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다. 정말 좋다.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나눴다.”

아직까지도 한국말이 약간 서툰 그였지만, ‘정말 좋다’라는 말만은 전화를 통해서도 확실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하야 소식이 전해진 11일, 그의 목소리는 들뜨고, 가볍고, 상쾌했다. 

칼리드 알리(42). 그는 카이로대학을 졸업한 뒤 94년 주한 이집트 대사관을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7년 동안 주한이집트대사관 상공회의소에서 통역일을 했다. 그러나 그는 무바라크 정권의 독재와 부조리에 실망해 이태원에 음식점을 열고 한국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무바라크가 물러나기 하루 전인 10일. 이날 오후 3시 한남동 이집트 대사관 앞 집회에서였다. 10명 남짓한 이집트인들을 비롯해 200여명이 모였다. 무바라크의 하야를 촉구하는 집회였다. 때가 때인지라 취재진들도 대거 몰려왔다. 

“야스콘, 야스콘 허즈니 무바라크(물러나라, 물러나라 호스니 무바라크).”

알리는 “어제 기대를 했다. 밤새 TV를 보며 무바라크의 사임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국의 지난 역사를 언급하며 한국인들의 연대를 촉구했다. 

“한국도 우리와 같은 역사를 지나왔고, 시민들이 독재를 축출했다고 안다. 한국 국민들이 우리와 함께 해줬으면 한다.”

이들 이집트인과 무바라크 퇴진을 촉구했던 집회 참가자들은 ‘우리들’이 너무 이들의 ‘고통’과 ‘염원’에 무감하다고 말했다. 언론들의 보도 태도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집트 시위에 대한 깊이있는 분석을 찾아볼 수 없다. 특파원까지 현지에 보냈지만, 영어를 잘하는 몇몇 이집트인들의 목소리만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들은 소수고, 고통받는 민중이 아니다. 현지 민초들의 목소리나 상황을 더 보도해야 한다.”

나눔문화의 김재현 연구원(27)의 말이다. 국내 언론이 ‘시위’나 ‘집회’ 같은 표피적인 보도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왜 이집트 민중들이 떨쳐 일어났는지, 그 근본에 대한 깊이있는 탐사가 없다는 것이다.

이집트 시위 관련 보도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역시 나눔문화의 신해린(24)씨는 “국내 언론을 보면 놀랍다. 이집트 시위가 끝나간다거나 잦아든거나 하는 보도까지 있더라”고 했다.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이집트대사관 근처에서 열린 <무바라크 즉각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에 참가한 이집트인들이 무바라크의 퇴진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사실 한국 언론뿐만 아니라, 서방의 대다수 언론들은 이집트 시위가 지난 주초 한 때 잦아들고 있다고 보았다. 무바라크가 즉시 퇴진 거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오락가락했던 미국이 다시 ‘질서있는 전환’을 강조하면서였다. 하지만, 이는 오판이었다. 이집트인들은 무바라크와 미국, 나아가 마지막 저지선인 ‘이집트군’까지도 물리칠 각오를 명백하게 과시했다.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 등 대도시 중심의 시위와 집회가 전국 각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된 것이 결정적인 전기였다. 아무리 군이라 할지도 이집트 전역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주한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의 집회가 끝날 무렵, 영어로 번역된 박노해 시인의 시가 이집트 인의 음성으로 낭독됐다.

“이제 새로운 ‘분노의 날’이 밝아 온다 / 보라, 우리는 날마다 일어서고 있다 / 일어나, 세계의 정의를 외치고 있다(Now a new 'day of anger' is dawining/Look, we are rising up everyday/Standing up, we are shouting the justice of the world).”

그 날 밤(정확하게는 다음날 새벽) 무바라크가 대통령직을 내놓았다고 슐레이만 부통령이 발표했다. 알리는 11일 집회 때 ‘슐레이만도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도 무바라크나 마찬가지다. 슐레이만도 같이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다면 군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군은 괜찮다. 믿을 수 있다.”

사실 이집트군부야말로 무바라크 집권의 ‘원천’이자 튼실한 ‘뒷배경’이었다. 1952년 나세르가 주도한 이집트 청년장교단이 쿠데타로 영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왕정을 붕괴시키고 공화정을 수립한 이후 이집트군은 이집트의 ‘주권’과 ‘자존심의 수호자로 시민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수십년 동안 이미 ‘친미세력’으로 굳어진 이집트군 수뇌부가 과연 이집트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집트 군부는 과연 알리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을까? 그의 들뜬 목소리에서 그 어떤 불안감을 읽게 되는 것 역시 우리가 겪은 지난 역사와 무관치 않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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