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24일 개봉한 군대 배경 코미디 영화 ‘육사오(6/45)’가 3주 넘게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누적 관객 수 183만 명을 모으면서 손익분기점으로 알려진 160만 명도 거뜬하게 넘어섰다. 제작비 50억 원이 채 되지 않는 중저예산 규모의 한국 영화가 약 한 달 동안 극장가 차트 2위를 지키는 일은 결코 흔하지 않기에, 분석해볼 만한 현상이다.

▲ 영화 ‘육사오(6/45)’ 포스터.
▲ 영화 ‘육사오(6/45)’ 포스터.

한국 영화계에서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는 건 대개 제작비 150~300억 원 규모의 상업영화다. 올해로 치면 설 연휴 개봉한 ‘해적: 도깨비 깃발’, 여름 성수기에 공개된 ‘한산: 용의 출현’, 지난 추석 연휴 선보인 ‘공조2: 인터내셔날’ 같은 작품들이다. 이들 작품은 개봉 첫날부터 우리나라 극장 전체 좌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특히 ‘한산: 용의 출현’과 ‘공조2: 인터내셔날’은 전체 253만여 개 좌석의 과반이 넘는 157만 석을 확보했다. 

초장부터 상영관과 좌석을 압도적으로 선점하는 방식을 북미에서는 ‘와이드 릴리즈’라고 부른다. 단어 그대로 가능한 수준에서 가장 많은 스크린을 확보하는 것이다. 물량공세를 통해 짧은 시간 안에 최대한의 매출을 끌어내는 만큼 마케팅 비용을 공격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영화들이 주로 이런 전략을 쓴다. 우리나라에서도 스타 배우가 출연하거나 유명 감독이 연출하는 대작이 주로 이와 같은 방식을 택해왔다. 

다만 이런 전략이 무한정 구현되도록 내버려 두면 극장가는 그저 돈 많은 작품이 독점하는 불공정 시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위 스크린 독과점 논란이 이런 맥락에서 생긴 것이다. 때문에 미국은 전체 스크린 수가 3만 5000여 개 전후를 오감에도 불구하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는 작품이 그 1/6 이상을 넘기지 못하게 한다. 미국인이 그렇게 사랑하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4134개 관)도, 10년간 흥행을 주도한 마블 시리즈의 최고 흥행작 ‘어벤져스: 엔드게임’(4662개 관)도, 톰 크루즈의 역대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탑건: 매버릭’(3113개 관)도 예외는 없었다. 

▲ 사진은 지난 9월12일 서울 한 영화관의 모습. ⓒ 연합뉴스
▲ 사진은 지난 9월12일 서울 한 영화관의 모습. ⓒ 연합뉴스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어떤 규제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예상치 못한 변화가 생겼다. 관객이 극장 영화를 보는 것만큼이나 OTT 시리즈물을 보는 게 재미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최근 영화 관람료까지 오르면서 이 심리는 더욱 굳어지는 모양새다. 제아무리 영화를 홍보해도 관객은 입소문, 평점, 리뷰 등 나름의 준거를 내세워 극장에서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데 더욱 신중을 기하고 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초반 홍보에 힘을 줬던 시즌별 텐트폴 영화가 모두 기대 이하의 성적에 그친 게 그 증명이다. 

이 변화를 기회로 삼을 수 있는 건 상대적으로 체급이 작은 영화들이다. 배우나 감독이 그리 유명하지 않고 마케팅 예산도 적지만, 일단 뜯어보면 작품 경쟁력이 있어 상영 기간을 여유롭게만 확보하면 관객의 입소문을 탈 수 있는 저력 있는 영화들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관객의 호평으로 소규모 스크린을 점차 늘려가는 배급 방식을 북미에서는 이를 ‘리미티드 릴리즈’라고 칭한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북미에서 단 3개 관에서 상영을 시작해 최대 2001개 관까지 규모를 늘리는 방식으로 관객을 오랫동안 만난 게 대표적이다. 

‘육사오’ 역시 이런 방식으로 분류될 수 있는 작품이다. 개봉 첫날 904개 스크린을 확보한 영화는 로또 1등 당첨금을 찾기위해 대동단결하는 남북 병사들간의 아이러니로 관객을 마음껏 웃겨주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점차 상영관을 늘리면서 개봉 열흘 만에 1339개 관까지 그 수를 확장했다. 이달 7일 ‘공조2: 인터내셔날’의 개봉으로 박스오피스 1위 자리는 내어줬지만 그럼에도 800여 개 관을 유지하며 뒷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 흥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이후 영화계가 보게 된, 거의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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