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대상, 주체성의 제거라는 폭력문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의 잘못된 만남”은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포인트다. 여성의 몸은 상품화되었고 성적으로 끊임없이 욕망되지만 주체성이 없는 존재로서 머물기를 요구받는다. 그런 요구를 가장 심하게 받는 집단들 중 여성 아이돌이 있다.  여성 아이돌이지만 자신의 방식대로 주체성을 가지고 살고자 하거나,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거나, 페미니스트로 ‘오해’라도 받았던 이들은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내몰렸다.

수많은 여성들의 죽음 앞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근본적인 성찰과 변화를 위한 계기를 갖지 못한 까닭에, 여전히 많은 여성들은 일상에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간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이 갖는 정체성이자 관계맺기를 통해 유의미하게 작용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이 사회는 성을 상품으로서 소비하도록 만드는 까닭에 ‘가부장제 자본주의’는 여성을 끊임없이 인격과 분리된 ‘몸뚱아리’라는 대상으로 존재하게 만든다.

자본가의 무책임한 이윤의 극대화가 사회의 핵심 구성원리로 작동하는 까닭에 이러한 문화가 ‘돈’이 되기 때문에 반성이 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생산된다. 인간의 성을 도구화하는 성폭력적인 문화가 모두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기에, 이와 연결된 수많은 질문과 잘못된 답변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스폰을 연애의 방법으로 제시하는 사람들

하루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옆 테이블 두 남성의 대화가 들려왔다. 한 사람이 ‘여자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하자, 상대는 자신이 평생 늙지 않는 어리고 예쁜 여자친구를 만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스폰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은 몇 년째 하고 있으며, 태도가 마음에 안 들면 바꾸면 되고 질리면 바꾸면 되고 나이가 많아지면 바꿔도 되니 평생 늙지 않고 예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세한 계약의 유형을 소개했다. 이 대화의 전제는 여성이 ‘말 잘듣고 어리고 예쁜’ 성착취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성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소비할 수 있는 ‘몸뚱아리’로서만 이야기됐다.

▲ 사진=gettyimagesbank
▲ 사진=gettyimagesbank

한 번은 한 기관에서 성평등 강사 양성 과정을 수강 중인 남성에게서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연애를 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비위도 맞춰야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며, 스폰을 합리적인 선택지로 여기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는 것이었다. 스폰은 똑같은 돈을 쓰더라도 그 모든 감정 노동을 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여성들이 돈 많은 남성을 원하니 남성도 어리고 예쁜 여자를 원하는 것은 당연하고, 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에너지를 들여서 스폰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마주하여 살아가는 방법을 잊고, 소비하며 살아가는 개인만 남은 오늘날 발견되는 모습이다.

이것이 합리적이라면, 과연 누구의 기준에서 합리적인가? 왜 남성은 돈이 많아야 한다고 요구받게 되었으며, 왜 여성은 예쁘고 어려야 한다고 요구받게 되었는가? 이것은 정말 ‘등가교환’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왜 인간사회에 ‘인간’은 사라지고 ‘상품’만이 남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구조적 차별과 억압을 외면하는 순간,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고방식을 잊은 채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는 소비의 선택지만 남는다.  

관계의 상상력은 제거되고 ‘소비재’로 남은 현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비단 비청소년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에게서도 동일하게 드러난다는 점이 안타깝다. 청소년들과 성교육을 할 때 “성(性)”하면 떠오르는 단어로 돈을 쓴 남성 청소년이 있었다. 왜 돈이 생각나는지 물어봤더니 섹스를 하려면 돈이 들기 때문이라고 했다. 애인이든 성매수든 돈이 없으면 성관계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서 저는 평생 할 수 없겠죠’라고 했다. 돈이 없으면 잘생기기라도 해야 하는데 잘생기지도 않은 자신은 섹스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인간 대 인간이 관계를 맺는 방법이 자본이 없이는 모든 것이 불가능할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다양한 관계맺기 방법의 상상력은 제거된 채 여성은 ‘몸뚱아리’만 남은 소비재가 되어버렸다.

승자독식,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관계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사회의 교육과 경제 구조는 분명히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잊도록 만들며 각자 고립된 인간으로써 알아서 살아남도록 요구한다. 차별과 억압이 공고한 사회에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다보니, 억압의 결과를 애초 자신의 욕망인 양 온전히 내재화하며 생존을 위해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만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경제력이 있는 남성을 선호하는 일부 여성의 모습이기도 하다. 여성들에게 남성들과 같은 기회 그리고 동등한 과정과 평등한 결과물이 주어지지 않는 가부장제 자본주의에서 이 사회가 ‘최고의 인간’, ‘능력남’이라고 평가하는 ‘돈 많은 남성’을 만나서 경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여성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주 적극적으로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 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여성들도 정말 많다. 돈으로만 자신을 평가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다면 자신도 거기에 가치를 두지 않을 때 가능하다.

“시헤녀가 성소수자다”

주변 여성들로부터 ‘한국에선 시스젠더 헤테로(이성애자) 여성이 성소수자다’라는 농담을 듣곤 한다. 만날 남성이 없다는 것이다. 남자를 좋아하는데 남자를 만날 수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이성애 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괴롭다고 한다.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 여성을 그저 인간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은 청소년들과 함께하는 성/성평등교육 시간에도 종종 발견된다. 남성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하는 것은 섹스를 하는 방법이나 섹스를 잘하는 방법과 같은 것들이다. 반면 여성 청소년들 같은 경우에는 섹스에 대한 궁금증도 많긴 하지만 가장 많은 빈도를 차지하는 질문 중 하나가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이것은 남성 청소년들로 부터는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질문이다.

서로의 질문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이 사회가 성별에 따른 구조적 차별과 억압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청소년들에게 대부분 이런 기회조차 잘 주어지지 않는다. 이는 남성 청소년은 남자 강사가 여성 청소년은 여자 강사가 따로 성교육을 하는 것이 맞는 것으로 단단히 착각하는 현실에 의해 서로의 상황과 구조적인 문제를 인지할 기회를 박탈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적이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방법에 대한 나의 대답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존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에게 질문을 하는 사람, 나의 의견과 감정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평등한 대화가 되는 사람인지 보면 된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을 너에게 해야겠다’, ‘너는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해 주어야한 다’와 같은 태도는 폭력이다. ‘너는 내가 원하는 말투, 행동, 외모, 생활 양식을 가져야 한다’와 같은 통제 역시 폭력이다. 

연애각본을 넘어선 관계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이야기 의견과 감정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연애”를 할 수 없다. 물론 이 사회가 정해놓은 각본에 의한 연애는 할 수는 있을 수 있다. 극장에서 영화 보고 맛집 가고 예쁜 카페 가서 사진 찍어서 SNS에 올리는 등 연애를 한다면 해야 하는 것처럼 정해져 있는 ‘각본’대로 움직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필요로 하는 연애방법만이 서사되고 있으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이 돈을 벌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지기 때문에 남성이 돈을 쓰는 주체로 여기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이 연애각본의 가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한계다.

여성을 성적 대상이자 ‘몸뚱아리’로 존재하도록 억압하고, 남성이 생계부양자여야 한다고 억압하는 여성과 남성을 모두를 억압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난 상상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돈을 써야만 연애가 가능하는 것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상상력도 필요하다. 성별에 따라 역할이 부여되고 억압되는 것이 아닌, 어떤 소비를 하는지만이 아닌 서로에 대한 탐구과정으로서 연애가 가능하게 하는 관계맺기의 상상력이 필요하다.

▲ 사진=gettyimagesbank
▲ 사진=gettyimagesbank

다른 사람의 감정과 의견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연애뿐만 아니라 좋은 친구도 될 수 없다. 좋은 부모도 될 수 없다. 좋은 관계 맺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이 궁금하지 않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원하는 것을 할 수밖에 없다. 혹은 세상이 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을 우리도 해야 한다고 여기는 관계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와 평등한 관계에서 평등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나도 다른 사람들과 평등한 관계에서 평등한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 억압이 점철된 각본을 넘어서서 인간 대 인간으로 서로를 탐구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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