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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취 공작회의, 류사오치 재능 간파한 마오
바이취 공작회의, 류사오치 재능 간파한 마오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중 공산당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77

중공중앙은 1937년 5월 17일부터 6월 10일까지 옌안(延安 연안)에서 국민당 통치지역에서의 공산당 공작활동, 즉 바이취(白區 백구) 공작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류샤오치와 뤄푸간에 극렬한 논쟁이 벌어져 한 차례 중단됐다가 마오의 중재로 다시 열리는 등 파란을 일으켰다. 바이취 공작회의의 1단계라 할 수 있는 5월 17일부터 6월 10일까지의 회의는 류샤오치가 보고한 ‘바이취의 당과 군중공작에 관하여’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류샤오치 보고의 주요내용은 앞서 3월 4일 뤄푸에게 보낸 장문의 서신내용의 반복으로 10년 동안 당이 행한 바이취 지구의 지도노선인 ‘좌경’ 전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여기서 ‘좌경’은 취치우바이(瞿秋白 구추백), 리리산(李立山 이립산), 왕밍(王明 왕명)으로 이어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노선과 모스크바 추종세력인 28인의 볼세비키파들의 노동자 중심의 도시거점 혁명 전략파들의 지도이념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오의 혁명 전략과 반대편에 있는 그룹인 셈이다. 성분으로써는 징강산(井崗山 정강산) 국내파와 코민테른의 해외파와의 대결양상이었다. 류샤오치가 좌경노선으로 바이취 공작은 거의 실패했다는 문제를 제기하자 많은 대표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류샤오치를 공격했다. 이들은 바이취 공작의 ‘총 노선은 정확했다’고 평가했다. 회의가 격렬한 논쟁으로 아수라장이 되자 중앙서기처는 일시적으로 회의 중단을 선포했다.

   
류사오치(왼쪽), 뤄푸.
 
6월 1일부터 3일까지 회의가 재개돼 바이취 공작회의에서 제기된 10년 동안의 바이취 공작에 대해 집중 토론을 벌였다. 마오는 얼마 전 류샤오치와 뤄푸의 논쟁 때 보였던 소극적 자세와는 달리 류샤오치의 보고는 ‘기본적으로 정확했다’고 류샤오치에게 힘을 실어준 뒤 류가 바이취에서 ‘풍부한 경험’으로 공작활동을 훌륭하게 수행했다고 칭찬했다. 마오는 3일 열린 정치국회의에서 류샤오치의 중요발언을 지지했으나 10년 동안의 정치노선 문제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6월 6일, 바이취 공작회의가 재개돼 회의는 2단계에 접어들었다. 뤄푸는 의식적으로 마오가 지난 번 회의에서 언급한 내용 중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을 끌어다 자기의 관점을 견지하면서 중공중앙을 대표해서 ‘바이취에 대한 당의  현재의 중심임무’라는 보고를 했다.

“공작을 실천하다 나타나는 어떤 잘못은 피할 수 없다. 중공이 바이취에서 공작을 하다 범한 과오의 성질은 정치노선의 잘못이 아니다. 어떤 확정된 정치노선 또는 정치경향이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범한 책략상의 과오다. 이러한 잘못은 군중 책략과 군중 공작방식을 이끄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 과오다. 총체적 영도의 잘못이 아니다. 당의 견결한 영도투쟁의 방침은 정확하다.”

뤄푸는 류샤오치의 중공중앙 바이취 공작에 대한 반대를 반박하면서 ‘합법주의’에 대해 비판했다. 뤄푸는 ‘과거 당이 합법주의 투쟁에 반대한 것은 여전히 옳았다’는 견해를 견지하며 ‘지난날의 모든 비합법적 투쟁은 필요하고 정확했으며 과거 주요 투쟁의 방식은 비합법적인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뤄푸는 류샤오치가 매번 혁명투쟁 성패의 결과를 혁명투쟁의 가치로 판단해 ‘실패한 투쟁을 무의미한 투쟁’으로 매도하는 ‘맹동주의(盲動主義; 모험주의)’에 매몰되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뤄푸는 또 류샤오치가 폐쇄주의, 모험주의를 무기로 삼아 중공 10년의 바이취 공작의 성취를 전면 부정하고 공허하게 간단히  '좌경 모험주의'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야 말로 맹동주의고 모험주의며 기회주의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뤄푸의 보고는 바이취 공작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형세가 불리하자 류샤오치는 한 발 물러났다. 6월 9일과 10일, 류샤오치는 회의 결론보고에서 뤄푸의 보고에 동의표시를 하고 자아비판에 나섰다. 류샤오치는 "내가 보고에서 강조한 것은 '좌경 폐쇄주의와 모험주의‘"라면서 "과거의 모든 것들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고 꼬리를 내렸다. 류샤오치는 구체적 분석이 부족해 보고가 지나쳤다고 잘못을 시인했다.

류샤오치와 뤄푸가 당의 10년 역사와 바이취 공작 평가문제를 둘러싸고 벌인 논쟁은 어떤 실질적 해결방안을 찾지 못했다. 류샤오치는 좌절을 맛보았으나 이 쟁론은 중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것은 옌안 정풍운동의 전주곡으로 잠시 물밑으로 가라앉았을 뿐이었다. 이후 마오와 류샤오치가 힘을 합쳐 6차 4중전회 정치노선을 전면 비판하고, 마오와 류는 이런 연대를 통해 왕밍 등 좌파들을 깨부수는 '환상의 콤비'를 이루게 된다.

어쨌든 마오는 이번 논쟁을 통해 비록 자신의 당내 영향력이 커가고 있지만 반대세력도 만만찮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마오의 가장 큰 소득은 '교조적인 종파분자'들이 당내에 광범하게 퍼져있어 그들을 일조일석에 쓸어버린다는 게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마오는 '교조 종파집단'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론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고 조직상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샤오치는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게 많았다. 뤄푸와 류샤오치의 논쟁은 류의 당내 영향력과 지명도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됐다. 류샤오치는 비록 당의 고참 영도자의 한 사람이지만 장기간 바이취 공작을 하느라 당의 영도층에서 멀리 떨어져 당의 중대한 군정(軍政)문제 정책 결정과정에 거의 참여하지 못했다. 중앙소비에트가 있었던 루이진 시기의 2년 동안도 전국 노동자총연합회 집행국을 이끄는 정도여서 당시 주요 정치 영도자인 저우언라이, 뤄푸 등과의 관계가 비교적 소원했다. 이에 따라 류샤오치는 당과 군에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그런 류샤오치가 이번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심원한 사상과 이론수준을 유감없이 펼쳐 보인 것이다. 전당, 특히 당의 고급간부들이 류샤오치를 다시 볼 수 있는 하나의 전기가 됐다. 후일의 이야기지만 류샤오치의 이번 논쟁은 마오의 '정치적 동업자'로 발탁되는 계기가 됐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 반열에 오르는 일생일대의 획기적 운명의 분수령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겠는가. 30여 년 후에는 마오의 버림을 받아 홍위병(紅衛兵)의 핍박으로 세상을 떠나야하는 비운의 명운이 될 줄을. 나눌 수 없는 권력의 야수적 속성과 무상함을 오늘에 전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뤄푸와 류샤오치의 쟁론에 대해 마오의 태도는 명확하면서도 미묘했다. 논쟁 초기에 마오는 쟁론에서 한 발 떨어져 있으면서 류샤오치를 마음속으로 지원해 류의 의견이 중앙 영도층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논쟁 후기에서는 류샤오치가 뤄푸와 당내의 거대한 압력을 견디지 못할까봐 걱정했다. 해서 6월 1~3일의 정치국 회의에서 류샤오치의 논점을 성원하는 연설을 했으나 반대가 많은 것을 간파하고 중재하는 선에서 머물렀다.

마오는 이러한 과정에서 류샤오치의 걸출한 재능을 발견했다. 우선 류샤오치가 바이취 공작 경험이 풍부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 류샤오치가 뛰어난 이론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간파했다. 류샤오치는 10년 동안 당의 좌경 전통과 근원을 분석하면서 '사상방법과 철학방법상의 과오', 즉 '형식논리'가 광범한 당원들의 사상방법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질타했다. 류샤오치는 '형식논리'가 허다한 과오의 근원을 조성하고 있다고 공표한 것이다.

이것은 마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마오는 자신의 위엄과 명망을 류샤오치 지지에 모든 것을 던지지 않았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뤄푸와의 합작을 강화해 뤄푸와 곧 귀국하게 되는 왕밍과의 새로운 결합을 막을 심산이었다. 마오는 바이취 공작회의가 끝난 뒤 류샤오치를 중공중앙 서기처(상임위원회)에 발탁하지 않고 베이핑에서 타이위안(太原 태원)으로 옮긴 중공중앙 북방국 서기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도록 했다. (주석 161)

161)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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