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격세지감이 드네. 이 정부 들어서 표현의 자유가 87년 6월 항쟁 이전으로 되돌아갔다는 건 통탄할 일이지. 하지만 수평적 소통 방식이 대세가 됐고 시민사회의 문화적 다원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는 건 돌이킬 수 없는 변화야. 대통령이든, 회사 간부든, 누구도 예전처럼 수직적 리더십을 고집하거나 획일적 가치를 주입하는 건 불가능해졌어. 80년대 군부독재 시절엔 이른바 ‘운동권 가요’를 부르는 것 자체가 불온시 됐고, 이러한 독재에 저항하는 대열 한 켠에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 자체가 ‘뭔가 좀 켕기는’ 일이었지.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한결 자연스러워졌어. 다행이야.

과거의 부자연스런 태도 이면에는 클래식 음악은 ‘유한계층이나 즐기는 것’, ‘생존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겐 너무 한가한 여흥’, 뭐, 이런 류의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아.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나 안 듣는 사람들이나 마찬가지였어. 어렸을 적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어 온 나 또한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니까. 가령, 책을 읽다가 ‘칼 마르크스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좋아했다’, ‘북한에서는 쇼팽을 진보적인 음악가로 매우 높이 평가한다’ 같은 대목이 눈에 띄면 “어, 그런가? 참 이상하다”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곤 했으니까. 87년 이후 노조 활동에 꽤 열심히 참여했던 나조차  “사회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은 ‘뿔 달린’ 사람 아닐까” 라는 원초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거야.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칼 마르크스도, 북한 사람들도, 그리고 나 자신도 결코 ‘뿔 달린’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자연스레 인식하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이 편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처음 자극을 준 사람은 뜻밖에도 당시 ‘노동자문화운동연합’ (줄여서 ‘노문연’) 의장을 맡고 있던 김정환 형이었어. 형은 <지울 수 없는 노래>, <황색 예수>, <기차에 대하여> 등 20권이 넘는 시집을 냈고, <클래식은 내 친구>, <내 영혼의 음악> 등 음악 에세이도 많이 쓴, 아주 소탈하면서도 뚝심 있는 글쟁이지. 술 좋아하고, 젊은 친구들과 얘기하기 좋아하고, 술이 좀 되면 그 자리에서 오페라 아리아 수십 곡을 연달아 부르기도 하는 괴력의 예술가였지. 얼마 전부터 셰익스피어 전집 번역한다 하셨는데, 그 똥배에서 나오는 묵직한 힘으로 잘 해 내실 거라고 봐.

암튼, 당시 정환 형은 우리 노조와 교류가 많았지. ‘노문연’ 노래패는 지금 상상이 잘 안 될 정도로 맹활약을 했는데, 특히 이들이 낸 카세트 11집 <평등의 땅에>는 정점에 이른 노래 운동의 수준을 보여주는 ‘걸작’들로 가득 차 있었어. 89년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언론노조 (당시는 ‘전국언론노련’) 창립대회 때 선보인 이 노래들은 지금은 아쉽게도 거의 잊혀진 것 같아. 하지만 얘기 나온 김에 한두 곡만 함께 들어보면 좋겠네.    

<저 평등의 땅에> http://www.youtube.com/watch?v=_DYZUxvrrjI

저 하늘 아래 미움을 받은 별처럼
저 바다 깊이 비늘 잃은 물고기처럼
큰 상처 입어 더욱 하얀 살로
갓 피어나는 내일을 위해
그 낡고 낡은 허물을 벗고
잠 깨어나는 그 꿈을 위해
우리 노동자의 긍지와 눈물을 모아
저 넓디넓은 평등의 땅에 뿌리리
우리의 긍지, 우리의 눈물,
평등의 땅에 맘껏 뿌리리

<벗이여 해방이 온다>, <그날이 오면>으로 여러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 있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선애였지. 서정적인 터치의 신곡 <저 평등의 땅에>도 89년 언론노조 창립총회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어. 쌍용자동차, 한진중공업 등 투쟁 현장에서 아직도 가끔 부르나 봐.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http://www.youtube.com/watch?v=1O8Pn-FAiV4

죽은 자 무엇으로 남았는가
남에 유채꽃, 북에 진달래 흐드러져
이 땅에 흘린 피로 맺혀 있네
온 누리 온 몸 흔드는 함성
눈부신 노동과 투쟁의 열매로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가
남과 북의 원한 강물 져 흐를 때
우리는 해방의 나라로 가야하네
온 누리 물불로 아름다운 세상
치욕인 산 눈물인 산 떨쳐 일어나
아 백두에서 한라, 한라에서 백두로

우리 해방의 나라 기억하리라
산천초목 영원한 기쁨의 나라
온누리 부활로 피어 오르니
투쟁이 사랑으로 만나는 세상
투쟁이 영원으로 만나는 세상
아 통일의 땅에 우리 가리라

어휴, 지금 들으니 좀 찬송가 같기도 하네. ‘온누리’, ‘영원’ 같은 단어도 좀 생경하고. 하지만 당시는 통일을 향한 열정과 강고한 투쟁 의지를 담고 있는 이 합창이 장내를 압도했지. 나도 이 노래에 흠뻑 취해 집회 뒤풀이 때 큰 소리로 불렀던 기억이 나네.

당시 나는 한편으로는 ‘운동권 가요’를 입에 달고 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클래식 음악을 혼자 들으며 지내는, 일종의 ‘분열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 같아. 그 상태가 지금까지 이어진 탓에, 난 ‘대중 가요’는 하나도 모르고 오직 클래식 음악 아니면 운동권 노래뿐인 바보가 됐어. 내가 노래방 가는 걸 제일 싫어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분위기 살릴 만한 노래는 한 곡도 모르니 친구들 썰렁하게 만들 게 뻔하지. 그러니 노래방 갈 엄두가 나겠어?

아무튼, 89년 어느 날 정환 형 집을 방문할 일이 있었어. 그런데, 당산동 집 앞에 도착하니 뜻밖에도 어디선가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야. 이 분이 클래식 음악 좋아한다는 걸 전혀 예상치 못했으므로 혹시 다른 집에서 나오는 소리 아닌가 귀를 의심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사방을 꽉 채우는 모차르트! 

http://www.youtube.com/watch?v=Zu9VqoNWK-s FM 방송 진행자라면 이렇게 말하겠지.  “아르투르 그루미오가 연주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G장조 K.216 중 1악장 알레그로였습니다.”

(모차르트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5곡 내지 7곡 완성했어. 7곡 중 5곡은 모차르트가 작곡한 게 분명하지만 나머지 2곡은 불확실해서 최종 결론을 내릴 수 없어. 그래서 정확히 몇 곡인지 모르는 거야. 암튼 이 곡은 3번째 작품이야. 협주곡은 독주악기와 관현악단이 대등한 자격으로 함께 어우러지도록 만든 음악이야. ‘G장조’는 우리말로 하면 ‘사장조’로, ‘G’음(‘사’음)을 기본음으로 하는 장조곡이야. 악보 첫머리에 ‘#’(샵)이 하나 붙어있지. ‘K’는 모차르트 작품 목록을 만든 쾨헬(Koechel)의 이니셜이야. 이 분이 정리한 모차르트 작품 목록 중 216번째 곡이란 뜻이지.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번호는 Op(Opus)인데 모차르트는 좀 특이하지? ‘알레그로’는 이탈리아말로 ‘빠르게’라는 템포 지시어고. 흠... 이런 건 몰라도 된다고 지난번에 얘기했으니 머리 아파하지 말 것.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어리둥절한 내가 질문했지. “아니, 노동자 문화운동 하시는 분이 모차르트가 웬 말이요?” 정환 형이 웃으며 대답하더군. “노동자가 모차르트 들으면 안 되냐? 좋은 건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어야 되지. 그래야 좋은 거 아니야?”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어. “????...? !!!!!...!”

이윽고 나는 정환형의 ‘뻔뻔함’(?)과 ‘대담함’을 새삼 존경하게 됐고, 어색한 죄책감에서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했고, 그날 이후 정환 형을 만나면 함께 음악 듣고 얘기 나누는 게 즐거워졌어. 홍대 앞에 있던 ‘키작은 자유인’에서 가끔 한잔 하며 음악을 나누곤 했지. 이후, 세월의 힘을 빌어, 머리에 뿔난 사람은 없고,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데는 좌와 우가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됐지.

소련이 낳은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도 이 곡을 연주했어. 내가 아주 존경하는 이 분이 직접 지휘하며 연주하는 동영상이 있네. 1968년 스톡홀름 연주. 아직 냉전이 한창일 때지? 음악 앞에서 이념과 체제가 무의미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http://www.youtube.com/watch?v=M-UqcolD2Qk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은 내가 중학 시절부터 아주 오래 제일 좋아했던 곡 중 하나야. 어린이 같은 순수함으로 가득 찬 따뜻한 음악이야. 중학교 때 처음 들은 건 지노 프란체스카티 연주였어. 내가 숭배하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콜럼비아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협연했지. 바로 그 연주를 함께 들어보자.

1악장 알레그로 (빠르게)
http://www.youtube.com/watch?v=BkCcK-RG6ms

오케스트라가 첫 주제를 연주하고 이어서 모든 현악기가 도약하는 대목(위 링크 24초 지점)부터 행복감을 느꼈지. 호른이 연주하는 2주제(40초 지점)에서 잠시 편히 쉬나 했더니 즉시 순결한 현악기의 노래가 이어지더군. (48초 지점) 그런데 얼마 안 가 바이올린이 예쁘게 속삭이고 첼로가 부드럽게 받쳐주는 대목(55초에서 1분 8초까지)에서 한 순간 천국의 문이 열리는 걸 느꼈어. 이 대목들에서 느낀 감동은 곡 전체로 이어졌지. 

모차르트가 19살 때 고향 잘츠부르크 궁정악단의 바이올리니스트 브루네티를 위해 만든 곡이야. 이미 유럽 전역의 음악 흐름을 다 흡수했고, 세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도 우뚝 선 젊은 모차르트. 그는 자유 음악가가 되기를 갈망했지만 아직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 2006년 다큐멘터리 ‘모차르트 2부작’을 만들 때 모차르트의 성장 과정을 묘사하면서 이 곡 2악장의 선율을 사용했어. 평생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유지했던 모차르트의 이미지에 이 곡의 주제가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아래 링크 1분 42초부터 제1주제 / 2분 22초부터 2주제) 그가 몰이해와 푸대접으로 아픔을 느끼는 대목에서 단조로 변형된 주제를 썼어. ‘천사의 슬픔’이 있다면 바로 이런 느낌 아닐까? (아래 링크 4분 10초부터)

2악장 아다지오 (아주 느리게)
http://www.youtube.com/watch?v=Uy3bSP7OyF4&feature=related

모차르트 음악은 이렇게 평온하고 달콤했지만 이는 음악가로서의 소명에 따른 창작의 결과일 뿐, 모차르트 자신의 삶이 언제나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아. 아버지에게 쓴 편지 한 구절. “평화롭거나 달콤하지 않은 것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슬픔과 약간의 즐거움, 그리고 몇몇 참을 수 없는 일들로 이루어져 제 인생을 만들어 낸 현실 말입니다.”  

3악장 론도 알레그로
http://www.youtube.com/watch?v=mNp1hnPNTxE&feature=related

마지막 악장은 천진한 어린이가 뛰노는 모습을 보는 듯해. 아주 단순한 곡이니 형식을 조금 살펴 볼까? 일단 음악을 두 번 들어 보라고 권하고 싶어. 처음 들을 때는 첫 주제가 나오는 대목이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위 링크 시작 부분 / 34초 / 1분 39초 / 3분 / 4분 40초 / 6분 12초 지점) 메인 주제가 되풀이 나오고 그 사이사이에 다양하고 재미있는 악절들이 삽입된 ‘론도’ 형식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야. 이탈리아말 ‘론도’는 영어로 라운드(Round), ‘돌고 도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돼. 고전 협주곡의 마지막 3악장에서 많이 쓰는 형식이니 지금 이해해 두면 좋을 듯. 한 번 더 들을 때는 중간 중간 삽입된 대목들의 매력을 느껴보도록. 단조로 구슬프게 흘러가는 대목(1분 51초 지점), 스트링의 피치카토(pizzicato, 현악기를 활로 연주하지 않고 손가락으로 퉁기는 주법) 위에서 솔로가 매혹적으로 노래하는 대목(3분 27초 지점), 그리고 아예 귀여운 동요가 나오는 대목(3분 56초 지점)을 들어봐. 너무 머리를 많이 쓰지 말고 그냥 느끼면서 따라 부르면 더 좋아. 어때, “♬도.도.도.레.미.미.미.도.레.레.레.시.도시도레도!♬”-->“♬밥.상.위.에.젓.가.락.이.나˜란히나˜란히나.란.히!♬”랑 똑같지?

모차르트 협주곡의 착한 멜로디가 흐르는 집은 늘 따뜻하겠지? 오늘 얘기한 3번 말고 다른 곡들도 좋으니 나중에 찾아서 들어보기 바래. 참, 완성된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니지만, 5번의 느린 악장으로 쓰기 위해 새로 만든 ‘아다지오’ E장조 K.261도 참 아름다운 곡이야. 아래 링크해 놓을게. 밤에 잠들기 전에 틀어 놓으면 가족 모두 평화로운 시간을 맛볼 수 있을 거야. 강추!!
 
아다지오 E장조 K.261
http://www.youtube.com/watch?v=UvygWVTEkb8&feature=related (아르투르 그루미오)
http://www.youtube.com/watch?v=XSrOwiuJ0jg&feature=related (이착 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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