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지난 5일부터 창간 104주년을 맞아 전태일재단과의 공동기획 ‘12대88, 쪼개진 노동시장을 바꿔야 한다’ 보도를 하고 있다. ‘대기업-하청업체 격차’를 내건 첫 보도엔 그간 조선일보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던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담겼다.

보도를 접한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선 우려가 크다. 열악한 노동조건의 원인이 ‘정규직 직원’이 아니라 원청사에 있는 현실을 조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 활동을 할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현실은 언급하지 않는 한편, 효과가 미미한 상생협약을 개선 사례로 들고 나왔다는 평가다.

▲5일 조선일보 1면 창간기획 보도
▲5일 조선일보 1면 창간기획 보도

조선일보는 1면에서 “대기업 직원”과 “중소기업-비정규직 근로자” 구도를 부각하며 “전체 임금 근로자 중 12%인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기업 및 비정규직 근로자 등 나머지 88%로 쪼개진 한국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민낯”을 거듭 강조했다. “대기업 직원들이 차곡차곡 늘려온 복지도 원하청격차를 더 뚜렷하게 한다”면서 한화오션 원·하청 용접공 임금 비교표를 제시했다.

관련 기사는 대기업 조선사와 하청업체가 정부·지자체와 맺은 ‘상생협약’을 개선사례로 강조하고 있다. 원하청 업체들이 △하청업체 노동자 월급을 전용 계좌로 입금해 임금체불을 예방한다는 명목의 에스크로(escrow) 계좌 △성과급 확대 △복지확대를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전태일재단이 “민주주의는 공기처럼 일상화됐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활동할 권리도 보장되고 있다”며 “전태일 정신, 이제 나눔과 상생으로 확장”할 것을 제안했다고 덧붙였다.

▲5일 조선일보 4면 창간기획 보도
▲5일 조선일보 4면 창간기획 보도

“헛웃음… 원청 책임 언급 안하면 악순환 계속”

한화오션(전 대우조선해양) 하청 비정규직 도장공인 강인석씨(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는 조선일보 보도를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고 했다. 그는 2022년 여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폭로하고 임금 원상회복을 요구했던 파업을 떠올리면서 “당시 조선일보는 ‘불법, 조폭’ 등 입에 담지 못할 공격을 엄청나게 했다”고 했다. 당시 파업은 노동위를 거쳐 쟁의권을 얻은 뒤 진행됐지만, 민주언론시민연합 집계(6월2일~8월2일)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15개 일간지·경제지 중에서 ‘불법파업’ 표현을 가장 많이 썼다.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유조선 바닥 구조물에서 농성했다. 대우조선(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은 2016년 조선 불황으로 7만여명 해고되고 상여금 등 30% 임금이 삭감된 뒤 현재까지 오르지 않고 있다며 파업했다. ⓒ금속노조
▲유최안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부지회장은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유조선 바닥 구조물에서 농성했다. 대우조선(현 한화오션) 하청노동자들은 2016년 조선 불황으로 7만여명 해고되고 상여금 등 30% 임금이 삭감된 뒤 현재까지 오르지 않고 있다며 파업했다. ⓒ금속노조
▲2022년 7월20일 조선일보
▲2022년 7월20일 조선일보

강 부지회장은 변하지 않는 현실 뒤에 원청인 한화오션이 있지만, 기사는 이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수주 행진으로 국내 조선업이 초호황기라는 보도가 쏟아지지만, 원청이 업체에 주는 기성금 단가가 오르지 않아 하청노동자 저임금과 인력난, 임금체불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과거 불황기에 깎였던 30%의 임금 원상회복을 요구했는데, 지난 2년간 임금 상승률은 한 자릿수였다. 현재 그의 시급은 최저임금에 340원 얹은 1만200원, 지난달 급여명세서엔 250여만 원이 적혔다. 그는 “550%였던 상여급이 전액 삭감됐는데, 한화오션이 상여금을 원복하겠다면서 지난해 50% 원복해 지급했다.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이라고 했다.

이는 조선업 내 임금체불과 중대재해로도 이어져 악순환을 이룬다. 그는 “조선소 노동 특징은 다단계 고용구조, 저임금, 장시간, 고위험 노동이다. 아무도 오지 않으니 인력난 해결이 안 된다”며 “이주노동자들이 열악한 조건에 유입되는데 이들은 저숙련이고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하청업체는 공정이 길어져 늘어난 인건비를 지급하지 못해 임금체불로 이어지고, 노동자 중대재해도 일어난다”고 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지난 8일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앞에서 “한화오션의 무차별 고소를 규탄한다”라며 “노동조합법 2·3조를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2022년 여름 파업을 벌였던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회사로부터 업무방해 등 혐의로 무더기 고소를 당했다. ⓒ금속노조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지난 8일 창원지방법원 통영지원 앞에서 “한화오션의 무차별 고소를 규탄한다”라며 “노동조합법 2·3조를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2022년 여름 파업을 벌였던 한화오션(옛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이 회사로부터 업무방해 등 혐의로 무더기 고소를 당했다. ⓒ금속노조

“조선일보가 언급 안하는 것, 임금개선 부른 집단행동”

HD현대중공업 발판공 오세일씨(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 조합원)는 “기사엔 에스크로 계좌가 해결책인 것처럼 나오고 정부도 강조하지만, 원청이 하청에 지급하는 기성금 자체가 부족하면 임금체불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최근 삼성중공업 하청노동자 체불임금은 60~70억원 규모에 이르렀고, 한화오션에서도 탑재공정 하청업체 다수에서 임금체불이 발생했다.

오씨는 정작 처우 개선을 이룬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기사에 언급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1년 업체별 조장 20여명이 모여 현수막을 들고 임금협상을 요구했다. 그는 “카카오톡과 문자로 함께 임금인상을 요구하자고 연락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줄 몰랐다. 모여서 행동했기 때문에 시급을 바로 400원 폭으로 올릴 수 있었고, 노사협의회를 통해 600~830원까지 인상했다”며 “이런 내용은 보도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유조선에서 점거 농성할 당시 모습. ⓒ금속노조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옥포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유조선에서 점거 농성할 당시 모습. ⓒ금속노조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파업할 당시 모습. ⓒ금속노조
▲민주노총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는 2022년 6월22일부터 ‘임금 원상 회복’을 요구하며 파업할 당시 모습. ⓒ금속노조

원청이 노동권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한 노동자를 대거 고소하며 압박한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이김춘택 거통고지회 사무장은 “파업한 노동자 21명은 형사고소를 당해 재판이 시작됐고 5명은 상대로 470억 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직면했다”며 “현실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실제 사장인 원청과 하청노조의 단체교섭을 보장하도록 노동조합법 2·3조를 개정하는 것이지만 대통령은 이에 거부권을 행사했고, 조선일보는 파업을 비난하다가 이번 보도에선 노동자의 투쟁도, 원청의 책임도 보도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반월·시화공단 노동 핵심 ‘불안정’…노동경직성? 안 맞아”

5일 조선일보 보도에는 반월·시화 공단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다룬 기사도 있다. “대졸 직원 중심의 대기업과 고졸 근로자들이 많은 영세협력업체 간 격차 탓에 묵묵히 일하는 근로자들 월급 역시 최저임금 언저리”라는 내용이다.

▲5일 조선일보 4면 창간기획 보도
▲5일 조선일보 4면 창간기획 보도

반월·시화 공단 노동조합인 월담노조 위원장이자 15년 넘게 반월공단의 문구생산업체에서 일했던 이미숙씨는 기사를 보며 “반월과 시화공단 노동자들의 미래가 안 보이는 현실은 계속 얘기해 왔다”면서도 “현실은 조선일보 진단과 정반대”라고 말했다. “원인은 조선일보가 말하는 ‘노동 경직성’이 아니라 ‘불안정성’에 있다”는 것이다.

국내 최대 국가산업단지라 불리는 반월·시화 공단엔 부품·전기·전자·화학·섬유 등 다양한 업종이 들어섰다. 2만여개 업체에서 25만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지만 50인 미만 작은사업장이 97%를 차지한다. 노동자들은 낮은 임금에 잔업과 특근으로 부족한 월급을 메우려다 보니 노동시간이 길다. 노조 조직률은 1~3%이다. “조선일보는 열악한 노동 원인으로 ‘노동 경직성’을 주장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공단에선 비정규직 노동자는 물론이고 정규직도 고용이 불안정하다”는 설명이다.

이 위원장은 “근로기준법 준수 여부를 조사하면 80% 가량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답하는 현실이고, 개선할 창구도 보이지 않는다”며 “원청기업과 지역 사용자단체, 지자체가 공동으로 책임지는 구조를 요구하고, 휴게실이나 아프면 쉴 권리 등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선일보는 ‘일부 정규직의 노동 경직성 탓에 하청기업 노동조건이 나빠진다’고 해석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기업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수단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창간기획, 이 시점에 왜 나왔을까

조선일보는 왜 이 시점에 ‘12대 88’ 창간기획을 내놓았을까? 보도 방향이 윤석열 정부가 출범 때부터 주장해온 ‘노동시장 이중구조론’과 들어맞는다는 시각이 있다. 정부가 2022년 노동개혁을 걸고 운영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해결 과제로 내놨고, 정부는 지난해부터 이중구조 해소를 걸고 상생임금위원회를 구성했다.

▲상생임금위원회 발족식 모습. 사진=고용노동부
▲상생임금위원회 발족식 모습. 사진=고용노동부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6일 페이스북에서 “‘12대88 사회’ 규정은 노동시장 이중구조론의 언론형 버전”이라며 “정부가 상생임금위원회의 결론에 사회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하는 사전 작업”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는 이중구조의 원인을 ‘노-노 간 착취’로 간주한다. 정부가 전제하는 착취자는 대공장 정규직이며 노조 투쟁으로 ‘기득권’을 갖게 된 이들”이라며 “그래서 정부는 ‘노조혐오’를 양산하고, 노조 대신 상생협력의 산업 생태계 조성을 주장하며, 대공장 정규직의 기득권 해체를 노동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은 것”이라고 했다.

김혜진 활동가는 “조선일보에서도 이야기하는 노동조건의 격차는 정규직의 기득권 때문이 아니라 경제위기 이후 지속된 노동의 불안정화 전략 때문”이라며 “문제는 노동자 간 격차가 아니라, 노동자 전체를 불안정화해 분할 통치하는 기업과, 불안정화를 뒷받침하는 제도의 문제”라고 했다. “상생협의체 등 원청의 시혜에 기대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권리에 근거해 제도를 다시 구성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역사자료를 수집·기록해온 ‘노동자역사 한내’는 같은 날 “조선일보는 오랜 시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성을 왜곡하고 노동자 간 갈등을 부추겨 온 대표적인 언론사다. 이번 기획기사에서 다루는 불평등 문제에 대해서도 그동안의 왜곡된 원인진단과 반노동자적인 해법을 유포하고 있다”며 “전태일재단은 조선일보와의 협업을 당장 중단하고 전태일재단에 대한 동지적 존중을 보내온 모든 노동자에게 머리 숙여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일보 편집국장 “어느 것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것”

13일 선우정 조선일보 편집국장은 지난 1월 김윤덕 선임기자의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인터뷰가 이번 기획 계기였다고 밝혔다. 노동자 현실을 다룬 보도에 노조할 권리(노조법 2·3조 개정) 등의 노동계 요구가 빠져있다는 지적에 대해선 “제도적으로 (노조법)법을 고치자는 것은 먼 대책이자 목표”라며 “우리가 지금 쓰는 것은 우리의 철학을 가지고 쓰는 것이다. 구체적인 부분에 솔루션을 제시할 순 없다”고 했다. 그는 “노동의 편차가 심각한 건 맞고, 전태일재단과 현실적인 해법을 찾아보자는 취지”라며 “어느 것이 문제의 본질인지는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가 이번 기획에서 주로 다룬 한화오션 하청노동자 관련, 지난 2022년 파업을 ‘불법’ ‘조폭’ ‘횡포’ 등으로 규정해왔다는 비판을 두고는 “불법투쟁에 대한 우리 신문의 입장은 전혀 변한 게 없다. 왜 불법파업을 하나. 합법 테두리 안에서 해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이번 기획 보도는) 설사 불법이라 하더라도 그 이면에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돌아보자는 취지”라고 했다.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은 공동 기획을 둘러싼 비판에 대해 “기획을 같이 한 게 조선일보의 과거 기조에 다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라며 “이번 보도에 노조를 기득권이라고 하는 표현이 없지 않나”라고 했다. 기획 기사에 노조를 통한 노동조건 개선은 언급되지 않았다는 지적을 두고는 “한겨레와 경향도 그렇게 쓰지 않는다. 무언가 (노동조건 개선이) 진행되면 ‘투쟁의 결과’라고 쓰지 않는다”고 했다. 다만 관련 보도에서 ‘한국 사회에선 노조할 권리가 보장되고 있다’고 기술된 부분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태일재단 안팎에선 이번 기획이 결정된 절차를 둘러싼 논란도 있다. 한 총장은 “전태일재단은 사무총장 중심으로 운영되는 체계”라며 “다만 재단 이름을 걸고 나가는 (보도) 사안이기에 이사회 논의를 거쳤어야 한다는 얘기는 내부에서 나온다. 25일 정기이사회에서 보고하고 논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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