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언제나 음악을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친구들은 내가 어떻게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됐는지 묻곤 했어. 그럼 누나 얘기를 하지. 72년,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누나가 돌아가셨는데, 당시 22살이던 누나가 남겨놓고 가신 LP를 듣고 “아, 내가 음악을 좋아하고 있었구나! 깨닫게 됐다”고. “좋아하게 됐다”는 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채 이미 좋아하고 있었는데, 누나가 돌아가신 뒤 그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처럼 슬픈 일은 없어. 특히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이라니! 어린 내겐 큰 상처였음이 분명해. 그 뒤 몇 년 동안 누나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니까. 누나의 추억을 짧은 글로 끄적인 건 그로부터 30년이나 지난 뒤였으니까. (아래 박스 글)

누나는 당시 구하기 어렵던 원판 LP를 꽤 많이 갖고 계셨어. 누나가 음악을 들을 때 나도 어깨 너머로 함께 들었던 거지.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제법 심각한 곡도 이미 익숙해져 있었어. 세고비아나 줄리언 브림이 연주한 기타 솔로곡도 꽤 많이 들었어. 음악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되풀이 듣기’ 훈련을 이미 누나를 통해 받았던 셈이지.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누나가 남긴 LP를 들으며 누나의 추억과 손길을 혼자서 느끼곤 했어. 그런데,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을 듣는 순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

   
 
 

1악장 알레그로 콘 브리오 (빠르고 힘차게)
http://www.youtube.com/watch?v=U-glr-ow_po&feature=related

음질은 다소 떨어지지만 바로 그 지휘자가 연주한 걸로 다시 들으니 감동이 새롭네. 보통 <운명>교향곡이라 불리는 이 곡은 클래식 음악 역사상 제일 잘 알려진 곡이지.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이 곡을 빠뜨리고 갈 수는 없어. ‘따따따따~~~~’ 하는 첫 주제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나를 ‘운명적’으로 음악의 세계로 이끈 게 바로 이 주제야.

특히 위 링크 1분 36초 지점, 호른이 포효하듯 1주제를 연주하는 대목이 가장 강력하게 뇌리에 박혔어. 젊은 나이에 떠나버린 누나의 ‘운명’을 느꼈던 걸까. 통곡하듯 ‘따따따따~~~’ 첫 주제가 다시 나온 뒤 3분 9초부터 3분 35초까지, 현악이 흘러가는 동안 파곳과 클라리넷이 고뇌에 잠겨서 노래하고 이어서 오보에가 가냘프게 숨결을 이어가는 대목, 여기서는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인간의 끈질긴 생명을 느꼈어. 이어서 4분 41초 지점, 폭풍처럼 몰아치는 클라이맥스는 인생의 고뇌 그 자체를 내게 들려주고 있었어.

이 무렵, 나는 인간의 모든 지적, 문화적 유산 가운데 음악이 가장 위대한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됐고, 음악을 공부해서 지휘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 보기도 했지. 아버지가 반대하셨고, 나 또한 ‘작곡을 할 재능이 없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전공을 포기했지만 말야. 하지만 음악이 인간 본성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의지, 충동, 사랑, 선의를 가장 직접적으로 강렬하게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로맹 롤랑은 “베토벤의 일생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하루와도 같았다”고 했지.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어. 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꼽히는 베토벤이 26세 때부터 귓병을 앓았고, 30대 중반에는 거의 귀머거리가 되었고, 이 때문에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절망했는지는 32세 때 가을에 쓴 비통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어. 
  
“나는 사람들에게 ‘더 크게 말해 주세요, 저는 귀가 먹었으니까요’라고 말할 수 없었어. 아!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 과거에 내가 누구보다도 완벽한 상태로, 지금까지 극소수의 음악가들만이 알았던 완벽한 상태로 소유했던 그 감각이 약화됐다는 걸 어떻게 고백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나는 그럴 수 없어. 너희들과 기꺼이 어울려야 할 때 내가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것을 용서해다오. 나의 이 불행은 내겐 이중으로 괴롭단다. 왜냐하면 이 불행 때문에 나는 오해받고 있음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인간 사회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도 없고 상호간의 심정 토로도 할 수 없어. 나는 거의, 완전히, 혼자일 뿐이야.” 

- 1802년 10월 6일 동생 카알과 요한에게

베토벤은 침통한 마음으로 두 동생에게 작별을 고하면서도 “나를 붙드는 것은 예술, 바로 그것 뿐이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아! 내 속에서 느껴지는 움트는 모든 것을 내놓기 전에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베토벤은 결국 음악가로서 저주라 할 수 있는 청각상실을 딛고 불멸의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게 되지.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불굴의 의지’로 표상되는 베토벤의 위대성을 바로 이 교향곡에서 알 수 있는 거야.

‘따따따따~~~~’ 하는 1악장 첫 주제는 모든 클래식 음악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지. 여러 위대한 지휘자들이 4개의 이 음표를 어떻게 연주했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일 거야. 다큐멘터리 의 첫 대목에선 아르투어 토스카니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조지 셀의 지휘 모습을 비교해서 볼 수 있어.
http://www.youtube.com/watch?v=6va_z525JJc

 

   
 
 

<운명>이라는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따따따따~~~~’ 네 음표를 베토벤 자신이 “운명은 이렇게 문을 두드린다”고 설명했다는 제자 안톤 신틀러의 증언이 있어. 여기에서 <운명>이란 부제가 나왔다는 거야. 하지만 이 제목은 독일에선 별로 안 쓰인 반면 일본 사람들이 즐겨 사용했고, 그 결과 한국에서도 흔히 그렇게 불리게 된거야. 보통은 그냥 ‘C단조 교향곡’이라 하지.

안톤 신틀러의 설명이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있어. 베토벤이 빈의 프라터 공원을 산책하며 들은 노랑촉새 소리에서 이 주제를 따 왔다는 제자 칼 체르니의 증언이 있어. 최근 영국의 지휘자 가디너가 수많은 문헌 자료를 검토한 결과에 따르면 “현실의 억압 속에서도 삶의 낙천성을 놓지 않고 있는 프랑스 농민들의 민요에서 따 온 것”이란 얘기도 있어. 어느 게 맞는 얘긴지 확인하긴 어렵겠지. 베토벤이 한 가지 악상을 품고 다니다가 여기저기서 다 확인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세 가지 주장이 다 맞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이 단순한 ‘따따따따~~~~’ 소리는 이 교향곡 전체에서 되풀이 나타나며 발전해 가지. 위의 1악장 링크를 다시 들으며 ‘따따따따~~’ 소리가 어떻게 변형돼서 나타나는지 들어봐. 주제가 처음 나온 뒤 발전되는 과정 (14초 지점부터)에서도 계속 ‘따따따따~’ 소리가 들리지? 46초 지점에서는 저음을 맡은 팀파니도 ‘딴딴딴딴~’ 하지? 56초 지점부터는 부드러운 2주제인데, 목관이 노래할 때 현악 파트가 ‘따따따따~’ 하고, 저음의 첼로도 ‘따따따따~’ 하지?

이 4개의 음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BBC뉴스의 시그널로 쓰여서 더욱 유명해졌어. 이 리듬이 모스 부호의 V, 즉 승리를 나타내기 때문이었다고 해. 전시에는 적국 작곡가의 음악 연주를 꺼리게 마련인데도 이 곡이 독일의 적이었던 영국 공영방송의 시그널로 쓰였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야. 이 곡이 인간 사이의 갈등과 전쟁을 뛰어넘는 인류의 명곡임을 누구나 인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3악장 스케르초 알레그로, 4악장 알레그로(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J5CEAlKxJOg&feature=related

이 주제는 3악장에서도 변형돼서 나타나. 아래 링크의 28초 지점, 호른이 연주하는 스케르초(해학곡, 3박자의 경쾌한 악곡)의 주제도 ‘따따따따~~’야. 1분 41초 대목에서 현악이 연주할 때 목관이 ‘따따따따~~’하며 거드는 게 들리지? 스케르초의 중간 부분(2분 13초부터)은 코끼리가 춤추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신나는 대목이고, 다시 나지막히 숨죽인 스케르초에서도 ‘따따따따~~’가 이어지지. (3분 56초부터)

이 곡은 스케르초에서 피날레로 휴식 없이 넘어가는 게 특징이야. 교향곡 역사상 이런 경우는 처음일 거야. 인간 의지의 승리를 구가하는 피날레로 가기 전, 기나긴 침묵과 어둠의 터널을 통과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팀파니가 심장 박동처럼 낮게 두근거리고 바이올린이 주술을 외듯 새로운 세계를 불러오는 느낌? (5분 13초부터 5분 57초까지) 이윽고 관악이 가세하면서 화산처럼 폭발하는 피날레로 이어지지. 이 찬란한 피날레의 중간 부분에서도 ‘따따따따~~’는 추억처럼 다시 나와. (9분 30초에서 10분 6초까지) 오케스트라는 더욱 큰 기세로 한 번 더 폭발하고 거침 없이 생을 구가하다가 12분 37초 부분에서 코다(종지부, 끝부분)에 이르게 돼. 파곳과 호른의 시그널로 시작, 트럼본과 피콜로까지 가세하여 맘껏 환희를 외치는 이 대단원으로 베토벤은 인생을 긍정하게 되지.

이렇게 단순한 주제가 발전하면서 곡 전체를 구성하게 되는 작곡 기법이 왜 중요하냐고? 이런 방식은 음악사상 모차르트가 교향곡 40번 G단조에서 처음 시도했고, 베토벤이 이 곡에서 한껏 발전시켰으며, 후대의 말러, 브루크너 등 근대 교향곡의 대가들이 이어받은 교향곡 구성 방식이야. 교향곡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포인트라 할 수 있어. 음악사 얘기 나온 김에 팁 하나 더.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어둠에서 빛으로’, ‘고통을 너머 환희로’라는 베토벤의 모토는 후대의 말러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에서도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 말러, 쇼스타코비치가 베토벤 5번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모두 5번에서 어둠을 딛고 삶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흥미로워. 

이 곡은 1808년 12월 22일 안 데어 빈 극장에서 교향곡 6번 <전원>과 함께 초연되었는데, 역사적인 연주회답게 정말 장관이었던 모양이야. 저녁 6시 30분에 시작해서 10시 30분까지 장장 4시간에 걸쳐 이어진 이 음악회에선 6번 <전원>이 먼저 연주됐다고. 베토벤은 작곡자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6번에 이어 5번을 지휘했고, 파죽지세로 오라토리오 Op.86을 지휘한 다음에는 독주자로서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연주했고, 이어서 ‘합창 환상곡’ Op.80까지 내쳐 연주했다고 해.

이 역사적인 연주회를 지켜본 라인하르트가 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우리는 지독한 추위 속에서 6시 30분부터 10시 30분까지 그곳에 앉아, 한 사람이 이토록 많은 장점과 강력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격언을 확인했습니다. 여러 가지 작은 실수들이 우리의 인내심을 시험하긴 했지만, 음악회가 끝나기 전에 일어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빈 사람들은 5번 C단조보다 6번 <전원>을 더 마음에 들어하는 분위기였다고 해. 암튼, 음악회가 워낙 길다보니 공연 후반부에 사고가 일어났대. 다른 한 참석자의 증언.

“마지막으로 또 다른 환상곡이 연주되었는데, 이번에는 관현악단이 연주에 동참하고 합창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이한 편성의 연주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지요. 관현악단의 연주는 완전히 엉망이 되었고 베토벤은 예술가의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청중과 주위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채 연주를 다시 시작하라고 소리쳤습니다. 나를 비롯한 베토벤의 친구들이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나는 빨리 그 곳을 떠날 수 있는 마차가 있었으면 하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릅니다.”

연주회가 결국 엉망이 되었다는 얘기지만,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표현인 교향곡 5번과 6번이 세상에 처음 나온 그 날 그 연주회는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고 벅차는 것 같아. 이 교향곡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는지, 몇 가지 사례를 볼까.

괴테는 “나는 이 교향곡을 들으면 당장이라도 천장이 와르르 무너질 듯 마구 흔들리는 것 같다”고 말했어.

베를리오즈 <회상록>에 나오는 내용도 자주 인용되지. 1828년 파리국립음대에서 이 곡이 연주됐을 때 얘기인데, 베를리오즈는 평소 베토벤에 대해 좀체 좋게 평하지 않았던 스승 르쥐에르(Lesueus)를 모시고 이 음악회에 갔대. 4악장이 끝났을 때 청중들은 음악에 압도된 나머지 아무도 박수를 칠 엄두를 못 내고 멍하니 앉아 있었대. 한참 침묵이 흐른 뒤 뒤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박수를 시작하니까 비로소 사람들이 따라서 치기 시작했다고. 르쥐에르(Lesueur)는 연주가 끝나자 소감을 묻는 베를리오즈에게 이렇게 말했대. “우선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굉장하군. 그런데, 모자를 쓰려는데 머리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군. 다음에 얘기하세” 다음날 베를리오즈가 찾아가서 다시 묻자, 스승은 어제의 감동에서 덜 깬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대. “이런 곡은 다시는 작곡돼선 안 될 거야.” 베를리오즈의 대답이 걸작이었어. “물론이죠. 다른 사람이 앞으로 이런 곡을 작곡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슈만은 이 곡을 듣던 한 어린이가 마지막 악장이 시작되자 “무서워!” 하고 비명을 지르며 어머니 품에 파고들었다는 에피소드를 전하기도 했어. 슈만 자신은 “아무리 들어도 마치 자연의 현상처럼 새롭게 외경과 경탄을 느끼게 하는 곡이다. 이 교향곡은 음악의 세계가 지속되는 한 몇 세기가 지나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 곡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느낌도 이 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 인간 정신이 자연을 더 닮았던 시절, 사람들은 음악을 더 강렬하게 느낄 줄 알았던 걸까. 아직 어리던 중학교 1학년 때의 그 강렬한 느낌을 다시 느끼는 게 요즘은 쉽지가 않아.

다시 누나 생각. 베토벤은 끝내 삶을 긍정할 수 있었지만 22살 젊은 누나는 훌쩍 떠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지금 살아 계시다면 60을 넘겨서, 경륜과 따뜻함을 가진 초로의 할매가 되어 있을까. 나이 들어가는 것에 당혹해 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살짝 웃어줄 수 있는 유머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까. 상상할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추억으로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것, 어릴 적 내 손을 잡고 산책하면서 안데르센 동화, 그림 동화 얘기를 들려주던 누나의 목소리가 지금도 어렴풋이 귀에 들려. 그리고 누나와 함께 걷던 변두리 산책길로 쏟아지던 저녁 햇살이 지금도 아스라이 반짝여. 그 추억이 떠오르게 해 주는 곡, 바로 베토벤 5번 교향곡의 2악장이야.     
 
2악장 안단테 콘 모토 (느리고 평온하게)
http://www.youtube.com/watch?v=v5qS6tiNaFg 
 

 50년전 오늘... 생각컨대 전쟁의 아수라장 속에서 누나는 태어났다.

내가 갖고 있는 누나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집안에 큰 일이 있던 날, 마당 한켠의 창고로 쫓겨나 - 아마 아이들은 나가 있으라고 했던 모양이다 - 나에게 수박을 먹이며 씨를 퉤퉤 뱉게 하고 도리도리를 시키며 깔깔 웃던 12살 난 장난꾸러기 소녀의 모습이었다. 더운 여름 밤이었나 보다.

그 다음은 다섯 살 난 내게 정종을 먹이며 "잘 마신다"고 살살 칭찬을 하고, 누나의 칭찬에 신이 난 내가 됫병을 거의 다 비우고 비틀비틀 헤롱대는 걸 보고 깔깔 웃던 모습이다. 누나는 꽤 엽기적인 취미를 가진 사춘기 소녀였음이 분명하다.

누나는 내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동화 얘기를 해 줬는데 안델센과 그림형제의 동화 - <눈의 여왕>, <인어공주>, <일곱 난쟁이 얘기> 따위 - 를 주로 들려 줬다. 누나와 함께 걷던 변두리 산책길로 쏟아지던 저녁 햇살이 지금도 생생히 반짝인다.

누나가 사 준 책 중에 <호도까기인형>하고 <그리스 신화>를 열심히 읽었던 게 기억난다. 어느 책이 먼저였는지는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초등학교 - 그때는 국민학교 - 1, 2 학년때였던 것 같다. 아직 수색에 살 때니까....

밤늦게 자려고 누워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누나와 형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은 적도 있다. 새로 집권한 박정희를 비판하는 얘기도 있었지... 누나와 형은 어린 동생이 잠든 줄 알았겠지만 나는 뭔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한 은밀한 설레임으로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곤 했다.

누나한테 빗자루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은 기억도 있다. 방바닥에 떨어진 누나의 돈 5원을 주워서 동생과 함께 몰래 찐빵도 사 먹고 만화가게에서 실컷 만화도 본 게 발단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우리를 혼낸 건 우리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음을 나중에야 깨달았지...

누나는 음악을 좋아했고, 클래식 기타를 쳤다. 누나는 파가니니 소나티네 C장조를 쳐 주며 이 곡을 쓴 게 파가니니라고 얘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아니야, 거짓말..." 이라고 박박 우겼는데, 그 이유는 이 곡의 멜로디 중 "미.솔.솔.파.미.솔.솔.파~ "하는 대목이 "송알송알 싸리잎에 은구슬..."하는 동요의 멜로디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동요랑 멜로디가 같은 클래식 곡이 있을 리가 없어... 누나는 내가 그렇게 우기는 이유를 잘 이해해 주었다.

누나는 내게 "마음이 갑갑할 때 언덕에 올라~"라는 가사의 동요를 가르쳐 준 적도 있다. 나는 이 곡의 가사가 거짓말이라고 박박 우겼는데, 누나는 그 이유도 잘 이해해 주었다. 동요 가사에 "갑갑한..."이라는 이상한 말이 나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거였지...

내가 Praetorius의 <라 볼타> 멜로디를 따라하니까 누나가 눈이 동그레져 가지고 어떻게 그 곡을 아냐고 물어보던 기억도 난다. 누나가 자주 틀던 존 윌리엄스의 LP에서 여러번 들었었지...

누나가 모은 LP 중 브루노 발터가 지휘한 베토벤 5번을 듣고 세상이 뒤집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은 건 누나가 돌아가신 뒤였다. 이 LP는 지금도 내 책꽂이 한 구석에 그대로 있다.

영혼이 떠난 누나의 얼굴을 본 건 72년 봄... 방의 문을 잠그고 연탄가스를 피워 놓고 수면제를 먹었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밤길을 달려 왕진 올 의사를 찾아 헤맸었다. 겨우 의사를 찾아서 부른 뒤 돌아오던 밤하늘에는 별들이 유난히 많았지... 누나는 벌써 저 별들 사이 어디엔가 있을까...?

형이 불러온 의사가 먼저 와 있었는데 두 분은 예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이미 늦었다... 의사 두 분이 무슨 얘기인가 나누며 껄껄 웃는 게 너무 야속해서 분개했던 게 생각난다.

누나가 만 22살 때였다. 그 뒤 28년이 흘렀다. 그가 살았던 기간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의 시간이 훨씬 더 길 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

생각컨대 어머니의 외로운 죽음은 누나가 견디기 어려운 상처였고 새어머니와의 끊임없는 갈등은 삶이 주는 피로감을 가중시켰던 것 같다. 그리고 사회 생활 첫 해 그가 본 세상은 문학처럼 섬세하고 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방의 세 면을 가득 채운 독일 문학 서적 - 그때 네 아들이 한 방 안에서 우글거릴 때 누나는 독방을 썼지 ... - 을 나중에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은 게 단 한권도 없었다. 문학에서 현실로 뛰어들었다가 소스라쳐 놀란 걸까...

나는 너무 어려서 이유를 몰랐고 형도, 부모님도 아무 얘기를 해 주지 않았다. 나도 그 뒤 10년 넘도록 누나 얘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나가 남긴 글들과 사진은 모두 누나와 함께 화장했다고 한다.

22살 누나는 절망 속에서 용기를 갖는 법에 단련되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나의 선택이 옳았을지도 모른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사람의 선택에 대해 말하거나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 누나의 외로움을 나는 지금도 상상할 수 없다.

누나가 살아 계시다면 오늘은 누나가 만 50살이 되는 날이다.

오늘은 누나가 태어난 날이다. 그래서 누나가 세상을 떠난 일보다는 누나가 살아 계실 때의 일만 기억하고 싶은 것이다.
                                     (2002년 4월 20일, 천리안 고전음악연구회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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