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회전’하고 있는 한국의 연금개혁 상황과 맞물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금개혁 추진 과정이 국내에도 자세히 보도되고 있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며 노조 시위 등이 대규모로 벌어지고 있지만 국내언론은 대부분 시위 경위보다 ‘뚝심’ ,‘결단’ 등 개혁을 단행한 마크롱 대통령 칭찬에 초점이 맞아 있다. 마크롱 대통령의 부자 감세 논란 등 맥락이 빠져 개혁 반대 주장이 정부 발목을 잡는 형태로 읽히기도 했다. 그간 한국의 국민연금 보도 과정에서 시민사회와 노동계 주장이 소외됐다는 지적과 같은 흐름이다.

▲ 에마뉘엘 마크롱 (Emmanuel Macron). 사진=flickr
▲ 에마뉘엘 마크롱 (Emmanuel Macron). 사진=flickr

정년을 62세에서 64세로 연장하고, 연금 100% 수령을 위한 근속기간도 42년에서 43년으로 늘리는 등의 내용이 담긴 프랑스 연금개혁안이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의회 통과가 확정됐다. 마크롱 대통령이 헌법 49조 3항의 특별규정으로 하원 표결 없이 대통령 권한으로 단독 입법한 결과다. 하원이 이를 막기 위해 내각 불신임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20일 부결됐다. 지난 1월부터 100만 명 넘는 인원이 모이는 등 프랑스 내 대규모로 벌어졌던 시위는 “절차가 무너졌다”며 의회 패싱 이후 더 격렬해졌다.

다수 한국언론은 국민 70% 반대를 무릅쓴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메시지를 연이어 냈다. 여론을 우려한 한국은 연금개혁 논의가 지지부진하지만 프랑스는 마크롱 대통령의 ‘결단’으로 개혁이 관철됐다는 것이다.

▲ 지난달 20일자 조선일보 1면 사진 기사.
▲ 지난달 20일자 조선일보 1면 사진 기사.
▲ 지난달 22일자 조선일보 16면 기사.
▲ 지난달 22일자 조선일보 16면 기사.

조선일보는 지난달 20일 다수 면에 걸쳐 프랑스 내 연금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고 21일 사설에서 “유권자가 싫어하고 반대하더라도 국가가 가야 할 길이라면 욕먹으며 가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 지도자와 의회의 존재 이유”라고 했다. 22일에는 <미래 위해… 마크롱, 지지율 30%선 붕괴 감수했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 “마크롱이 지지율 하락을 견디며 정치인의 무덤으로 불리는 연금 개혁에 성공할지 전 세계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했다.

▲ 22일자 한국경제 5면 기사.
▲ 지난달 22일자 한국경제 5면 기사.

동아일보도 지난달 20일 사설에서 “마크롱 정부의 결기 어린 호소를 우리도 새겨들어야 한다”라고 했고, 중앙일보는 24일 칼럼 시시각각에서 “지도자의 결단은 원래 고독하기 마련”이라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연금개혁이 인기가 없다는 이유로 임기 5년 동안 손을 놨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국의 마크롱이 될 수 있을까”라고 했다. 한국경제는 22일 5면에 <연금개혁 정면돌파한 마크롱…떠넘기고, 방관하고, 후퇴하는 韓> 기사를 내 한국과 프랑스를 비교하며 프랑스의 상황을 우호적으로 그렸다.

▲ 16일자 동아일보 18면 기사.
▲ 지난달 16일자 동아일보 18면 기사.

마크롱 대통령은 띄우는 반면, 시민사회나 노조 반발은 부정적 혹은 단편적으로 그렸다. 동아일보는 지난달 16일 <쓰레기에 갇힌 파리… 연금개혁 반대 파업 몸살> 기사에서 “(노동조합이) 8번째 파업 및 시위에 나서면서 프랑스 전역이 ‘쓰레기와의 전쟁’에 직면했다”고 했다. 이후 개혁 추진 과정을 보도하며 동아일보는 시위‧파업이 격화됐다는 소식을 전할 뿐 시위 이유나 반대 주장에 대해선 구체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일간지는 일부 칼럼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소통 미숙을 지적했지만 경제지는 그마저도 없었다. 한국경제는 지난달 20일 <프랑스, 하원 인근 집회 전면 금지> 기사에서 경찰의 집회 금지를 “1만여 명이 격한 시위를 벌인 데 따른 조치”라고 설명한 데 이어 “일부 시위자는 ‘마크롱 하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길가에 불을 지르거나 상점을 파손하기도 했다”며 폭력성을 강조했다. 22일 사설에선 “‘초강력 대응’을 공언한 노조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고 우려했다. 인종차별과 가혹행위 등 경찰의 강경대응이 현지에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 같은 내용은 경제지에 담기지 않았다.

▲ 지난달 22일자 연합뉴스 보도.
▲ 지난달 22일자 연합뉴스 보도.
▲ 신문과방송 4월호, ‘BERT로 분석해 본 국민연금 개혁 보도’ 갈무리.
▲ 신문과방송 4월호, ‘BERT로 분석해 본 국민연금 개혁 보도’ 갈무리.

국내언론의 편향된 연금 관련 보도는 데이터로 확인할 수 있다. 이종혁 경희대 미디어학과 교수는 ‘신문과방송 4월호’에서 2022년 5월 10일(새 정부 출범일)부터 2023년 2월 28일까지의 519개 언론사의 기사 2만 1306건을 수집해 토픽모델링 기법으로 8개 토픽을 나눈 결과, 연금개혁 필요성 강조는 긍정적, 국민 반발 토픽은 부정적으로 보도됐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우리 언론이 연금개혁 찬성론자들과 추진 집단에 힘을 실어주고 있음을 시사한다”며 “연금개혁이야말로 전국민적인 동의와 합의가 전제돼야 성공할 수 있는 어려운 숙제다. 언론에 요구되는 역할은 연금 개혁에 대한 일방향적 메시지 전달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이 논의되는 공론장 조성일 것이다. 언론이 연금개혁 비판에 대한 부정적 편향을 버리고 비판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해야, 바람직한 연금개혁 공론장이 작동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뉴욕타임스(NYT) 지난달 23일자 기사, 왜 이렇게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연금에 대해 항의하고 있을까(Why So Many People in France Are Protesting Over Pensions) 보도 갈무리.
▲ 뉴욕타임스(NYT) 지난달 23일자 기사, 왜 이렇게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연금에 대해 항의하고 있을까(Why So Many People in France Are Protesting Over Pensions) 보도 갈무리.

외신은 어떻게 보도하고 있을까. 뉴욕타임스(NYT)는 프랑스의 연금 계획(France’s Pension Plan) 섹션의 첫 번째 주제(What to Know)로 <왜 이렇게 많은 프랑스 사람들이 연금에 대해 항의하고 있을까>(Why So Many People in France Are Protesting Over Pensions)를 다뤘다. NYT는 “노조를 포함한 반대자들은 이렇게 (개혁이) 긴급할 필요가 있는지 이의를 제기했다. 그들은 마크롱이 부유층 세금 인상을 거부했기 때문에 소중한 은퇴 권리를 공격하고 블루칼라 노동자들에 부당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NYT는 장기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단기적 ‘적자폭발’은 없다”는 프랑스 경제학자의 발언을 인용했고, “프랑스의 연금 시스템을 감시하는 공식 기관조차도 파산의 즉각적인 위협이 없으며 장기적인 적자를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했다. 또한 프랑스인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프랑스의 강한 대통령제에 대한 불만이 반영된 것이고, 은퇴 이후의 삶을 또 다른 ‘전성기’로 생각하는 프랑스인들의 가치관이 담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난달 WSJ 31일자 기사 ‘젊은 프랑스 시위대는 그들이 아닌 그들 부모님의 은퇴를 걱정한다’ 갈무리.
▲ 지난달 WSJ 31일자 기사 ‘젊은 프랑스 시위대는 그들이 아닌 그들 부모님의 은퇴를 걱정한다’ 갈무리.

보수 성향으로 꼽히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마크롱 대통령의 개혁에 찬성 사설을 내면서도 기사로는 프랑스 노조의 반발 이유를 자세하게 다뤘다. WSJ는 지난달 16일(현지시간) 사설에서 “냉정한 현실은 프랑스의 연금시스템이 지속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며 “선출된 공무원들은 시민들에 어떤 종류의 희생을 요구하기 꺼려하지만 마크롱은 예외였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23일 <100만 명 이상의 시위대가 마크롱 연금개혁에 반대해 나아갔다>, 31일 <젊은 프랑스 시위대는 그들이 아닌 그들 부모님의 은퇴를 걱정한다> 등의 기사를 통해 국민 반발을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김진석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5일 통화에서 “프랑스 연금개혁 상황의 핵심은 연금개혁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시민 합의 과정이 빠져 있다는 것”이라며 “연금수급연령을 늦추는 문제는 노동시장 전반의 개혁하고 연동이 돼야 하는데 그 부분도 빠져 있다”고 말했다. 이어 “프랑스는 한국과 매우 다르다. 연금개혁과 사회적 갈등이라는 포괄적 측면 빼고는 배경과 역사가 너무 달라서 단순 비교하며 반면교사를 삼는다거나 하는 논의는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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