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KBS ‘고려거란전쟁’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가 전사했다. 지난 7일 방영된 16화에서 양규 장군이 거란군의 화살에 맞는 장면의 순간 시청률(닐슨코리아, 전국 가구 기준)은 11%를 기록했다. 유튜브와 온라인 공간에선 양규 장군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지난 7일 ‘양규’ 키워드는 구글 트렌드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양규 장군의 활약이 드라마를 통해 주목 받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양규 장군의 최후를 중심으로 한 기록을 통해 당시 상황을 재구성했다.

포로 3만 명 구하고 거란에 큰 타격 입힌 양규

2차 거란의 침공은 양규 장군의 활약으로 시작해 양규 장군의 활약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압록강 인근 최전방인 흥화진에서 거란군을 막아냈고, 곽주를 탈환해 거란의 후방을 뒤흔들었다. 드라마 15~16화에선 퇴각하는 거란군에 지속적으로 기습을 해 포로를 구해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고려시대를 다룬 역사서인 <고려사> 양규 열전은 “양규는 원군도 없이 한달 사이에 일곱 번을 싸워 많은 적의 목을 베었고, 포로 3만여명을 되찾았으며 말과 낙타, 병장기를 노획한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 표현한다. 드라마에선 제작비에 제약이 있어 소규모 전투로 묘사되지만 전투 때마다 수천 명의 적이 죽을 정도로 큰 규모의 전투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에선 양규, 김숙흥 두 인물이 처음부터 함께 하지만 실제 역사에선 각자 전투를 치른 다음 합류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거란 본대에 맞선 최후는 구체적 묘사는 없지만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음을 연상케 하는 표현들이 있다. <고려사> 양규 열전은 당시 상황을 “양규와 김숙흥은 종일 힘써 싸웠지만, 병사들이 죽고 화살도 다 떨어져 모두 진중에서 전사했다”고 썼다. 이후 문종이 즉위하고 양규와 김숙흥의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하면서 내린 ‘제서’에는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했다”고 기록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무수한 화살을 맞으며 치열하게 싸운 것이다.

당시 지휘관들까지 전멸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일어난 배경은 기록돼 있지 않다. 다만 정황상 여러 추측이 가능하다. 임용한 역사학자는 저서 <전쟁과 역사>에서 “장수가 달아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달아날 수 있다”며 “대신 적의 전사자보다 아군의 전사자가 월등히 많아지고 덧없는 손실을 각오해야 한다.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원들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아니면 구출한 포로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양규 장군의 활약으로 거란은 큰 손실을 입는다. 중국 송나라의 역사서인 <속자치통감장편>은 “거란이 크게 패배했다. 장수와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고 기록한다.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를 번역한 <국역 요사>(김위현 저)에 따르면 거란은 피해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진 않았지만 “큰 비가 내려 말과 낙타가 모두 지쳐서 모두 지쳐서 갑옷과 무기를 대부분 버리고 날이 개자 겨우 강을 건넜다”고 썼다. 

양규 사후 주목할 만한 세 장면

양규 장군의 사후, 우선 주목할 장면은 흥화진사 정성의 활약이다. 드라마에선 압록강을 건너는 거란의 본대 후미를 공격하는 것이 대사로만 처리된다. 하지만 <고려사>는 “정성이 따라가 후미를 맹렬히 추격했다.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했다. ‘맹렬한’ 추격 끝에 거란군이 강을 넘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공격을 이어가 피해를 입혔다는 점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장면은 양규 장군의 사후 현종의 평가다. 왕인 현종은 손수 교서를 써서 양규 장군의 아내에게 전한다. 교서는 “(양규 장군은) 용맹을 떨치며 군사들을 지휘하니 그 위세로 전쟁에서 이겼고, 원수들을 추격해 사로잡아 있는 힘을 다해 나라의 강역을 안정시켰다”며 “불행하게도 전사했다.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해 이미 훈작과 관직을 올렸지만, 다시 전공에 보답할 생각이 간절해 더욱 넉넉히 베풀고자 한다”고 했다. 

▲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 KBS '고려거란전쟁' 갈무리.

양규 장군은 공부상서에 추종되고 아내에겐 매년 벼 100석씩 평생 지급했다. 아들 양대춘은 교서랑에 임명됐고 훗날 재상의 자리까지 오른다. 양규와 김숙흥 두 인물은 공신각에 초상을 걸어 공신의 예우를 받는다.

마지막 장면은 고려가 무너진 후 조선 시대다. 고려 장군인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다. 조선 초 세조 때 집현전 유학자인 양성지가 ‘무성묘’를 세워 역사 속 위대한 장군들의 위패를 모시자고 건의하고 허락을 받는 내용이 있다. 위패를 모신 장군은 신라 김유신, 고구려 을지문덕 등과 함께 고려 유금필, 강감찬, 양규, 윤관, 김경손, 박서, 최영 등이 있다. 전체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을 장군으로 기록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쓰인 역사 속 유명한 장군들을 기록한 <해동 명장전>은 을지문덕, 김유신, 장보고, 안시성주(양만춘은 후대에 지어진 이름), 강감찬, 김경손, 최영, 이순신, 권율, 곽재우, 김시민 장군 등 역사속 명장들과 함께 양규 장군의 전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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