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사변으로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에 기반한 통일전선과 항일전쟁의 분위기가 뜨던 1937년 초, 마오쩌둥, 뤄푸(洛甫; 장원톈), 저우언라이, 보구 등 중공 영도자들은 당 운명의 결정적 전환에 고무되면서 앞날에 대한 대책마련에 분주했다. 이들은 국-공간의 10년 내전이 이미 끝났고, 국내의 평화실현으로 당이 원기를 회복해 앞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더 없이 귀중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마오는 숙고와 숙고를 거듭했다. 이 천재일우의 시기에 무엇을 하고, 우선적 처결사항은 어떤 것인지 고민을 한 것이다. 마오는 시안사변의 결과물인 국공합작과 통일전선 구축 협상작업이 탄력을 받아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시안사변 이후 저우언라이를 대표로 하는 중공중앙 대표단인 둥비우, 보구, 예젠잉 등이 시안에 머물면서 벌이고 있는 국민당 정부와의 협상은 밝은 전망을 보였다.

마오는 용의주도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저우언라이의 능력을 십분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만사는 불여튼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오는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구축과 발전에 따라 당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를 상정했다. 하나는 통일전선 문제가 잘 안 풀릴 경우 좌경적 폐쇄주의가 돌출할 수 있고, 또 하나는 국공합작이 성공해 통일전선으로 갈 경우 우경적 투항주의가 쉽게 출현할 수 있다고 내다본 것이다. (주석 157)

   
뤄푸(洛甫; 장원톈)
 
사색에 잠긴 마오는 1년여 전인 1935년 12월 와야오바오(瓦窯堡 와요보) 회의 때 자신이 했던 말을 상기했다. 마오는 그때 "좌경 폐쇄주의는 당내의 주요한 위험요인이다. 우경 투항주의 또한 대단히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마오는 천두슈의 우경 투항주의를 1927년 대혁명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왕밍의 좌경 폐쇄주의는 홍군이 전대미문의 장정으로 내몰리는 백척간두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런 우려가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고 확신한 마오는 사전에 싹을 제거하기 위한 시기로 국민당과 담판이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평화적 협상국면이 적기라고 판단했다. 목적은 당군정(黨軍政)의 우월적인 장악이었다. 그러려면 당내에서 자신의 확고한 입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자신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깎을 수 없으니 누군가의 지원이 필요했다. 마오는 오랫동안 눈여겨보았던 류샤오치(劉少奇 유소기)를 떠올렸다.

당시 마오쩌둥은 중공군대의 주요 창건자이자 중공에서 최대의 근거지를 만든 중공소비에트지구의 개척자였다. 때문에 마오는 중앙홍군에서 폭넓은 간부들의 지지와 정서적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또 대단히 두터운 권력의 정치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마오는 일찍이 직접 중국공산당 창당 작업에 참여해 현재 얼마 남아있지 않은 1대 대표의 한 사람으로 당의 역사에서 우두머리 반열에 속했다. 군(軍)내에서는 징강산파를 필두로 해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1935-1936년 사이의 중국공산당 영도층에서 장궈타오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마오와 어깨를 겨룰 수 없었다. 당의 최대 주주인 셈이었다.

마오는 당내의 자격과 경력, 지위 등을 내세워 당의 전국적인 방침과 정책, 기타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기해도 감히 맞설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이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권력구조의 기저에는 ‘볼세비키 28인’의 한 사람이자 당중앙 총서기인 뤄푸(洛甫; 장원톈)와의 밀접한 합작관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한 예로 마오와 뤄푸의 정치적 결합의 제일 중요한 성과 중의 하나는 따로 파벌을 세워 당의 분열을 기도한 장궈타오를 물리쳤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마오와 뤄푸는 준이회의 이후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뤄푸는 마오를 십분 존경했다. 뤄푸는 당의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거의 마오에게 먼저 의견을 구했다. 뤄푸와 마오가 당의 중요 문건에 관해 연명으로 발표할 때도 마오가 주도적 구실을 했다.

마오는 전력으로 군사를 지휘하면서도 당의 전국적인 일에 관해서도 고도의 관심을 기울였다. 마오는 코민테른의 관련 기율을 엄격히 준수하면서 영도층의 단결에 노력하는 한편, 교묘하게 자기의 영향력을 높이며 매우 조심스럽게 당의 영도조직을 운용해 국부적 문제들을 조정했다. 당시 중앙 최고층에서 마오는 코민테른에 뿌리를 둔 교조적 종파분자들과의 합작을 계속 유지했다.

중공 6차 4중전회, 5중전회에서 이뤄진 정치국 구성원은 그대로였다. 이들은 사전에 코민테른의 비준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 돌아 온 사람들은 대부분 당의 선전부문이나 당의 실무, 지방 당 조직 등에서 일하고 있었다. 해서 이들 교조적 종파주의 집단은 마오가 틀어쥐고 있는 홍군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와는 달리 군의 중요 간부들은 정치국회의에 참석하도록 해 이런 형식이 점차 관례화가 되고 있었다.

마오는 장정 중 유명무실해진 국가 정치보위국을 ‘방면군 정치보위국’으로 바꿔 코민테른파인 국장 덩파(鄧發 등발)를 전보조처하고, 루이진 시절 자신의 비서였던 왕서우다오(王首道 왕수도)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 각종 정보를 관장하는 핵심적 부서를 직접 자기의 관할아래에 둔 것이다. 마오는 이어 중공중앙 비서처를 원상회복시켜 중앙 군사위원회 기밀과, 중앙 사회부 기밀과, 그리고 당, 군 기밀공작 등을 이끌도록 해 자신의 엄격한 감독 아래 기밀조직을 직접 통일 관리했다.

마오는 이와 함께 코민테른 등 모스크바와의 통신연락 업무를 장악해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는 치밀성을 보였다. 하지만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어려운 문제들도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오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는 지난날의 정치노선에 대한 평가였다. ‘중공의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은 마오 앞에 가로놓여 있는 넘기 어려운 높은 산이었다.

이 결론은 모스크바에서 나온 것일 뿐만 아니라 준이회의 참가자들이 일치 옹호하고 인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마오와 뤄푸의 정치결합의 기초이기도 했다. 장제스에 쫒겨 달아나는 군사적 압력을 극심하게 받던 1935년 1월 준이회의에서 마오는 장기적 목표아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이런 결론에 동의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1937년)에 이르러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마오는 ‘중공의 정치노선은 정확하다’는 결론은 교조적 종파주의 집단의 정치적인 합법성을 인정하는 기반으로 반드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당내에 만연하고 있는 교조적 종파주의 분위기를 타파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순조롭게 당을 개혁하겠다는 자신의 구상을 실현하기 어렵고 자신의 지위 또한 온전히 보존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주석 158)

하지만 이 결론을 뒤집어 엎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였다. 코민테른의 외부적 장애 뿐 아니라 총서기 뤄푸가 당내의 최대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뤄푸는 6차 4중전회에서 당의 영도로 선택됐고 교조적 종파주의와 실타래처럼 복잡다단하게 얽혀있었다. ‘중공의 정치노선이 정확하다’는 결론이 잘못됐다고 선언할 경우 뤄푸와 일단의 영도 간부들의 직접적 공격과 이에 따른 당내의 동요가 불가피했다. 당내에 미치는 영향 또한 심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뤄푸의 반발이 불 보듯 뻔했다. 1937년 초의 당내 역학과정에서 마오와 뤄푸의 정치합작과 마오의 사고 사이에서 이상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류사오치.
 
마오는 1931년 제4차 반 포위공격 소탕전 당시 왕밍(王明 왕명)이 주도하는 좌경 교조적 종파주의 노선에 맞섰다가 패퇴해 4년여 동안 겪었던 인고의 세월을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준이회의 이후 확립한 마오의 군(軍) 주도와 뤄푸의 당(黨) 관할의 권력구조에 미묘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마오의 지위는 점점 강화되는 반면에 뤄푸는 당의 이론과 선전 교육 등 실무적 수준에 그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마오와 저우언라이의 정치적 협력관계가 밀착하고 있었다. 보구(博古)는 당의 영도그룹에서 자신의 역할에 자족하고 있었다. 장궈타오는 이미 당내투쟁에서 당중앙에 도전했다가 깨져 입지가 크게 줄어든 상태였다.

이처럼 당내 기류는 어느 때 보다 마오에게 유리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마오는 자신이 직접 당의 노선을 평가하고 비판할 경우 뤄푸는 물론 당의 영도들과 정면충돌이 불가피해 위험부담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새로운 환경에서 당의 노선을 바로잡지 않고 마지못해 묵인하면서 시간을 천연시킨다는 것 또한 묵과하기 힘들었다. 이런 딜레마에 빠졌을 때 류샤오치가 나타났다. 마오는 천석고황의 고민덩어리를 류샤오치를 통해 척결하려는 기회를 포착하고 치밀한 수순 밟기에 들어갔다. 마오는 류샤오치를 끌어들여 류샤오치와의 합작시대를 열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는 또한 1942년 봄부터 3년 동안 계속된 옌안 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의 시원(始源)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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