, 꼬마 요정들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남녀 켄타우루스 (반인반수)가 한바탕 어우러진 다음 각자 짝을 찾게 된다는 스토리. 끝 부분, 베토벤이 새들의 울음소리를 묘사한 부분을 요정들이 나팔 부는 장면으로 재치있게 연출한 게 재미있어.  
http://www.youtube.com/watch?v=PKTJyyZ-Igw&feature=related
   
3악장, 시골 축제, 신나게 어울려서 우스꽝스런 춤을 추고 와인을 마시며 노는 사람들.
4악장, 천둥과 폭우. 제우스신이 벼락을 내리치고, 혼비백산한 동물들은 황급히 숨고. 특히 제우스가 헤파이스토스의 도움을 받아 벼락을 던지는 대목은 음악과 영상이 절묘하게 맍아떨어져서 숨소리마저 죽이게 하는 훌륭한 대목이야. (3, 4, 5악장은 휴식 없이 연결됨)
 http://www.youtube.com/watch?v=dh8vuxyL6X8&feature=related
 
5악장, 폭풍우가 지난 뒤 올림포스 산에 크게 무지개가 크게 걸리고, 동물들은 맑은 하늘을 보며 기쁜 마음으로 신들게 감사 기도를 올리지. 태양신 아폴론이 모는 불덩어리 마차가 하늘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넘어가면 달의 신 아르테미스가 밤하늘에 별가루를 뿌리지. 모든 동물들은 평화롭게 잠들고...
http://www.youtube.com/watch?v=wrl737x_B2c&feature=related
 
베토벤은 자필악보 표지에 "전원 교향곡, 또는 전원생활의 회상.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써 넣었어. 각 악장에도 표제가 붙어 있어. 이 때문에 이 곡을 ‘표제음악의 시조’라 부르기도 하지. 하지만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한 곡일 뿐, 자연 현상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라는 점을 베토벤은 강조하고 싶었던 거야. 따라서, 표제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취향에 따라 자유롭게 느끼며 감상하면 되는 거야. 연주는 윌리엄 스타인버그 지휘 피츠버그 교향악단. 50년 녹음인데 연주도 음질도 훌륭하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유쾌한 느낌 (Allegro ma non troppo / 빠르게, 그러나 지나치지 않게) 만화영화 본 느낌 지우고 그냥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느낌 생각하며 들어보기를...
 http://www.youtube.com/watch?v=jsYjxXd7Nuk
 
2악장,  시냇가의 풍경 (Andante molto mosso / 느리게, 매우 생동감 있게)
 현악이 살랑이는 시냇물의 이미지를 묘사하고, 부드럽고 정다운 숲속의 이야기를 펼쳐 가지. 특히 끝부분, 플루트가 꾀꼬리 소리를, 오보에가 메추리 소리를, 클라리넷이 뻐꾸기 소리를 묘사한 대목에 귀 기울이도록.
http://www.youtube.com/watch?v=81oKXxB4nww&feature=fvwp&NR=1
 
3악장, 시골사람들의 즐거운 모임  (Scherzo Allegro / 해학곡,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wsYM9Y62uKI&NR=1&feature=endscreen
 
4악장, 천둥과 폭풍 (Allegro / 빠르게)       - 휴식없이-
 
5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Allegretto / 약간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mk5sjooQOts&NR=1&feature=fvwp
 
무인도에 교향곡을 딱 한 곡 들고 가라면 어떤 곡을 택할까? 아주 고민되겠지만 끝까지 놓고 싶지 않은 게 이 곡이야. 베토벤이 이 곡 하나만 남겼다 하더라도 난 그를 제일 위대한 작곡가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거야. <전원> 교향곡은 ‘혁명적’이란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지만, 교향곡 역사상 이른바 ‘표제음악’으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으로는 최초의 곡이니 이런 의미에서 ‘혁명적’이라 해도 좋을 듯.
 
베토벤 음악 중 이 곡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운 곡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길. 가곡 <아델라이데> Op.47, 로망스 2번 F장조 Op.50. 피아노소나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 Op.53, 피아노소나타 24번 F#장조 Op.78 <테레제를 위하여>, 바가텔 A단조 일명 <엘리제를 위하여> 등, 나중에 하나씩 찾아서 들어 보자.
 
<전원>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 폭풍이 지나간 뒤 양치기의 감사의 노래, 70년대 FM을 틀면 늘 나오던 그 명연주,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지휘 뉴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의 연주로 한번 더 들어봐. http://www.youtube.com/watch?v=EM8RlCZP0KQ

 
이건 내가 숭배하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 연주.
 http://www.youtube.com/watch?v=R3YfBGR-WSo
 
이건 내가 중딩때 많이 들었던 카라얀 지휘 베를린필 연주. 50살 안팎의 클래식 애호가들 중엔 카라얀 지휘로 베토벤 들은 사람이 많을 거야. 이 분 지휘는 어떻게 해도 따뜻한 느낌이 안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카메라웍과 컷 분할이 정확하기 때문에 어떤 대목에서 어떤 악기가 연주하는지 알아보기는 제일 좋으니 참고하시길.
1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98n2LiINLWo
2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L-5MarwaDyg&feature=fvwp&NR=1
3악장 & 4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FkiekSYfK-0&feature=fvwp&NR=1
5악장 http://www.youtube.com/watch?v=EloXCsR6Cno&feature=endscreen&NR=1
 

베토벤 교향곡과 베토벤 바이러스
-<운명>과 <전원> 200주년을 기리며 
 
 <베토벤 바이러스>를 처음 접했을 때 ‘M-바이러스’(말러), ‘B-바이러스’(브루크너) 같은, 음악 친구들 사이에 유행했던 농담이 떠올랐다. “한번 감염되면 헤어날 수 없는 불치의 병”이라며 낄낄대곤 했다. 이 드라마의 ‘바이러스’가 무슨 뜻인지 아직 모른다. 아무튼 중반을 넘은 지금 시청률 1위를 지키며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시청자들에게 일종의 ‘바이러스’를 성공적으로 뿌린 것 같긴 하다. <노다메 칸타빌레>처럼 클래식 음악을 널리 알리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가 있었고, 아마추어 관현악단의 순수한 음악 사랑이 천재적 지휘자와 만나 해피 엔딩을 이룬다는 발상도 좋아보였다.
 
물론 아쉬움은 있다. 음악이 중심에 놓여있지 않다. 여느 드라마처럼 사랑과 갈등, 야망과 좌절이 중심축이고, 음악은 장식에 불과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장 진솔하게 표현한 예술이 음악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클래식을 ‘뭔가 고상한 것’처럼 여기는 연출 태도가 적지 않게 거슬렸다. 소탈한 음악 사랑이 배어나는 내면 연기를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김명민(강마에), 이지아(두루미), 장근석(강건우)의 괴팍스런 언행과 ‘오버액션’은 비위 약한 나로서는 인내가 필요했다. 이순재, 송옥숙, 박철민 등 조역들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이지아의 대사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점차 개선되고 있지만 연주 동작과 음악이 안 맞는 대목들은 집중을 방해했다. 무엇보다 음악 세계를 묘사한 대목들에 리얼리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서울시향의 오보이스트 김미성과 바이올리니스트 임가진이 한 스포츠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상세히 지적한 바 있으니 참고하시길.
 
http://cafe448.daum.net/_c21_/bbs_search_read? cafetop&nil_menu=sch_updw
 
하지만 어떠랴. 리얼리티가 모자라는 것은 “드라마는 어차피 만화”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음악이 장식이면 어떠랴. 많은 시청자들에게 친숙한 클래식을 되풀이 들려주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시청자들이 오케스트라의 세계에 대해 궁금증을 갖게 된 것도 이 드라마의 성공을 증명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특히 젊은 층의 찬사를 받고 있으니 내가 투덜댈 일은 아니다. 10~20대 젊은 층에서 높은 시청률이 나온 것은 직설적인 대사, 스피디한 영상 등 제작진의 탁월한 감각에 힘입은 바 크다. 연기자들이 실제로 악기와 지휘를 배우고, 24명 안팎의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300여곡의 클래식을 선곡하고, 피아니스트 임동혁의 연주를 삽입하는 등 화면 뒤 제작진의 노력이 각별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올해는 세계 음악사에서 뜻 깊은 해이다. 영원한 명곡인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과 6번 <전원>이 세상에 나온 지 꼭 200년 되기 때문이다. 두 곡은 1808년 12월 22일 빈에서 함께 세계 초연됐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이 점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는 절묘할 정도로 시의적절하다. 두 곡은 베토벤의 두 얼굴을 대표한다. <운명>은 청력상실이라는, 음악가에게 저주와 다름없는 아픔을 딛고 일어나 힘차게 삶을 긍정하는 승리의 찬가다. <전원>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속삭이며 노래하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베토벤의 모습이다. <베토벤 바이러스>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시청자들이 최소한 이 두 곡 정도를 확실히 알고 즐기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베토벤은 <장엄미사> 표지에 ‘마음에서 마음으로’라는 모토를 적어놓았다. ‘마음’이 빠진 음악은 소음에 가까울 것이다. 반대로, ‘마음’을 담고 있기에 사람들은 모든 좋은 클래식 음악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귀족적’이라는 편견, ‘어렵다’는 부담감만 내려놓으면 가능한 일이다. 또한 음악은 마음 가장 깊은 곳의 ‘소통’이기도 하다. 혼자 듣는 것보다는 함께 나누는 것이 좋다. 그러기에 단순히 ‘마음’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인 것이다. 드라마에서 강마에와 오케스트라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환희의 송가>를 연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강마에와 단원 한명 한명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하나 되어 연주하고, 그 음악이 시청자 한명 한명에게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베토벤이 보아도 흐뭇해 할 멋진 결말을 기대한다.     
 
(2008년 10월, PD저널)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