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학계를 중심으로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이 모여 논문을 발표하고 친교를 다지는 여름 문화연구캠프가 열린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행사 안내문에 따르면 캠프는 다층적 의미를 갖는다. “‘평원(campus)’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나온 이 단어는 영어에서는 ‘캠퍼스’와 ‘캠페인’, 독일어에서는 ‘투쟁(kampf)’, 프랑스어에서는 ‘장(場, champ)’, 그리고 ‘샴페인’과 어원을 공유”한다. 문화연구캠프는 대중문화연구자의 사교장, 축제, 논쟁을 꿈꾼다. 한국문화연구학회는 학술지 <문화연구> 가을호에 문화연구캠프 20주년 기념 논문들을 모았는데, 이중 전규찬의 <20년 우리의 문화연구 캠프는 진정으로 캠피했나?>가 눈길을 끈다.

전규찬은 “캠프는 퀴어적인 것과 연결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를 소환한다(패션 디자이너이자 영화감독인 톰 포드가 연출하고 콜린 퍼스가 주연해 잘 알려진 영화 <싱글맨>(2009)의 원작자다). 이셔우드는 그의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의 어긋남·마주침을 소설로 녹여내 대중성과 작품성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특히 <밤의 세계>(1954)는 캠프에 대한 주목할 만한 언급이 있는 텍스트로 저명한 문화 비평가 수잔 손탁도 <‘캠프’에 관한 단상>(1964)을 쓸 때 이를 참조하였다.

이셔우드는 캠프를 중성적 매력의 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의 스타일을 차용하고, 풍부한 예술적 감수성을 공유하며, 자유로이 사람들과 무리짓는 공동체로 묘사한다. 19세기 남성 동성애자 무리에서 이들의 독특한 스타일을 자칭하는 말로 쓰이기 시작한 캠프는 소수자로서의 감수성과 스타일을 응축한다. 매년 성소수자의 달 6월, 전세계에서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캠프와 꽤나 닮았다. 이를 따라 전규찬은 문화연구캠프가 “그로테스크한 뒤섞임 문양”에 가까워지고 “학술적 균질의 공간을 지양하며, 이질적 혼종성들 간 교차·교통의 시간”이 될 것을 주문한다. 문화연구캠프가 갈수록 엄숙해지고 기존 학술행사를 닮아가는 모습이 전규찬에게는 영 마뜩찮은 모양새다.

▲ 영화 ‘싱글맨’ 포스터.
▲ 영화 ‘싱글맨’ 포스터.

퀴어되기 혹은 퀴어하기로서의 캠프는 혼성모방의 창조성과 연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스타일의 과시적 조합과 이로부터 발생하는 예측불가능성이다. 가장 고정불변할 것 같은 성(sex)조차 캠프에서는 자기표현을 위한 도구이다. 성은 정치적이다.

최근 EBS <위대한 수업>에서 ‘사랑의 사회학’을 주제로 강연한 에바 일루즈에 따르면, 로맨스와 가족의 결합은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가 성별 분업에 기초한 무급 가사노동과 유급 가외노동을 잇는 핵가족을 요구했고, 가족은 로맨스로 단단히 접착되었으며, 이로부터 상품의 로맨스화와 로맨스의 상품화가 가능했다. ‘사랑’이 넘치는 가족을 단위로 자본주의 상품의 수요·공급이 예측되었다. 퀴어는 이로부터 한 걸음 빗겨갔다. 이성애를 횡단하고 해체하며 재조합하는 가운데 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법과 제도 바깥에 서며 기존 이성애와 자본주의의 결혼에 의문부호를 붙였다. 퀴어 혐오는 초기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 EBS ‘위대한 수업’ 에바 일루즈-사랑의 사회학 강의 갈무리
▲ EBS ‘위대한 수업’ 에바 일루즈-사랑의 사회학 강의 갈무리

이셔우드와 수잔 손탁이 캠프에 주목한 1960년대 이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퀴어가 제도권으로 들어와 동성결혼이 가능해지기도 했다. 퀴어 퍼레이드는 주요 대도시의 매력적인 관광 상품이다. 반면 기존 이성애 가족은 해체되고, 사랑은 가족 바깥으로 나가 자율화되며, 일루즈에 따른다면 “섹슈얼리티는 번식이 아닌 오락과 즐거움을 목표로 삼는 모습”이 연출되는 중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대량생산·대량소비에서 다품종소량생산으로 질적 변환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어떤 퀴어는 치열한 성정치의 투쟁 덕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돈이 되기 때문에 제도권으로 포섭된다. 그럼에도 성 정체성이 폭로되는 아웃팅이 심각한 물리적·상징적 폭력을 수반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퀴어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시금석이다.

최근 모 국회의원의 스마트폰에 동성애 데이팅 앱이 설치된 모습이 노출되었다. 이를 포착한 넷티즌의 눈썰미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부화뇌동해 진위를 확인하고 국회의원을 추궁하는 일부 언론의 기민함은 경악스럽다. 퀴어되기/퀴어하기는 대다수의 다수자에게는 불안하고 불온하며 불편한 행동주의(activism)다. 캠프가 갖는 진보성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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