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영화사 진진
▲영화 '나의 올드 오크' 스틸컷. ⓒ영화사 진진

“나 다 안다.” 주인공 TJ(데이브 터너)가 친구 찰리의 집 문을 두드린다. 그러고는 ‘뭘 안다’는 구체적인 말도 없이 그저 화난 목소리로 노려보며 “나 다 안다”고만 한다. 그 말을 들은 찰리(트레버 폭스)는 사실 이미 크게 뜨끔했다. 아닌 척 발뺌하려 팔짱을 단단히 끼고 방어적인 자세로 서 있어 보지만, 긴장한 티가 역력하다. 어젯밤 TJ가 십 수년간 운영해 온 펍 ‘올드 오크’에 큰 물난리가 났다. 누군가 고의로 가게 배관에 상처를 냈고, 누전으로 전기 설비까지 망가져 손보는 데만 몇억이 들게 된 상황. 놀랍게도 그 사달을 낸 주범이 바로, TJ의 오랜 친구인 찰리다.

TJ와 찰리는 영국의 광산 마을에서 자랐다. 광부였던 이들 아버지도 서로 친구였다. 두 사람은 학교를 함께 다녔고, 수없이 많은 밥을 같이 먹었으며,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추억을 공유하며 성장했다. 광산이 문을 닫자 TJ는 펍 ‘올드 오크’를 열어 생계를 유지했고 찰리는 아낌없이 맥주를 팔아주는 단골이 돼 줬다. 심지어는 그곳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약혼식까지 치렀다. 그런데 나이를 지긋이 먹은 중년이 된 지금에 와서 두 사람은 어째서 이토록 반목하는 걸까. 

나이 든 영국 노동자가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의 켄 로치 감독이 들고 온 17일 개봉 신작 <나의 올드 오크> 이야기다. 이 작품 주인공인 TJ와 찰리도 광산 노동자 출신이다. 태어난 곳, 하던 일, 정부에 대한 입장 등 대부분 삶의 태도가 비슷했던 이들이 서로 전혀 다른 입장으로 맞서게 된 건, 바로 ‘난민’ 때문이다. 찰리는 영국 중에서도 유독 자기들 마을로 유입되는 시리아 난민들이 불편하고 싫다. 반대로 TJ는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연민을 품고 있다. 이 입장 차이가 조금씩 누적되면서 기어코 찰리가 친구 TJ의 소중한 가게까지 박살 내버리고야 마는 극단적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난민에 부정적인 찰리의 입장도 영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찰리 역시 켄 로치 감독이 오랜 시간 자기 영화로 보듬어온 영국의 소외된 노동자 중 하나 아닌가. 광산이 문 닫은 뒤 광부의 가정은 모두 가난해졌고, 한 마을을 지탱하던 산업이 폐기됐음에도 정부는 이들의 재기를 돕는 정책적 보완책 마련에 무심했다. 미래가 조금씩 나아지기는커녕 노후가 어두워지기만 하는데, 어느덧 ‘가장 임대료 싼 동네’가 돼 버린 마을에 난민이 유입되기 시작한다. 자본을 축적한 투자자들은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찰리의 옆집을 헐값에 사들이고, 동네에 별다른 애정도 없는 세입자들에게 임대를 내어준다. 그저 ‘값이 싸서’, ‘잠시 머물기 위해서’ 마을에 흘러들어온 이들은 주거지는커녕 내 집 앞 거리마저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다. 40년을 지켰던 삶터가 점차 영국에서 가장 가난하고, 낙후되고, 안전하지 않은 곳이 되어간다면? 찰리는 일갈한다. “불편한 걸 말하면 인종차별주의자라고들 하는데. 난민들은 부자 도시 런던으론 안 데려가지 않나? 자기들은 같이 살기 싫으니까!” 

켄 로치 감독이 ‘노동자의 가치’, ‘연대의 힘’을 오래도록 꾸준히 이야기해 온 감독이라는 걸 어느 정도 아는 관객이라면, 아마 이쯤에서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대략 짐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난민을 극도로 거부하던 이들과 그들을 도우려는 쪽이 서로 상처 주고 대치하지만, 어떤 시간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결국 서로를 지지하게 된다는 전개다. 그게 ‘실재하는 현실’이라기 보다는 ‘감독이 믿는 당위’에 가깝다는 점에서, 누군가에게는 좀 원칙적인 설득에 불과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냉담한 관객의 마음을 설득하는 대목이 있다면, 바로 주인공 TJ가 친구 찰리를 찾아가던 날의 장면일 것이다. TJ는 친구에게 말한다. “우리, 시리아 사람들 오기 전부터 이미 힘들었어. 너도 멍청한 놈 아니니 그거 알잖냐.” 마을 경제를 뒷받침하던 광산 산업이 중단됐음에도 자국민을 나 몰라라 했던 정부에는 별다른 저항을 못 해놓고,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 도망쳐온 힘 약한 난민들에게 화풀이나 할 뿐이라는 거다. 그건 ‘당연히 약자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군자 같은 훈계가 아니라, ‘적어도 더 약한 사람에게 폭력적이지는 말자’는 자기성찰에 가깝다. 

TJ의 말을 듣던 찰리는 당황한 나머지 침을 꿀꺽 삼킨다. 그 순간 그의 목젖만이 소리 없이 꿀떡 움직이는데, 찰리가 느낀 수치심을 보여주는 이 장면의 배우 표현은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관객이 자문하게 되는 것도 이쯤이다. 설령 나보다 취약한 사람을 도울 ‘의무’까지야 없다 해도,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 어디까지인지는 한 번쯤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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