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얘기다. 쉬는 시간이 되면 남자애들끼리 모여서 무용담을 내놓는다. “어제 우리 학교 짱이 싸우는 것을 봤는데 이단 날라차기가…”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단 날라차기가 실전에서 유효하게 쓰이는 일은 거의 없다. 다만, 중2 남자애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으려면 과장이 필요하다. 싸움 이야기는 선악을 확실히 나누어 말해야 한다. 우리 학교 짱이(당시엔 일진이라는 단어는 없고 짱이라는 단어를 썼다) 다른 학교 짱을 멋지게 이겼다는 과장된 말이 가장 인기가 좋다.

요즘, 국회에서 예산 심의가 한참이다. 여야가 서로 예산안을 가지고 논쟁한다. 사실 여야가 싸우는 것은 매년 있는 일이고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언론은 이를 ‘준예산’ 편성 가능성까지 운운하면서 보도한다. 최근 한 달 동안 준예산이라는 단어를 쓴 기사는 무려 538건이나 된다. 준예산이란 내년도 1월1일까지 국회의 예산안 심의가 확정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전년도 예산에 준해서 지출하는 제도를 뜻한다. 그러나 헌정 이후 준예산이 편성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다. 작년에도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여야가 합의 안 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결국 헌법에서 정한 예산안 법정 처리 시한을 넘겨서 늑장 통과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도 작년에는 ‘준예산’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 매년 반복되었던 여야의 다툼에 올해만 유독 ‘준예산’이라는 극단적인 단어를 쓰면서 보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 11월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3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소위원장인 우원식 예결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
▲ 11월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제3차 예산안등조정소위원회에서 소위원장인 우원식 예결위원장이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연합뉴스

준예산이라는 단어가 올해 언제부터 쓰였는지 기원을 따져보자. 지난 10월21일부터 “일각에서 준예산까지 걱정한다”는 실체 없는 기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10월25일에는 “여당 일각에서 준예산 편성을 우려” 한다며 준예산을 언급하는 실체가 여당 쪽임이 드러난다. 결정적으로는 10월26일 연합뉴스가 “해가 바뀔 때까지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할 여지도 없지 않아 그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라고 말한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의 인터뷰를 전한 이후다. 26일 이후에는 준예산 편성 가능성을 다룬 기사가 폭발하기 시작한다. 물론 대통령실은 준예산을 검토한 적 없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언론은 국회에서의 다툼을 보통 부정적으로 보도 한다. 그래서 국회에서 여야가 논쟁하면 준예산이 편성될 수 있다는 협박을 한다. ‘준예산 위기가 다가온다’, ‘경제위기 앞 준예산? 영국처럼 될 건가’ 등의 기사 제목을 보면 두려움이 몰려올 정도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준예산이 편성된 적은 헌정 사상 단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국회에서 여야가 싸우는 것은 오히려 국회의 정상적인 기능이다. 이를 ‘준예산’이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써가면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예산은 정치’라는 말이 있다. 정답이 없다는 얘기다. 내년도 정부 예산안은 올해보다 5.2% 늘어난 639조원이다. 이 중에 내년도 보건복지 지출은 올해보다 4.1% 증가한다. 보건복지 지출 증가는 4.1%가 좋을까? 아니면 5.2%가 좋을까? 가장 좋은 증가율을 구하는 법칙이나 수식은 없다. 국민의 동의를 구하고 그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구하는 것이 예산 심의의 핵심이다.

여당은 정부원안을 지키고자 한다. 야당은 임대주택이나 고용 관련 지출을 늘리려고 한다. 이렇게 여야의 의견이 다른 것이 정상이고 다른 의견을 통해 논쟁하고, 다툼하는 것이 국회의 본래의 업무다. 국민은 국회에서 여야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라 누구 말이 맞는지 판단해보자. 국민이 동의에 따라서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이다. 여야가 싸우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고 이렇게 싸우다가는 ‘준예산’이 편성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점잖게 여야를 둘 다 타이르는 행동은 정작 싸움의 당사자보다도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바가 적다고 말하면 좀 과장일까?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1월22일 국회에서 열린 공공임대주택 예산삭감 저지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1월22일 국회에서 열린 공공임대주택 예산삭감 저지를 위한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리고 ‘준예산’이 편성될 수도 있다는 암울한 전망은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할까? 여야가 싸움을 덜 한다는 것은 정부 원안에서 수정되는 폭이 줄어든다는 의미다. 그리고 정부 원안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것은 당연히 여권이다. 실제로 준예산 편성의 가능성을 말한 쪽은 여권이기도 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여권이 준예산 편성의 가능성을 언급한 시점은 예산안 심의가 시작되기 전이다.

여야의 싸움이 항상 좋은 것은 물론 아니다. 건설적인 논쟁이 있고 소모적인 정쟁이 있다. 그러나 예산안에 대한 다른 입장과 논리를 국민에게 홍보하는 논쟁은 필요한 싸움이다. 협상의 상대방과 타협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을 기대하는 언론의 논조도 필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든 여야의 싸움을 ‘준예산’이라는 최악의 파국의 가능성까지 언급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좀 과도한 측면이 있다. 특히, 준예산이라는 자극적 단어를 쓰는 이유가 정말로 준예산 편성 가능성을 예측했다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언론도 다 쓰는 단어라는 이유로 무 비판적으로 쓴다면 더욱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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