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두두둑 툭툭. 뭔가 달리는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빗방울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좁쌀 크기의 하얀 소금 같은 것들이 차 앞 유리에 부딪히면서 탁탁 튀어 오르고 있었다. 우박이었다.

지역라디오에서 아나운서가 오전에 남부지방부터 시작된 비구름이 점차 북상해 오늘 내일 전국에 10에서 40밀리미터에 이르는 비를 뿌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출발한지 5시간이 조금 더 지났을까. 안개처럼 흩뿌려진 빗살 사이로 순천IC 이정표가 나타났다.

우리 국토의 남단에 위치한 순천은 자연의 보고로 불리는 순천만을 품고 있기도 하지만 김승옥의 근대소설 <무진기행>의 무대로도 유명한 곳이다. 소설이 나온 게 1966년이었으니 순천도 그때와는 많이 변했을 것이다. 도심이 생각보다 발달하지는 않았지만 10여분을 차로 달리는 동안 아파트와 상가들이 꽤 줄지어 있었다.

하지만 큰 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순천만 생태공원 길로 접어드니 <무진기행>에 묘사된 순천의 옛 모습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현대식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얕은 산등성이를 병풍처럼 두른 수만 평에 이르는 논두렁과 갈대숲 사이로 두루미 무리가 먹이를 찾고 있었다. 나중에 전해들은 것이지만 겨울을 나러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순천만으로 내려오는 흑두루미와 재두루미는 국제보호조로 지정될 정도로 보기 드문 철새라고 한다. 

임완호 감독이 순천만 작업을 하며 만든 1차 보고영상
Approaching from Wanho Lim on Vimeo.
 

목조로 지어진 생태공원 센터 앞에 도착하니 임완호(48) 감독이 마중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방송가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기획과 각본, 촬영, 편집까지 도맡아 하는 1인 제작자다. ‘DMZ와일드’라는 다큐멘터리 전문 독립제작사 대표이기도 하다.

“내려오는 날 이렇게 비가 내려서 어떡하죠?”

그가 점잖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눈가의 주름이 보기 좋게 잡혔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날은 작업하시기 어려울 것 같은데 주로 뭐하세요?”

“비가 안 오면 순천만을 돌아보면서 원하는 장면 몇 컷을 촬영해두려고 했고, 비가 오면 순천만 가까운 곳에 렌트할 집을 보러 다니려고 했죠.”

“그럼 그럭저럭 집이나 보러 다닐까요?”

“하하. 그래도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그럴 수 있나요. 일단 차를 타고 순천만이나 한 바퀴 돌아보죠.”

 

 

 

 

그의 안내를 받아 은색 현대 SUV 차량에 올라탔다. 차량 외관을 보니 구입한지 몇 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범퍼와 사이드 쪽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비포장도로를 다닐 때가 많기 때문에 차가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했다. 차 안은 트렁크에서 뒷좌석까지 온갖 촬영장비들로 앉을 자리가 없었다. 장비들을 한쪽으로 몰아넣고서야 겨우 한 자리를 낼 수 있었다.

“RED 마크 보이죠? 국내에 몇 대 들어와 있지 않은 카메라예요. HD급보다 4배나 뛰어난 화질을 뽑아준다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렌즈까지 촬영장비에 들어간 돈만 족히 1억 원은 될 겁니다.”

장비 얘기가 나오자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영상을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장비가 좋은 다큐를 만들어주지는 않지만 극단적인 환경에서의 결정적인 한 컷이 바로 좋은 장비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RED 카메라는 초고속 촬영도 가능한데, 그의 다큐에 등장하는 나방의 빠른 날개 짓이나 파도가 바위에 부딪혀 부서지는 감각적인 장면들은 대부분 이 카메라로 찍은 것들이다.

 

그는 지난 가을부터 순천시에서 발주한 1년짜리 프로젝트를 맡아 순천만 주변의 사계절을 카메라에 기록하고 있다. 그는 지난 3~4개월 동안 순천만과 서울을 오가며 갈대숲, 갯벌, 그 안의 생태계를 찍었다고 했다. 이렇게 1년간 그가 만든 영상은 2013년 순천만에서 열리는 국제정원박람회 홍보에 사용될 예정이다. 방송다큐 작업으로만 안정적인 수입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독립PD들은 이런 프로젝트들을 병행하는 게 현실이다. 인터뷰 중에도 다른 지자체에서 작업 중인 후배 PD들에게서 몇 번이나 항공촬영을 도와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다.

그냥 차를 타고 아무 곳이나 대수롭지 않게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그는 이곳의 지형을 이미지로 머릿속에 기억해 둔다고 했다. 그는 지금 인터뷰 약속만 아니었다면 벌써 강원도 진동계곡으로 달려갔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정도 비라면 지금쯤 진동계곡에는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을 거라는 얘기다. 언제 어디에 가면 기대한 장면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자연 다큐 감독으로 재능이 있다고 했다.

“비가 좀 그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헬기를 띄울 수 있겠어요.”

그가 갈대숲이 무성한 길가 한쪽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이상한 물건을 꺼내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놨다. UFO 같이 생긴 원반 주위로 8개의 조그만 프로펠러가 달려 있는 무선조종 헬기였다. 헬기 중앙 하단에는 HD급 경량 캠코더를 달수 있는 받침대와 고정대가 있었다.

그가 조종기를 만지자 헬기가 붕~하는 소리와 함께 수직으로 공중에 떠오르더니 곧장 강 하구를 따라 날아갔다. 직경 60센티미터 정도의 커다란 물체가 금세 작은 점처럼 멀어졌다.

삼성 직원→한겨레 사진기자→1인 다큐 제작자

그는 청년시절 취업 운이 좋은 편이었다. 대학졸업과 동시에 삼성에 입사했고 홍보실로 발령이 났다. 하지만 남들이 부러워했던 대기업 직장생활은 일주일 만에 끝났다. 입사 후 첫 업무가 홍보자료를 출입기자들에게 돌리는 것이었는데,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길로 사표를 던지고 나와 입사한 곳이 바로 한겨레였다. 미2사단 카투사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신문을 편집하면서 사진을 찍었던 경험이 이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됐다.

1990년에 입사해 5년 동안은 사건 현장을 누비며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어느 날 의욕 없이 시들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스틸이 아닌 동영상 작업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자연 다큐멘터리에 흥미가 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BBC와 NHK에 내가 만든 다큐를 틀겠다. 그는 몸속 깊은 어딘가에서 다시 스위치가 켜진 것을 느꼈다. 그는 미련 없이 한겨레를 떠나 DMZ와일드라는 독립제작사를 차렸다.

처음 해본 일이라 쉽지는 않았다. 한 길에만 매달렸지만 8년 동안은 이렇다 할 변변한 수입조차 없었다. 아내도 학위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돈 문제야 어떻게 넘긴다고 해도 장기간 야외촬영이 불가피한 일의 특성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봐주지 못했다는 것은 지금까지도 가족들에게 미안함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시작한 일이 벌써 18년이 됐다. 작품 목록에는 30여 편이 쌓였고 방송사에서 그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일이 정기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방송사와 독립제작자는 갑을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바람은 대단한 것도 아니다. 해외 판권만이라도 원 제작자에게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장비와 작품에 더 투자할 수 있고 명품다큐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게 그의 지론이다.

MBC에서 방영된 <물의 여행>(2009)은 다큐가 넘기 쉽지 않은 1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곤충들의 짝짓기를 다룬 <유혹의 기술>(2009)도 MBC를 통해 방송된 뒤 지난해 일본 NHK에 비싼 값에 판매됐다. 그의 촬영기술은 해외에서도 인정받아 NHK에서 제작진이 직접 한국으로 날아와 그가 어떻게 다큐를 만들었는지를 조명하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일도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겨울 새벽에 나방이 땅속에서 나와 꼬리에서 페로몬을 뿌리면서 교미하는 장면이나, 몸에서 암컷 나방이 뿜어내는 페로몬과 유사한 물질을 만들어 내는 수컷나방을 사냥하는 거미를 어떻게 찍은 거냐고 관심을 보였어요. 이들이 나올만한 곳에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추위에 떨면서 밤새 카메라를 돌리느라 꽤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카메라에 담은 건 그때 딱 한번 뿐이었어요.”

남극과 DMZ, 극한의 자연과 미지의 땅에 대한 동경

그는 최근 BBC에서 인정하는 다큐를 만들겠다는 것 외에 새로운 목표를 하나 추가했다. 국내에서 남극 다큐를 가장 많이 찍은 제작자라는 타이틀이다. 그는 벌서 남극만 세 번을 다녀왔다. 그는 올해나 내년쯤 다시 남극에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가 남극과 인연을 맺은 것은 KBS에서 방영된 <남극으로 가는 사람들>(2006)이 계기가 됐다. 국내 과학자들과 함께 남극 세종기지에서 탐사하는 것을 다큐로 제작한 것이었는데, 그 뒤로는 거의 매년 남극에 갈 기회가 생겼단다. 욕심을 내다보니 방송사에 남극 촬영 전문가로 이름이 알려져 지난해에는 SBS에서 방영한 <남겨진 미래, 남극>(2011)의 촬영감독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할 기회도 얻었다.

남극은 접근이 쉬운 곳은 아니다. 허가를 받기도 어렵고, 허가를 받더라도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제 날짜에 남극 땅을 밟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극에서 이동이 가능한 시기는 10월에서 2월, 불과 4개월 남짓한 남극의 여름뿐이다. 그는 남극 기지의 월동을 다큐로 만드는 게 목표다. 하지만 1년 동안 남극에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집에서 반대가 심하다. 그는 “2014년에는 아무래도 최종적으로 결심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비무장지대(DMZ)도 그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그는 TV조선의 의뢰를 받아 DMZ의 자연 생태를 담은 다큐를 제작해 방송을 앞두고 있다. 허가가 쉽지 않다보니 제작기간만 2년이 걸렸다. 고라니가 카메라 앞으로 달려오던 순간을 그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스카이라이프가 제작하는 DMZ 3D 다큐의 총연출을 맡아달라는 제안도 받았다.

“지금도 자연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신기하다”

순천만 하류로 날아갔던 헬기가 이륙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임 감독 앞에 있는 모니터에는 헬기에서 찍은 영상이 무선으로 실시간 전송되고 있었다. 순천만 특유의 원형 갈대 군락이 실제 헬기를 타고 항공촬영을 하는 것처럼 화면에 들어왔다.

처음 순천만에 왔을 때에는 밋밋한 갈대숲을 어떻게 담을까 고민이 컸다고 한다. 당시 그는 막 헬기 조종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그는 연습량이 부족했지만 순천만 상공에 헬기를 띄우는 모험을 강행했다. 하지만 결국 조종 미숙으로 헬기는 강물 밑으로 추락했다. 몇 시간을 수색했지만 잔해조차 찾지 못했다.

“천만 원이 순천만 어딘가에 묻혀 있는 셈이죠.”

이 헬기는 해외 사이트에서 부품을 주문해 직접 조립했는데 비용만 천만 원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지금 귀환하고 있는 헬기는 말하자면 2호인 셈이다. 빗방울이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굵어지기 시작했다. 임 감독은 헬기가 비를 맞지 않도록 카메라를 재빠른 손놀림으로 분리하고 다시 트렁크에 실었다.

“아무래도 오늘 중엔 그치지 않을 것 같네요. 내일까지 이렇게 쭉 가겠어요. 차라리 빗방울이 더 굵으면 흑두루미의 몸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고속으로 촬영하면 꽤 괜찮은 컷이 나올 것 같은데 이 정도로는 화면에 나오지 않아요. 하지만 봄비란 건 말이죠, 생물들에게 신호와 같은 거예요. 날씨가 따듯해지면 땅속에 동면하던 것들이 비가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다 봄비가 내리면 놀라운 에너지와 생명력으로 땅을 뚫고 솟아올라오는 겁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아요? 제가 하는 일은 바로 이런 거예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지나치는 것들을 찍어서 보여주는 것.”

순천만 갈대숲에 봄비가 쏟아지는 장면은 마치 아무도 걷어낼 수 없을 것 같다던 <무진기행> 속 안개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봄이 되고 여름이 되면 순천만은 칠면초로 인해 일곱 가지 색깔로 옷을 갈아입으며 장관을 뽐낼 것이 분명했다. 생태공원의 끝을 나타내는 이정표가 옆으로 빠르게 지나가 사라졌고, 와온 해변이 언덕길 아래로 끝없이 펼쳐졌다.

■ 임완호 DMZ와일드 대표는…

1990년 한겨레 사진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했다가 BBK와 NHK에 방영할 만큼 고품질의 자연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DMZ와일드’라는 1인 독립제작사를 설립했다.
KBS <느티나무 둥지, 100일의 기록> <지리산 반달곰은 살아있는가> <도요새 1만Km의 여로>, MBC <물의 여행> <유혹의 기술>, SBS <늑대복원, 3년의 기록> <남극 20년, 우리는 대륙으로 간다> <남겨진 미래, 남극> 등 지금까지 30여 편에 이르는 생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NHK에서는 지난해 그의 다큐 제작 모습을 담은 프로그램이 방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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