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는 마오보다 5살 아래인 1898년 마오의 고향과 가까운 후난성(湖南省 호남성) 닝샹(寧鄕 영향)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에 고향에서 사숙(私塾)과 소학교를 다닌 뒤 1919년에 중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에 마오가 후난에서 꾸린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이듬해인 1921년에 소련 모스크바에 있는 동방노동자 공산주의 대학(중산대학)에 들어간 뒤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류샤오치는 1922년 귀국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중국노동조합 총연합회 전신인 중국노동조합 서기부에서 일했다. 류샤오치는 그해 9월 14일 마오가 총지휘해 전국을 뒤흔든 후난 접경에 있는 안위안루쾅(安源路礦 안원로광) 노동자구락부 주임으로 광산노동자 대파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25년 5월, 제2차 전국노동대회에서 중화 전국노동조합 총연합회 부위원장으로 당선됐다. 류샤오치는 1927년 5월 중공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됐다.

그해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진 뒤 류샤오치는 상하이, 톈진, 베이핑(베이징), 하얼빈 등지에서 지하 비밀공작 업무에 종사했다. 1931년 1월, 중공 6차 4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됐고 중화 전국노동자 총연합회 조직부장을 지냈다. 1932년 겨울에 루이진 중앙소비에트 혁명근거지에 들어가 중화 전국노동자 총연합회 소비에트지구 중앙집행국 위원장, 중공 푸젠성위원회 서기를 역임했다. 1934년 10월 장정에 참여해 중국노농홍군 제8군단, 제5군단 중공중앙대표와 제3군단 정치주임을 지냈다. 1935년 1월 준이(遵義 준의)회의에서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1936년 봄, 화베이(華北)지방에서 중공중앙 대표로서 항일민족통일전선 구축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류사오치.
 
류샤오치는 1937년 2월 20일,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당 총서기인 뤄푸에게 중국공산당의 역사문제에 관한 지도원칙과 성격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쓴 장장 1만여 자에 이르는 두 통의 서신을 전달했다. 류샤오치는 정치의견의 성격을 띤 이 장문의 서신에서 중공중앙의 다년간의 노선에 대해 자신의 회의적 시각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류샤오치는 대담하게도 코민테른과 준이회의에서 내려진 ‘중공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류샤오치는 1차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 이전과 이후, 특히 중공 6차 4중전회이후의 중공의 좌경적 과오에 대해 예리하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류샤오치는 이 장문의 서신에서 중공중앙 기관의 3가지 금기사항을 건드렸다. (주석 159)

1. 류샤오치는 1927년 대혁명 실패의 주요원인은 ‘우경적인 천두슈(陳獨秀 진독수)주의’ 뿐만 아니라 우경 기회주의의 다른 일면의 과오, 즉 좌경 모험주의를 거론했다. 류샤오치는 자신이 직접 겪은 광저우(廣州 광주), 우한(武漢 무한) 시기의 노동자와 민중운동 과정에서 좌경의 열광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실제적인 예를 들어 맹렬하게 비난했다. 류샤오치의 견해는 코민테른과  중공 6대 이후의 여러 차례의 결의와 심각한 차이가 있었다.

2. 류샤오치는 비록 중공이 10년래 집행했던 잘못된 정치노선을 직접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되풀이해 중공중앙이 10년래 좌경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10년의 과오가 이미 일종의 전통이 되었다고 힐난했다. 류샤오치는 특히 중공의 10년 바이취(白區; 장제스 통치지역)공작 방침을 비난하면서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10년의 정치노선을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3. 류샤오치는 당의 10년 역사에 대한 당내 공개토론을 요구하면서 창끝을 중공 6차 4중전회 후의 중공정치국에 겨누었다. 이것은 중앙 관련 영도들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암시했고, 중공 중앙영도기구의 개편 요구를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류샤오치의 장문의 서신과 관련해 미리 마오의 의견을 구했다거나 마오의 격려가 있었다는 등의 사전 교감설에 대해 증명할 만한 정확한 사료는 없지만 여러 자료의 분석에 따르면 둘의 교감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여러 정황들이 나오고 있다. 1935년 12월 29일, 중공중앙 상임위원회는 회의를 열어 류샤오치를 북방국 대표로 임명했다. 북방국은 애초 톈진에 있다가 1937년 초 베이핑으로 옮겼다. 1936년부터 마오가 있는 싼베이(陝北)와 북방국 사이에는 무선통신시설 뿐 아니라 밀사를 파견할 수 있는 등의 연락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오와 류가 교감을 이룰 수  있는 기본조건은 갖추고 있던 셈이었다.

류샤오치의 장문의 서신은 중공중앙 핵심 영도층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37년 3월 24일, 4월 24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두 차례 회의를 열어 바이취(白區 백구) 공작 업무 문제를 토론했다. 뤄푸는 류샤오치의 의견에 극력 반발했고, 일부 정치국원들은 뤄푸의 견해에 동의했다. 이들은 류샤오치의 대혁명실패 원인 분석은 천두슈의 과오를 물타기하는 것으로 류샤오치는 ‘반 코민테른, 반 중공중앙’의 천두슈의 ‘아바타’라고 강력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류샤오치가 장궈타오의 영향을 받았다고 질책했다.

중앙정치국 대다수 구성원들은 류샤오치가 너무 과장해서 말했다고 공격했다. 류샤오치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리자 마오는 ‘류샤오치가 중앙에 반대하는 야심’을 갖고 쓴 서신은 아니라며 중재에 나섰다. 마오는 구체적 문제의 쟁론에 직접 끼어들지 않고 류샤오치와 뤄푸의 충돌 무마에 진력했다. 류샤오치는 뤄푸의 준열한 비판을 받았으나 마오의 공명(共鳴)을 불러일으켰다. 마오의 이런 태도는 류샤오치를 고무시켰다. 힘을 얻은 류샤오치는 과감하게 한 발을 더 내디뎠다. 류샤오치는 중공중앙이 소집한 5~6월 바이취공작 회의에서 뤄푸에 대해 맞대결 도전의 포문을 열었다. (주석 160)

159)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毛澤東因何替劉少奇講話   理論頻道  新華網
160) 毛澤東劉少奇政治合作的開始   人民網
     毛澤東因何替劉少奇講話   理論頻道  新華網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