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당신을 잊으려 노력한/지난 몇 개월 동안/아픔은 컸으나/참된 아픔으로/세상이 더 넓어져/세상만사가 다 보이고/…/내가 많이도/세상을 살아낸/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김용택의 <사랑>)

이 시엔 거창한 미사여구가 없다. 일상의 용어로 이별 후 겪는 감정을 담담하게 그렸다. 그래서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시 <사랑>은 위로가 된다. 성우 서혜정의 목소리는 이 시와 닮았다. 희로애락의 감정이 다 없어진 듯한 그 목소리엔 담담함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서혜정 씨의 ‘스컬리’ 목소리도 이런 소리의 연장선상이다. 외화시리즈 속 여주인공인 이 FBI 요원은 어떤 놀라운 상황에서도 안정을 잃지 않은 채 나지막하고 지적인 목소리를 냈다. 근데 이 목소리도 웃길 수 있다. 지난 27일 오전 마포구 상암DMC의 한 스튜디오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가 그랬다.

“자, 사실을 말해봐… 화성인 서식지로 출~발.”

케이블 방송 tvN의 <화성인 X-파일>에서 스컬리의 목소리로 내레이션 중인 서씨. 막힘없이 목소리 연기에 몰두하던 그가 잠시 멈췄다. 요즘 유행하는 ‘김꽃두레’ 버전으로 ‘이런 디저트’를 읽어야 하는데 좀 난감한 모양이었다. PD가 먼저 시범을 보이자 그도 뒤이어 도전, 한번에 ‘OK' 사인을 받았다.

 

 

 

 

IMF 이후 줄어든 성우 영역…예능·연기 도전 ‘새로운 모색’

스컬리는 서씨를 성우로서 정상의 자리에 올린 주역이다. 10년을 스컬리로 산 그에게 이 목소리는 가장 애정이 가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히트작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 속 목소리도 스컬리가 없었다면 탄생하지 어려웠다. 스컬리 목소리에 114 콜센터의 안내 목소리를 섞은 뒤 모든 감정을 다 빼고 10% 정도의 시니컬함만을 주입해 만든 목소리가 “남자, 여자 몰라요. 여자, 남자 몰라요. 오 마이 갓”이다.

올해로 성우 인생 30년을 맞이하는 그에게 <롤러코스터> 내레이션은 처음으로 해보는 예능이었다.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성우 서혜정의 목소리로 끌고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왔다. 성우라는 직업적 특성으로 장막에 쌓여 있던 그가 대중에게 얼굴을 알리는 계기도 됐다. 지난해엔 대중문화예술상, 한국방송대상, 한국PD대상 성우 부문에서 내리 삼관왕을 했다. 800여 명에 이르는 성우를 대표하는 이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서씨의 고민도 깊어졌다. 그가 예능에 도전할 만큼 성우를 둘러싼 환경을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우들이 설 자리는 확실히 좁아졌다. 예전 성우들은 라디오 드라마, 외화는 물론 한국영화에서도 배우들의 목소리 연기를 도맡았다. 영화 <장군의 아들>의 ‘김두한’ 역도, <변강쇠>의 그 유명한 대사인 “마님!”도 모두 성우들의 몫이었다.

과거 광고에서도 이들은 한몫했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 전용 성우들이 있었다. 배우 이영애 씨가 모 화장품 회사가 출연해 했던 명대사 “산소 같은 여자”도 서씨의 목소리다.

“하지만 IMF 이후 이런 시스템은 한꺼번에 무너졌어. 효율과 비용절감이 최우선이 됐지. 성우 목소리의 비중이 낮아지니 가격도 당연히 내려가고…”  

라디오 드라마도 사라지고, 외화도 더 이상 더빙하지 않는 추세다.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도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간다는 미명 아래 인기 배우들에게 개방됐다. 최근 화제가 있고 있는 MBC <남극의 눈물>도 탤런트 송중기씨가 이끌고 가고 있다.

 

이런 변화들은 서씨를 제자리에만 머무를 수 없게 한다. 성우란 직업에서만 보면 그는 이미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 있다. 하지만 이제는 후배 성우들을 위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위치다. 그가 다음 달부터 연기에 도전하는 이유다. 영화 <도가니>에서 교장 역에 분한 성우 출신 장광씨처럼 정통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우로서의 정체성을 살리면서 ‘얼굴 있는’ 배우로 활약할 예정이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30년 동안 오디오맨으로 살았지만 이제는 달라져야 해요. 물론 정통 성우로서의 길만 걸었던 이들의 입장에선 이런 저를 좋지 않게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오늘날 성우는 위기에 서 있어요. 차고 나가는 게 있어야 해요.”

확실히 성우들은 이전에는 가지 않았던 길을 닦고 있다. 지난해 말 남자 성우들이 모여 토크콘서트를 열었으며, 다음 달부터는 성우들이 미니 드라마나 낭독극을 할 예정이다.

서씨는 성우로서는 처음으로 기획사와 계약하기도 했다. <화성인 X-파일> 녹음이 끝나자 로드매니저가 모는 밴에 올라탔다. 오늘 있을 청소년 대상 강연을 앞두고 머리와 얼굴을 매만지려 청담동의 한 미용실을 향했다. 기획사가 지정한 미용실이다. 그는 확실히 새로운 변화에 올라탔다.

목소리 ‘성형’? 어렵지 않아요~ 정치인 중에서는 ‘한명숙’ 목소리 최고

근처 식당에서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먹은 후 그는 다시 여의도 KBS로 향했다. 1TV교양 프로그램 <지식콘서트>에서 내레이션을 하기 위해서다. 그는 담당 PD에게 인사를 한 후 후다닥 녹음실로 들어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분야는 다큐멘터리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으니 일석이조란다.

사실 그의 진가도 여기서 발휘된다. 그 특유한 편안한 목소리로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대본을 읽어나갔다. 정확한 발음과 어울린 목소리는 전달력이 뛰어나다. 감정이 절제된 목소리는 사람을 몰입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이미 방송업계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목소리는 정확한 발음도 발음이지만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씨 목소리는 타고남과 노력의 결정체다. 82세의 노모는 아직도 낭랑한 목소리를 유지한다. 가끔은 집으로 전화를 건 사람들이 노모를 그로 착각하기도 한단다. 좋은 목소리의 유전자는 어머니의 교육으로 더욱 다듬어졌다. 어린 시절 유복한 사업가의 무남독녀로 자란 그가 애교를 떨 양으로 혀 짧은 소리를 내면 대번 “다시 말해봐. 천천히, 혀 접지 말고”라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이어졌단다.     

서씨가 꼽는 좋은 목소리도 바로 말씨에서부터 시작된다. 또박또박, 고운 말씨를 사용하면 목소리는 저절로 바뀐단다. ‘영혼의 울림’이라는 목소리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말해준다고 했다. 성우 배한성씨의 경우 관상의 일종인 목소리상을 보기도 한다.

서씨는 원래 지금과 같은 중저음이 아니었다. 카랑카랑한 하이톤의 목소리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지적이고 우아한 목소리를 내고 싶어 선배 성우인 주희씨를 모델 삼아 꾸준히 연습했다. 주씨는 <6백만불의 사나이>의 소머즈, <말갈량이 삐삐>의 삐삐, <달려라 하니>의 하니 등의 목소리를 담당했다. 스컬리 목소리는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졌다.

달리는 차안에서 그에게 슬쩍 물어봤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정치인들의 목소리에 대한 품평을 부탁했다.

처음엔 주저하더니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의 목소리를 추어올렸다. 그는 “한명숙은 목소리가 너무 좋아. 발음도 정확하고. 성우해도 될 것 같아”라고 평가했다. 한나라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에 대해서는 “힘이 있고 지적이지. 날카롭기도 하고. 안철수도 그래”라고 바라봤다.

이명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품평해달라고 하자 “노코멘트”라고 어깨를 으쓱했다. 서씨는 지난해 성우로서는 처음으로 청와대에서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를 했다. 원래는 아나운서들의 몫이었다. 그를 만난 이 대통령은 “내가 서혜정씨 앞에서는 말하면 안 되는데”라고 멋쩍어했단다. 

이날 청소년 미디어 동아리를 대상으로 한 강연이 잡혀 있었다. 미디언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는 당연 인기였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성우를 꿈꾸는 한 소녀는 그에게 수줍게 <롤러코스터>의 목소리를 내달라고 하더니 핸드폰 녹음기에 담았다.  

 

 

 

 

강연에서 나온 좋은 목소릴 내는 법을 잠깐 소개하면 이렇다. 특별한 발성법이 있다거나 복식호흡을 애써 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발음을 내기 위해 볼펜을 물지 않아도 된다. 다만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는 습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말에 눈을 뜨게 된다”고 했다. 또한 좋은 목소리는 좋은 체력에서 나오는 법이라며 운동을 권유했다. 일반인이 듣기엔 마치 “수능 만점 비결요? 교과서만 봤어요”라는 우등생의 말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서씨는 이를 30년 동안 꾸준히 했다.

목소리를 창조하라…때론 ‘말공장’ 피곤, “투박한 말이 좋아”

그도 성우가 갖춰야할 덕목으로 성실함을 꼽는다. 성우는 돈을 많이 만질 수 있는 직업이 아니다. 한 건당 평균 10만원대다. 연차가 올라가도, 인지도가 높아져도 단가는 크게 오르지 않는다. 정말 몸을 움직인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셈이다. 이들은 비정규직으로 방송업계에서 약자기도 하다. 각 방송사 성우극회로 소속된 뒤 2년 동안 전속으로 활동하다 그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활동한다. 신참들의 주된 일은 만화 더빙이다. 물론 단역부터 시작한다.

서씨도 비슷했다. 그때는 전속 계약 기간이 6년이었다. 가장 당황스러웠던 역할은 토끼 목소리였다. 강아지나 고양이는 울기라도 하지만 토끼의 울음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는 수없이 시장 안 토끼를 파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하루 종일 앉아있어도 토끼는 묵묵부답이었다고. 녹음 전날 어머니에게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내비치자 어머니 왈, “생긴 대로 해야지”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토끼가 껑충껑충 뛴다는 점에 착안, 목소리에 높낮이와 스타카토(음표를 짧게 연주하는 기법) 효과를 줬다.

이렇듯 성실함에 창의성이 더해져야 하는 일이 성우다. 요새는 듣기 힘든 라디오드라마도 목소리를 창조해야 하고 외화 더빙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서씨는 “성우가 내는 목소리는 영화 속 배우들의 목소리와 같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에요. 배역의 성격과 배우의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거든요” 라고 말했다.

그 성실함과 창의성은 매순간 진화해야 한다. 말에도 유행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저녁식사로 스파게티를 먹다가 “10년 전에 녹음했던 거 들으면 못 들어요”라고 손사래를 쳤다. 배우들의 예전 모습을 보면 촌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요즘은 줄여 말하고 메시지를 간략하게 전달하는 게 특징인 것 같다고 했다.

“말투, 말씨는 세상의 흐름과 반대로 가는 것 같아. 세상이 화려해지면 건조하게 말하고, 예전 ‘회색도시’일 때는 오히려 말을 화려했게 했던 것 같더라고. 내 생각엔 그래.”

 

 

 

 

 

 

말과 목소리로 먹고사는 성우들의 고민은 뭘까. 다름 아닌 말에 있었다. 유려하고 노련한 말들이 주로 피로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문법에 어긋나는 말, 거친 말을 들으면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일종의 직업병이다.

그도 어느 순간 ‘말 공장’에 지쳐있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한 번은 아침 일찍 일하러 녹음실을 찾았지만 문이 담겨 있어 아침도 먹을 겸 근처 국밥집으로 향했다. 마침 근처 공사장 노동자들이 있었다. 작업반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작업 지시를 하는데 그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무식함도 느껴지고 욕도 섞여 있었지. 근데 그게 좋더라고”라며 “풋풋하고 촌스러운 말, 투박한 말이 더 좋아”라고 웃었다.

 

 

 

 

 

 

이젠 ‘아프리카 엄마’로…토크콘서트 수익 전액 기부

하루 종일 서씨를 따라다녀 보니 그는 사실 수다쟁이였다. 시종일관 유쾌하다. 평상시 목소리는 성우일 때보다 톤이 높았다. 그런 그가 가장 열성적으로 말한 부분은 ‘우물’이었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잔지바르 섬에 우물을 파는 일이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후배 성우를 도와 작년 3곳에 우물을 팠다. 결코 돈이 많아서는 아니었다. 오디오북 사업으로 진 빚은 아직도 그에게 들러붙어 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속상해 하지 마세요>의 인세 절반 이상을 우물 파기에 기부했다. 저녁 9시 넘은 시간, 공연기획자인 손진기 씨를 만난 자리에서도 우물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손씨는 다음 달 부산에서 서씨의 토크콘서트를 준비 중에 있다. 그는 서씨의 이야기를 듣더니 콘서트 2부는 탄자니아 이야기로 꾸미자고 했다. 이번 콘서트의 수익도 탄자니아로 보내진다.   

그는 봉사자로서의 삶을 행복해 하는 듯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후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경험이 작용한 걸까. 올해도 다섯 개의 우물을 파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그곳 아이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돌봐줄 ‘엄마’ 100명을 모으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는 얼마 전 이들을 돕는 ‘착한목소리 페스티벌’에 참가해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내민 명함엔 점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음 달 초에도 동행 취재의 대상이 된다. 성우를 다룬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작가가 취재차 그의 하루를 보고 싶다고 했단다. ‘성우인생 30년’을 맞은 그는 올해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6개월 뒤 다시 만난다면 그는 또 다른 도전을 하고 있을 듯하다.

■ 성우 서혜정 씨는…

1982년도 KBS 성우로 시작해 현재 다큐멘터리와 예능을 넘나들고 있다. KBS <생로병사의 비밀>, <지식콘서트>, <퀴즈쇼 사총사>, tvN <롤러코스터>, <화성인X-파일> 등에 출연하고 있다. 114 전화번호 안내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한국어 서비스, 모두 그의 목소리다. 올해로 50세인 그의 끼는 자녀들에게로 전해져 아들 고경준씨는 영화배우를, 딸 고요씨는 영화음악 작곡가를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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