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하워드 그리핀(John Howard Griffin). 백인 기자였던 그는 인종차별 문제를 알리기 위해 흑인과 인터뷰를 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냉소였다. 인종차별 문제를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백인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핀 기자는 1959년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를 여행하기로 하고 중대한 결심을 내린다. 흑인의 모습으로 직접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를 맞닥뜨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핀 기자는 색소 변화를 일으키는 약을 복용하고, 온몸을 검게 칠했다. 그가 흑인으로 변신하고 겪은 ‘체험’은 백인이라고 한다면 절대 겪을 수 없었던 일이었다.

▲ 존 하워드 그리핀 (John Howard Griffin).
▲ 존 하워드 그리핀 (John Howard Griffin).

그가 일상적으로 향하는 시선은 범죄 의도를 가진 흑인의 모습으로 의심받기 일쑤였고 사람들은 실제 두려워했다. 눈앞에 있는 화장실조차 이용할 수 없었다. 흑인 출입금지 화장실이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리 현상에 대한 해결도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할 수 없는 인종차별의 높은 벽은 그가 비로소 흑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만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블랙 라이크 미(Black Like Me)’라는 책을 통해 흑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은 미국 사회를 폭로했다. 그의 책은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기에 충분했다. ‘블랙페이싱(blackfacing)’이라는 수단을 활용해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사회 문제에 균열을 낸 것이다.

그리핀 기자의 취재 방식은 저널리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관찰이나 거리 두기를 통한 객관적 서술에서 벗어나 직접 체험한 것을 드러내 폭로 효과를 극대화했다. 체험에 적극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회 문제 해결에 단초를 제공했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선 직접 상대의 처지가 돼야 한다는 원론이 하나의 저널리즘 영역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우리에게도 그리핀 기자와 같이 체험을 통해 사회 현실을 폭로한 사례가 적지 않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 기자들은 마트 노동자와 식당 노동자로 변했고 그들의 경험담은 ‘노동OTL’ 기획시리즈 보도로 나왔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가 계속 죽어나가자 현장에서 무슨 일어 벌어지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 기자는 2주 동안 조선소 공장 노동자가 됐다. 기자는 어떻게 위험한 일이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에게 넘어가는지 지켜봤다. 직접 노동자와 부대끼면서 하루 일과를 빼꼼히 기록한 결과였다.

한겨레 기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직접 요양원에 취업했다. 한겨레 보도는 요양보호사뿐 아니라 돌봄 가족의 실태까지 드러냄으로써 이번 대선에서 간병 정책을 환시시키기도 했다.

▲ ‘한겨레 권지담 기자, 요양보호사가 되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 ‘한겨레 권지담 기자, 요양보호사가 되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그리핀 기자로 시작해 체험을 통한 사회 현실 고발 보도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는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다루는 우리 언론의 보도 때문이다. 한 정당 대표는 장애인 단체의 시위에 대해 시민 불편을 볼모로 잡았다라고 했다. 그의 주장은 ‘논쟁 당사자’ 발언으로 규정돼 매우 손쉽게 확산됐다. 정당 대표와 장애인 단체 대표의 말은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선상에서 다뤄지고 언론이 의뢰한 여론조사는 이분적으로 장애인 이동권 시위 정당성을 묻는 게 다였다.

오는 20일은 장애인의날이다. 무슨 날을 맞이하면 의무적으로 각종 ‘캘린더 기사’를 쏟아내면서 사회적 약자를 위하는 척 알리바이를 대는 것이 한국 언론의 속성이다. 이번 장애인의날을 맞아 언론 보도는 특별할 것이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다루면서 정당 대표 주장을 끄집어내고 상호 공방 내용으로 또다시 채울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우리 언론이 이 문제만큼은 논쟁 프레임에 부쳐 격한 공방으로만 다루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렸으면 한다. 장애인 이동권 문제 보도에 있어 받아쓰기만 하면 한국 언론은 희망이 없다. 우리는 ‘이준석 마크맨’이 아니라 ‘그리핀 기자’가 필요하다.

▲ 지난 3월17일 서울교통공사의 언론팀 직원이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이어온 장애인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내부 문건이 공개돼 논란이 일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3월18일 오전 서울 성동구 서울교통공사 앞에서 서울교통공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3월17일 서울교통공사의 언론팀 직원이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이어온 장애인 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내부 문건이 공개돼 논란이 일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3월18일 오전 서울 성동구 서울교통공사 앞에서 서울교통공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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