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우울증에 빠진 상태 같아요.” 정연욱 KBS 기자(40·2009년 입사)가 전한 KBS 보도국 내부는 침울하기 그지없다. 기자들은 무력감과 허탈함, 공포에 빠져 있다. ‘설마…’ 싶던 TV 수신료 분리징수가 30년 만에 시행됐고, 정권 차원의 KBS 사장 해임 절차가 그 어떤 난관 없이 속전속결로 이뤄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 시절 방송장악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는 이동관 대통령실 특보를 끝내 차기 방송통신위원장 후보에 지명했다.

KBS 기자 다수는 6년 전 ‘방송 정상화’를 기치로 내걸고 파업에 참여했다. 파업을 주도했던 KBS 기자·PD들은 고대영 전 KBS 사장을 몰아내고 사내 권력을 교체하는 데 성공했다. 본인들 스스로가 새 리더십 일원으로 참여하여 무너진 방송의 공공성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러나 김의철 KBS 사장으로 상징되는 진보·개혁 언론인들은 윤석열 정부 들어 ‘보수판 방송 정상화’를 위한 ‘인적 쇄신 대상’이 됐다. 길게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10년간 방송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이들이 윤 대통령이 주도하는 TV 수신료 분리징수 국면에선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 정연욱 KBS 기자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 정연욱 KBS 기자가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오늘.

정권의 공영방송 무력화…침묵하는 기자들 왜? 

15년차 정연욱 기자는 KBS 방송 민주화 투쟁에서 상징적 인물이다. 정 기자는 2016년 7월 박근혜 청와대의 KBS 보도 개입에 침묵하는 자사 간부들을 비판했다가 제주방송총국으로 ‘불법’ 전보됐다. 이 사건은 KBS 기자들이 보수 정권과 영합한 간부들에 저항하는 계기가 됐으며 그해 연말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듬해 박근혜 탄핵과 정권교체로 이어진 정치적 변동은 KBS 파업의 도화선이 됐다.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사옥에서 만난 정 기자는 “KBS는 현재 수세에 몰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게 오만하게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과도한 정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겠다는 KBS 특유의 조직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기자들은 무력감과 함께 공포도 느낀다. 여러 이유로 기자들이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 KBS 보도국 내부는 어떤가? 파업 때와 비교하면 조용하다. 기자들 사이 대응 논의가 있는지? 아니면 자포자기 상태인 건가?

“가장 최근 공표된 기자들 생각은 ‘사장 퇴진’에 대한 여론조사였다. KBS 직종 가운데 유일하게 기자협회만 ‘사장 퇴진에 반대한다’는 여론이 더 높았다. 단언할 순 없지만 2017년~2018년 파업으로 구축한 리더십, 즉 현 KBS 보도를 책임지는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불신 단계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 과정에 KBS 내부 책임이 분명 있지만 권력의 비정상적 폭주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시각이 아직 우세하다고 난 판단한다.”

- 국민의힘을 포함해 KBS를 공격하는 쪽에선 ‘편파 보도’를 문제 삼는다. ‘민주노총 언론노조에 종속된 기자들이 편파 보도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민노총 편향 보도’는 사내 안팎에서 KBS를 공격하는 주된 논리 가운데 하나다. 보도국 기자들이 가장 많이 가입해 있는 본부노조(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민주노총과 언론노조 산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본부노조가 민주노총과 그 어떤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 KBS 기자들이 민주노총에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그런 정치적 공격에 유감을 표한다. KBS 보도가 불공정했다고 사내 일부 세력이 큰절까지 하는 사과 행사를 했는데, 그에 동의하지 못한다는 기자들의 강한 반발심이 있다. KBS가 민주노총에 유리한 보도를 했다? 오히려 ‘민주노총 집회가 시민에게 불편을 준다’는 취지로 보수단체 집회와 함께 비판적으로 보도했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

▲ 서울 KBS 여의도 사옥을 삥 둘러싼 근조화환. 김의철 KBS 사장 퇴진을 요구하거나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서울 KBS 여의도 사옥을 삥 둘러싼 근조화환. 김의철 KBS 사장 퇴진을 요구하거나 윤석열 대통령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정부·여당은 KBS를 ‘민주당 방송’이라고 비난하는데?

“우리 보도가 편향적이었느냐, 기자들 다수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2019년 10월 조국 사태 당시 KBS는 조국 부부 자산관리인(PB)을 인터뷰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그에 대한 KBS 경영진 사과에 반발한 성재호 사회부장(현 보도국장)은 보직을 사퇴하며 저항했다. 지난 대선 때 KBS는 이재명 후보 배우자 김혜경 여사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을 제기하는 등 집권세력인 민주당이 불편할 보도도 주저하지 않았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게 문재인이든 윤석열이든 권력 감시라는 공영방송 본연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 KBS를 조여오는 정권 차원의 압박을 제어할 대안이 부재한 모습이다.

“나는 보도국에서 의사 결정을 담당하고 있는 수뇌부들에게 불만이 있다. 지난 KBS 기자협회 총회에 참석한 보도본부장은 TV 수신료 분리징수 국면이 ‘KBS의 정순신 보도’에서 비롯했다고 규정했다. 정순신 보도 이틀 뒤 분리징수에 관한 실무 절차가 시작돼서다. 본부장이 그렇게 이 사안을 규정했다면, 수신료 분리징수가 국민 선택권을 위한 것이 아닌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조처라면, 그리고 그 조치가 현실이 돼버린 상태라면, 이제는 KBS 보도본부가 존재를 걸고 공영방송이 언론사로서 왜 존재해야 하는지 입증해야 한다. 어떤 인터뷰에서 한 시청자가 ‘KBS는 지금이야말로 눈치 안 보고 싸울 수 있지 않느냐. 왜 아직도 좌고우면하느냐’고 질책한 것이 떠오른다. 현 정권 조치가 부당하다는 것을 조직 명운을 걸고 알려야 한다. 이는 기자들을 이끌고 있는 경영진이 결단해야 할 몫이다. 이 조치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고 왜 부당한지, 권력이 왜 이렇게까지 압박하는지 시민들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KBS가 신뢰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그래도 무엇이 잘못되고 있는지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존재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우리 본연의 모습, 즉 기자로서 돌파하려는 의지가 부족해 보인다. 경영진은 수세에 몰린 상태로만 있다. 공영방송 존재 이유를 알아달라는 호소를 2012년, 2014년, 2017년 거리에 나가 외쳤던 수뇌부들이 지금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주어진 업무를 소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우리의 설득과 자기 입증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그런 과정이 KBS 기자들의 존재감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지금은 너무 무기력하게만 당하고 있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지난 2017년 9월28일 총파업 25일차 결의대회에서 고대영 KBS 사장 퇴진 피켓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지난 2017년 9월28일 총파업 25일차 결의대회에서 고대영 KBS 사장 퇴진 피켓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 2017년 파업 이후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지난 6년 동안 ‘보도국의 민주화’ 만큼은 개선됐다. 이 시기 동안 간부들은 특정 보도를 강요하거나 못하게 막거나, 정치적 목적으로 뉴스를 편집·재단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모든 언론사가 국정농단에 집중하던 2016년 KBS에선 보도국장이 기자협회장에게 ‘최순실이 박근혜 측근이 맞느냐’는 황당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이와 비교하면 지난 6년은 기자들의 생각과 노력이 뉴스로 구현됐던 시기다. 보도국 역량을 비판할 순 있어도 수뇌부가 보도를 막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지금 사내에 보도국 수뇌부를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6년 전 그때 무엇을 했는지 잘 아는 입장에서 보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다. 본인들이 얼마나 폭압적 분위기에 편승해 기자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지 난 생생하게 기억한다. 민주화가 된 보도국이 2016년 그때로 돌아갈까봐 그게 가장 우울하다.”

‘KBS 사장 사퇴’ 양분된 보도국과 세대 갈등 

2017년 파업 때와 비교하면 KBS 기자들 생각은 나뉘어 있다. 앞서 언급한 지난 6월 KBS 기자협회의 ‘김의철 사장 퇴진’ 여론조사에서 ‘사퇴해선 안 된다’는 응답은 52.6%, ‘사퇴해야 한다’는 응답은 47.4%로 양분됐다. 2017년 파업을 주도했던 현 KBS 수뇌부들에 대한 인식도 세대별로 차이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시절 방송장악에 함께 저항한 기자들에겐 ‘역전의 용사’이지만, 이를 테면 저연차 기자 눈에는 문재인 정부 시절 승승장구한 간부들로만 비친다. 파업을 주도한 인사들이 카르텔을 만들어 이익을 사유화했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저연차 기자들의 생각은 제가 느끼는 위기의식과는 다를 겁니다. 저의 문제의식도 누군가 눈에는 ‘파업 후 뉴스9 앵커를 한 선배가 예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걸 싫어한다’는 것 정도로 비칠 수도 있겠죠. 그런 세대 갈등이 보도국에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실제 20~30대 KBS 직원을 중심으로 한 ‘MZ노조’도 출범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 기자는 보도국에서 생각이 다른 동료 기자들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지난 세월 용기 있게 싸운 동료들이 일궈낸 성과들이 전면적으로 부정을 당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 세월이 마치 가치 없는 시간으로 결론이 난 것 같아 괴롭다”고 토로했다.

▲ 정연욱 KBS 기자는 지난달 24일 특집 시사기획창 ‘공영방송은 왜 존재하는가’ 편을 취재했다. 사진=유튜브 채널 KBS 시사.
▲ 정연욱 KBS 기자는 지난달 24일 특집 시사기획창 ‘공영방송은 왜 존재하는가’ 편을 취재했다. 사진=유튜브 채널 KBS 시사.

“저는 매일, 매년을 이곳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에요. 기자로서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던 그때 그 시절로…. 내 생각을 말하면 징계를 각오해야 했던 그때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괴로울 뿐이죠. 우리 안의 사소한 이익 다툼이 우리 스스로를 작게 만들고 있어요. 또 이렇게 말하면 시대착오적 이분법에 갇혀 있다고 비난할까요? 지난 파업이 자기 출세를 위한 것이었다는 비판은 지나치게 단순화해서 보고 있는 거예요. 온갖 핍박과 시련을 각오하고 저널리즘을 지키려다 징계를 받았던 그 세월이, 그렇게 쉽게 지워질 수 있나요?”

정 기자는 지난달 24일 특집 시사기획창 ‘공영방송은 왜 존재하는가’ 편을 취재했다. 영국의 세계적 공영방송인 BBC, 프랑스 공영방송 FRANCE TV, 미국 공영방송 PBS 등을 찾아 공영방송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왜 필요한지 조명했다. 그는 “공영방송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시민들 생각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논쟁하는 언론사”라고 정의했다.

- 공영방송은 왜 필요한가?

“어떤 정권인지 개의치 않고, 권력을 감시하는 방송사이기 때문이다. 2017년~2018년 KBS 파업을 지지했던 많은 분 가운데선 문재인 정권을 지지했던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분들이 파업 후 KBS 뉴스에 지지를 보내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KBS가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이다. KBS가 어떤 진영 스피커가 되길 바라는, 사이다를 기대하는 언론 소비자 눈에는 미흡하겠지만 공영방송은 민주주의 다양성을 끊임없이 포용하는 건강한 논쟁의 그릇이어야 한다. 비록 현재 KBS는 부침을 겪고 있고 너무도 큰 격랑에 직면해 있지만 앞으로 어떤 어려운 상황이 닥친대도 기자들은 중심을 잡고 좌고우면하지 않고 보도할 것이다. 최근 KBS가 양평 고속도로 단독 보도를 하고 있는데 KBS 다른 직종에서는 ‘이 국면에 이런 보도를 하면 어떡하냐’고 걱정한다. 기자들은 그저 저널리즘이라는 본업에 충실할 뿐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언론사 생존이 위협 받아도 가장 늦게까지 저널리즘 본령에 충실할 언론사는 KBS라고 생각한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공영방송이란 우리 사회 자산을 허무는 일은 결국 민주주의 위기를 초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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