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당내외의 영도자들이 예ㅤㅈㅖㄴ잉에게 당 중앙의 주석이 될 것을 요구했지만 예ㅤㅈㅖㄴ잉은 "나는 군사간부다. 군사의 일을 한다. 만약에 (내가 중앙의 주석이 된다면) 사람들이 궁정 쿠데타를 한 것이 아니냐고 할 것"이라며 극구 사양했다. 4인방의 분쇄는 마오 노선을 추종하는 '실권파'와 '원로파'들의 합작품이었다. 예ㅤㅈㅖㄴ잉
왕둥싱으로부터 장칭과 마오웬신 체포명령을 받은 장야오츠는 우젠화와 10여명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밤 8시께 먼저 마오웬신이 거주하고 있는 중난하이 펑쩌웬(豊澤園 풍택원)의 이녠탕(이年堂 이년당)으로 갔다. 펑쩌원은 마오가 거처했던 곳으로 조카인 마오웬신이 잠시 살고 있었다. 장야오츠는 마오웬신에게 중앙이 '보호심사'를 결정했다고 통보하고 순순히 연행에
왕둥싱은 3일 밤 9시에 화궈펑을 찾아가 구체적인 행동방안과 부서 등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화궈펑은 "제정한 행동방안과 방법은 시행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을 다시 단축하느냐 여부를 고려하고 사전에 해결해야 한다. 당신이 다시 예(ㅤㅈㅖㄴ잉) 원수와 이야기 해 보시오. 예 원수가 어떤 새로운 의견이 있는 지 알아보고. 만약에 예 원수가 이곳에 오실
화궈펑과 리셴녠은 9월 26, 27일 잇따라 만나 4인방 문제에 관한 의견을 나눴다. 화궈펑은 "우리들과 4인방과의 투쟁은 이미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리셴녠은 화궈펑의 의견에 찬성하고 해결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체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앙 정치국 회의를 열어 투표로 4인방이 맡고 있는 직무를 해제시키는 거였다. 우더는
예ㅤㅈㅖㄴ잉은 9월 15일 실권파인 왕둥싱의 지지를 얻어냈다. 왕둥싱은 4일 앞선 11일 화궈펑과 4인방을 치기로 이미 합의한 바 있었다. 정치국원인 왕둥싱은 오랜 동안 중앙 판공청 주임 겸 (마오의)경위국장을 맡아 주요 영도자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앙 경위부대 8341부대의 주요 책임자였다. 때문에 4인방 분쇄에는 관건적 인물이었다. 대권에 눈이 먼 4인
루잉은 언론을 총괄 장악하고 있는 '여론총관(與論總管)'인 야오원웬의 지령에 따라 4인방의 거점인 인민일보를 철통같이 지키기 위해 민병들을 동원해 주야로 경비를 강화하는 등 비상상황에 들어갔다. 마오가 사망한 뒤 1시간이 지난 새벽 2시께 중앙 정치국은 장례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장칭은 회의에서 마오가 덩샤오핑 때문에 열 받아 죽었다며
7월 6일 마오쩌둥의 노(老) 전우였던 중국혁명의 원훈이며 인민해방군의 ‘아버지’인 주더(朱德 주덕)가 ‘주-마오(朱-毛; 주더와 마오)’의 전설을 뒤로하고 90살로 세상을 등졌다. 저우언라이와 주더 등 혁명 1세대들의 잇따른 죽음은 한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음을 알렸다. 두 거인을 잇달아 잃은 인민들은 4인방이
이날 밤 6시 30분께 톈안먼 광장에 나타난 우더는 확성기를 들고 “톈안먼 사건은 반혁명 사건”이라고 선언하고 군중들이 광장에서 즉시 떠날 것을 요구했다. 밤 9시 30분께 1만여 명의 민병과 3000여 명의 경찰, 베이징 위수구 부대 5개 중대병력이 곤봉을 들고 출동해 톈안먼 광장을 봉쇄했다. 이들은 광장에 남아있던 군중들을 무자비하
3월 19일 베이징시 챠오양(朝陽 조양)구 니우팡(牛坊 우방)소학교의 어린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 앞에 인민들이 ‘경애하는 총리’,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는 추도화환을 바쳤다. 이 어린이들의 헌화(獻花)를 신호탄으로 다가오는 4월 4일의 청명절 인민 대투쟁이 예비 되고 있었다. 난징(南京 남경)의 학생과 시민들이 3월 24일
여기서 장춘챠오가 ‘오기도 빨랐고, 무너진 것도 빨랐다’는 것은 덩샤오핑을 가리킨 것이지만 장춘챠오는 덩샤오핑과 함께 화궈펑이 ‘오기도 빨랐고, 무너지기도 빠르다’고 저주한 것이다. 장춘챠오는 인민이 결정적 요소라고 하면서 인민의 이익과 인면의 편에 설 것을 다짐했지만, 그것은 사이비 정치꾼들이 항용 하는 소리로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마오와 함께 중국혁명을 이끌어 온 저우언라이가 ‘너 죽고, 나 살기’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또 다시 몰아치고 있는 소용돌이 속에서 78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우언라이는 1974년 6월 1일 입원한 이래 13번의 크고 작은 수술을 받았다. 저우는 중병을 앓으면서도 문건을 비준하고 처리
마오웬신은 이날(2일) 마오의 지시에 따라 덩샤오핑과 왕둥싱, 천시롄을 찾아가 이야기하다 덩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덩샤오핑은 "자네(마오웬신)가 중앙이 수정주의 노선을 집행하고 모든 부문에서 주석의 노선을 집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전국의 형세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다. 실천이 증명할 것이다"라고 했다.
문혁의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덩샤오핑의 정돈으로 경제상황이 호전되고 사회가 안정화의 틀을 잡아갈 즈음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정치국면을 한꺼번에 역전시키는 일이 발생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9월에 마오의 조카 마오웬신(毛遠新 모원신)이 파킨슨병으로 건강이 악화한 마오의 몸을 돌보며 마오와 중앙 정치국과의 연락업무를 위한 비공식 직책인 '마
루디는 마오가 자신과 이야기를 하면서 평가한 수호지 담화(談話)를 정리해 마오에게 보내 출판을 건의했다. 마오가 승낙해 이 담화기록은 선전, 출판 당담인 야오원웬에게로 보내졌다. 마오의 '4인방' 비판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야오원웬은 이 수호지 평론을 읽어 보고 '만세'를 불렀다. 정치적 꼼수가 발달한 야오원웬은 마오의 수호지 평론을 빌려 '4인방
마오는 ‘3가지 할 것과 3가지 해서는 안 되는 원칙을 말하면서 ‘4인방’의 자아비판을 요구했다. 마오는 이 3가지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장칭을 호되게 비판했다.“내가 보기에 장칭은 아주 하찮은 경험주의자다. 제멋대로 하지 말고 기율을 지켜야 한다. 근신하고 자신의 주장만 하지 말고 정치국에서 토론해야 한다. 의견
문화대혁명 9년차를 맞은 1975년 1월 5일 중공중앙은 덩샤오핑을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부주석 겸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장춘챠오를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주임에 각각 임명하는 1호 문건을 발포했다. 1월 8일부터 10일까지 저우언라이 주재로 중공 10기 2중 전회가 베이징에서 열려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덩샤오핑을 당 부주석, 중
펑더화이는 베이징 위수지구(衛戌地區)인 스방위안에서 8년 동안 감호생활을 당하면서 심사를 받아오다 1973년 봄에 직장암에 걸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암이 온 몸으로 전이 되었다. 큰 출혈이 있던 날 저우언라이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당 고위 간부들을 치료하는 해방군 301병원으로 후송해 치료하도록 지시했다. 펑더화이는 감호소에서 병
마오의 이런 견해는 마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과 탐색을 반영한 것으로 등급제도와 특권의식을 타파해 현격한 빈부차이와 양극 분화의 사회현상을 없애고, 자산계급을 번식시키는 토양과 조건을 제거하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마오가 시종 힘써 해결하려고 한 중요한 문제였으나 인성과 인간존재를 부인하는 인위적인 사회주의는 머나먼 이상향의 세계였다. 마오는 4개월
마오는 최근 1개월 동안 여러 차례 ‘4인방’에 대한 비판을 하고 경고를 했지만 장칭의 본성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다. 장칭은 또 11월 19일 ‘자아비판’이라는 이름의 편지를 마오에게 보냈다. 장칭은 편지에서 “저는 주석의 기대를 저버린 데 대해 부끄럽게 여깁니다. 제가 자신을 정확히 아는 지혜가 모자
‘4인방’은 인민대회 이후 덩샤오핑이 제1부총리가 되어 국무원이 ‘저우-덩샤오핑 체제’가 되는 것을 극력 저지하기로 했다. 장칭은 10월 13일 국내의 움직임을 담은 ‘국내동태(動態) 최종 대장’을 보다 원양 화물선인 ‘펑칭(風慶 풍경)호 사건’ 보도를 보았다. 보도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