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7월 신문지국 직원의 살인사건으로 촉발됐던 신문전쟁이 일단락 된지는 불과 두달 정도밖에 안됐다. 신문전쟁은 그동안 누적돼 왔던 한국신문의 제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즉 신문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특정 재벌이나 족벌에 의한 신문 소유와 경영, 부당 경쟁 행위의 일상화, 신문지면의 사유물화 등 소유, 경영, 편집 등에 걸쳐 다양한 문제점이
신문에는 상대적 자율성을 부여하고 방송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한 것이 노태우 정부 언론정책의 대강이었다. 전자는 무엇보다도 독점자본에 의한 신문의 소유·통제구조로의 전환의 전조였으며, 후자는 방송매체가 갖는 영향력의 급속한 신장과 관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언론정책의 기조는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도 커다란 변화 없이 관철됐다. 김영삼 정부에 들어서 방송가에
글싣는 순서 - 김영삼정부편1. 신문산업의 구조와 시장경쟁증면을 통해 전개된 무한시장경쟁은 93년 새정부의 출범 이후에도 끝없이 펼쳐질 것만 같이 보였다. 93년 벽두부터 4대 중앙지들이 신년특집호를 무려 80∼96면으로 발행하면서 증면경쟁은 여전히 과열될 조짐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새 정부는 출범 직후 언론분야에도 적극적인 개혁의지를 드러내면서 신문업
1987년이후 신규 신문사들이 대거 탄생하면서 신문시장의 전체 규모는 크게 성장해갔다. 몇 차례의 증면과 광고단가 인상에 힘입어 신문사들의 매출액도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증면경쟁 등 무한시장경쟁이 가속되면서 신문사간에는 [부익부 빈익빈] 양상이 심화되고 매출액 성장도 각 사마다 명암이 크게 엇갈리기 시작했다.먼저 중앙일간지를 중심으로 매출액 성장을 살펴보
88년 서울올림픽 특수와 경기 활성화에 힘입어 광고시장은 제6공화국 동안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한편 광고시장의 전반적인 성장은 때마침 신문발행의 자유에 따라 형성된 시장경쟁체제와 맞물리면서 신문과 TV 매체간의 광고비 성장은 서로 명암이 엇갈리기 시작했고 신문사 사이에도 광고물량을 둘러싸고 무한증면경쟁이 촉발됐다. 88년에 1조2천7백85억원이던 총광고비는
6·29 이후 언론계에 나타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신문들의 무한경쟁이 가속화되고 상업방송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특히 상업방송의 등장은 전두환 정권하에서 누적되어 왔던 이른바 공영방송체제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던 방송민주화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6·29 직후인 1987년 11월에 시행된 새 방송법만 해도 방송위원회의 권한강화 등을 규정하여 공영방
채찍과 당근을 앞세운 전두환 정권의 통제정책에 순종 내지는 적극적인 협조를 하면서 이제 언론사들은 본격적인 기업적 성장을 하게 됐다. 5공화국하에서 언론사들은 통폐합을 통해 독점적 카르텔체제를 구축했고 이런 가운데 세제 혜택을 포함해 정권에 의해 다양한 특혜가 주어지면서 급격하게 사세신장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시설투자의 확대를 통한 다각경영의 실시와 경제
12·12와 5·17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른바 신군부 세력은 유신체제 하에서 이미 순치된 언론을 더욱 확실하게 장악하고 통제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치들을 체계적으로 단행했다. 권력장악 과정 및 대통령 피선 과정의 불법성과 비민주성은 5공화국 정권의 정당성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언론에 대한 통제 및 장악은 그들에게는 절대절명의 요건이
폭압적인 유신체제의 언론탄압과 자유언론실천운동이 극단적으로 대립한 1970년대의 한국 언론은 를 고비로 소위 제도언론 혹은 관제언론의 성격으로 변질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언론산업의 측면에서 신문사와 방송사들은 매출액이 늘어나고 경영상의 안정과 외형적인 기업성장을 이루면서 그 면모도 대기업화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언론의 침묵과 비약적 기업성장은 197
유신정권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74년 12월 16일 무렵부터 동아일보에 대해 전례없는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20일부터는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가 시작돼 다음해인 75년까지 계속됐다. 광고해약 사태로 동아일보는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75년 1월부터 5월 중순까지 격려광고 게재건수가 1만건 가량이나 됐던 것에서도 알 수 있
72년의 이른바 ‘10월 유신’은, 60년대말부터 이미 정권의 탄압에 굴복하기 시작했던 언론들이 완전히 ‘정권의 시녀’가 되는 역사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서도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에 저항하는 기자들의 조직적 활동이 움트기 시작했다. 72년 이전에도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운동이 있었다. 71년 4월 15일에 동아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선언문’을 채택
1960년대 이래로 언론계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은 기자의 위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서막은 총칼을 가진 자들의 엄포로부터 시작됐다. 1961년 11월 방미중이던 박정희는 미국 ‘프레스 클럽’에서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비난했다. 또한 1962년 6월 최고회의 공보담당 강상욱 위원은 “과거 일부 언
1964년의‘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은 결과적으로 정부의 언론통제정책의 큰 가닥을 잡아주었다. 정부는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에 불참한다는 답신을 보낸 언론사들을 각개격파하는 한편, 각종 특혜를 통해 언론사주들을 유인하는 양면작전을 펼쳤다. 비판적인 언론사에 대한 각개격파는 경향신문의 강제 공매처분으로 시작되어 조선일보의 코리아나 호텔 건축에 대한 상업차관 융자로
쿠데타직후 군사정권은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일련의 언론통제를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군사쿠데타가 정당성을 획득하는데 언론의 협조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은 언론사전검열 실시를 비롯해 언론기관 정화, 부패언론인 명단 등을 빌미로 언론고유의 비판보도 기능을 무력화시켰다.1961년 5·16 쿠데타직후 군사정권은 물리적인 힘을 앞세운 일련의 언론통제를 시작
한국일보 창간과 더불어 1950년대 한국신문에는 상업주의적 편집, 문화행사 등의 개최, 증면 경쟁 등 상업주의적 요소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신문들은 기업적 성격을 확고히 하면서 사세 확장을 의도했으나 영세한 자본과 광고, 판매시장의 협소함 때문에 경영면에서는 부진을 면치 못했다.1954년 6월 9일에는 한국 최초로 상업주의를 표방하고 나
8월25일부터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선 우리 나라 신문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한국 100년 신문 100년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회는 신문협회와 프레스센터가 광복 50주년, 독립신문 1백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개최한 행사다. 신문자본연구팀의 관람평을 싣는다. 이번 ‘신문 100년전’은 새로운 사료의 발굴 전시 및 일목요연한 정리, 대중적인 접근
반공지로서의 동아일보는 자유주의 국가 수립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립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동아일보는 친일세력을 우리의 지배세력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데에도 일정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 세력의 제거에도 일조했다.‘탐스러워라! 모단꽃. 이대통령부처와 김구씨 석양의 덕수고궁에서 단란’. 이것은 1949년 5월 21일 동아일보의 이승만·김구 사
일제하에서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 그리고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 그들은 청산됐는가 아니면 다시 살아남았는가? 그들은 새로운 적인 공산주의자들을 발견함으로써 살아 남았다. 친일 행각을 벌인 세력들이 주축이 된 반공주의였다.1945년 8월 해방, 친일세력이 제거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항일세력이었던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제거되어야 하는가?
“반도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김성수 - 43년 11월8일 매일신보).“반도청년의 황국에의 편입은 말할 것도 없고… 도도한 결전생활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보전진해 최후의 승리를 하루바삐 획득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방응모 - 43년 9월 월간지 조광).동아일보의 실질적 사주였던 김성수
당시 민간지 폐간을 주도한 경무국장의 담화내용(매일신보 40.8.11)에 따르면 “신문통제를 결정해 1939년 이후 양사(동아·조선)와 협의하자 조선일보사는 쾌히 시국의 대세를 양해하고 나아가 국책에 순응한다는 태도로 나오고 동아일보와 동시 폐간을 희망하는 허락의 뜻을 나타냈는데…”라고 돼 있어 두 신문사가 순순히 총독부의 뜻에 응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