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청년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는데도 불구하고 왜 학도 전원이 용감하게 지원하지 않는가”(김성수 - 43년 11월8일 매일신보).

“반도청년의 황국에의 편입은 말할 것도 없고… 도도한 결전생활보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일보전진해 최후의 승리를 하루바삐 획득토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방응모 - 43년 9월 월간지 조광).
동아일보의 실질적 사주였던 김성수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가 어느 정도 노골적으로 일제에 협력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다.

이에 앞서 일제는 1938년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조선에 대해 물자공출, 보도통제, 전시선전 강화, 학도병 및 정신대 모집 등 인적·물적·정신적 수탈을 자행했다. 이 기간중 주요 언론인 및 언론사주의 친일행각은 차마 필설로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의 친일활동은 ‘언론보국활동’으로 특징지워진다. 국민총력조선연맹(40. 10 창립), 흥아보국단(41. 8 창립), 임전보국단(41. 10 창립), 언론보국회(41. 11 창립), 사상보국연맹, 조선문인보국회 등 이들은 유력 전쟁협력단체와 친일단체의 간부를 역임하며 천황 만세를 외치고 조선 청년의 징병권유와 조선처녀의 정신대 가입, 전쟁 독려 등을 외치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의 친일 언행은 후세에 공개적인 평가를 받은 적이 없이 숨겨져 왔다.

김성수의 경우 30년대 후반에 오면서 친일행각의 전면에 나선다. 37년 9월 12일 김성수는 시국강연반에 편성돼 강원도 춘천에서 학병지원 권유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38년 6월 22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약칭 정동연맹) 발기인으로 참여, 이사로 활동했다.

정동연맹이 한 일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처녀를 뽑아 보내는 일, 황군에게 보낼 위문품을 수집하는 일, 징용과 징병을 권유하는 일 등이었다. 또한 황국신민의 서약문 보급, 창씨개명 권유, 공출 독려 등의 활동도 포함돼 있었다.

그러다 1940년 10월 17일 정동연맹이 해체되고 국민총력 조선연맹이라는 더 강력하고 거대한 대국민 선전기구가 결성되자 김성수는 동생 김연수와 함께 이 단체의 이사 겸 참사를 맡았으며 총무부 기획위원으로 실무진에 참여하기도 했다. 방응모도 참사로 이 기관에 참여했다.

이어 41년 8월 24일에는 일단의 친일인사들이 조선호텔에 모여 흥아보국단을 조직하자 김성수 형제는 36명의 친일인사와 함께 경기도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조선 민중은 황국정신을 앙양하고 시국인식을 철저히하며 근로보국을 실행해 황은에 보답한다는 것이 이 단체의 강령이었다.

그는 이밖에 수많은 강연과 좌담회, 기고문을 통해 특히 학도병지원을 부추겼다. 보성전문학교장으로서 김성수는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여러 자리에서 ‘조선청년 문약론’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즉 조선청년의 학도병지원이 시원치 않는 것은 조선 청년이 문약하고 큰 기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제자뿐만 아니라 동족의 민족성을 매도했던 것이다.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43. 8. 5),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대의에 죽을 때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43. 11. 6), ‘이때 제군의 출진을 보게된 것은 황국의 일대성사일 뿐만 아니라 2천 5백만의 전도에 대광명을 가져오는 것으로 축복해 마지 않는다’(43. 11), ‘학병지원은 이 시대 최고의 영광… 이 순국의 대도에 돌진함으로써학도의 머리에는 최대의 광영이 기리 빛날 것이다’(43. 12. 10)라는 글을 통해 이를 잘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병지원자를 위한 가두계몽과 원호금 모금활동을 벌이는 학병익찬회의 종로궐기대의 일원으로 가두에 나서기도 했다(44. 2. 26). 일제말 조선과 일본의 거물급 인사로 구성된 전쟁협력단체인 동아연맹의 회장에 장덕수가 앉고, 동생 김연수가 당시 국방헌금액으로 최대규모인 80만원을 헌납했던 일도 김성수와 무관하지 않다.

방응모도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일원으로 동아일보의 배관수 사장과 함께 조선명사 59인 각도 순회강연에 참석, 시국강연을 다녔으며 1939년 5월에는 언론인단체 조선춘추회가 주최하는 배영궐기대회에서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와 함께 ‘천황폐하 및 황군만세’를 선창하기도 했다.

또 방응모는 조선일보 폐간후 월간지 조광의 출판을 직접 담당하면서 김활란·주요한·박흥식·서춘·유광렬 등 친일명사 및 언론인을 동원, 천황찬양과 전쟁협력, 국어(일본어)사용 등 친일매국적인 논조를 계속 펼쳤다. 그 자신도 42년 2월호에는 <타도 동아의 원구자>란 제목의 글을 직접 싣기도 했다.
43년 11월 14일에는 조선문인 보국회 산하 10개 잡지사의 하나인 조광을 통해 <출진학도 격려대회>를 주최했으며 일제말에는 군사령관에게 고사포를 기증하고 비행기 제조회사 조선항공공업회사의 중역이 되기도 했다.

이같은 친일행각에 대해 그들과 후손들은 시대적 불가항력의 결과라고 변명한다. 그러나 수많은 청년들을 일제의 침략전쟁에 내몰고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범한데 대해선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언로’를 쥐고 있는 그들은 이 사실들을 철저히 은폐, 왜곡해 왔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힘’을 가진쪽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 그들에 있어서 역사는 항상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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