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에서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 그리고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 그들은 청산됐는가 아니면 다시 살아남았는가? 그들은 새로운 적인 공산주의자들을 발견함으로써 살아 남았다. 친일 행각을 벌인 세력들이 주축이 된 반공주의였다.

1945년 8월 해방, 친일세력이 제거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항일세력이었던 급진적 민족주의 세력들이 제거되어야 하는가?

친일세력들은 미국이라는 후원자와 공산주의라는 새로운 적을 발견하였다. 일본이 사라진 이상 민족의 적은 친일세력이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면 적과 동지의 구분은 새로워진다. 적과 동지는 더 이상 친일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아니라 공산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이다.

일제하에서 친일행각을 벌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 그리고 조선일보의 사주 방응모 그들은 청산되었는가 아니면 다시 살아남았는가? 그들은 새로운 적인 공산주의자들을 발견함으로써 살아 남았다. 친일행각을 벌인 세력들이 주축이 된 반공주의였다. 친일세력도 반공주의자이면 동지가 되었다. 반면에 독립운동가일지라도 공산주의이거나 또는 그에 동조하는 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자주통일을 지향한 백범 김구. 동아일보는 그를 자기 정권욕에 사로잡혀 소련정책에 굴복한 기회주의자라고 하였다. 단정수립에 대한 반대가 공산주의 계열과 일치한다는 이유 하나로 동아일보는 그를 소련과 북조선을 찬양한 자라고 규정하였다.

과연 백범 김구는 매국도배이고 소련의 앞잡이인가? 미국의 정책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한 한미당의 대변지였던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신문인가, 아니면 미국의 앞장이인가? 일제하에서 지주자본으로서 또는 상업 및 산업자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반일적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 대부분이 친일분자는 아니었다할지라도 독립운동가는 아니었다는 것은 거의 명백하다. 따라서 해방초기 민중들의 가슴을 사로잡았던 것은 토착지주 또는 산업자본가는 아니었다. 토착지주와 산업자본가가 주축이 된 한국민주당은 1945년 9월 16일 보수우익세력을 제외한 정치세력의 집결체였던 ‘건국준비위원회의 타도’와 ‘중경임시정부의 지지’를 선언함과 동시에 김구·이승만 등을 영수로 추대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이미지가 취약하였던 송진우·김성수 등의 보수우익세력은 좌파민족주의 세력에 버금가는 우파 독립운동가를 내세웠지만 이들은 귀국 후 독자노선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이들의 민중적 기반은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한민당의 기관지적 성격을 갖고 있었던 동아일보의 사사는 ‘당시는 좌익지와 중립지들이 인기였으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본보는 부수에서 제4위, 반공지로서는 최대 부수였을 뿐만 아니라 총선거를 주창하는 선봉이기도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동아일보는 단정수립까지 반공세력의 의견을 대변하는 정파지에 불과하였다. 반공을 기치로 내건 동아일보의 새로운 적은 친일세력이 아니라 단연 공산주의자였다. 공산주의자는 반민족중의자인 반면에 한민당을 지지하는 친일세력은 동지였다.

동아일보는 1948년 5월10일 사설에서 “해방 전의 애국자가 해방 후에 정권욕에 사로잡혀 공산파괴분자와 야합한 자도 있을 것이요, 해방 전에는 신통치 않았으나 해방 후에 열열한 독립전사가 된 분도 있을 것이니, 과거보다도 현재는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며 일관한 실천력이 없이 입으로만 애국자연하는 일체의 기회주의자에 특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유제의 미청산, 그러나 반공이념을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고취시킨 동아일보, 해방정국에서 동아일보를 민족지라고 인정한다하더라도 극소우의 우파민족주의의 대변지에 불과하였다. 해방정국에서 동아일보는 민족지였기보다는 반공지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결론이다.

민중적 기반이 취약하였던 김성수와 방응모의 새로운 후원자는 미군정이었다. 미군 진주를 전후한 시기에는 좌익 또는 진보적 민주주의를 표방한 신문들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언론사 시설들의 대부분을 적산으로 몰수한 미군정은 적산의 불하를 통하여 우파 신문을 육성함과 동시에 좌파 및 급진적 민족주의 신문들을 폐간시켜 나감으로써 언론을 재편해 나갔다.

미군정에 협조적인 신문사에게는 보상을 주는 반면에 비협조적인 언론사에는 처벌을 내렸다. 이 점에서 미군정 하에서 살아 남은 언론사는 최소한 미군정에는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1945년 11월 하순에 동아일보는 ‘해방된 강산에 부활된 동아일보 언론진영에 불일간 재진군’이라는 제목으로 된 전단의 말미에 ‘군정 당국의 호의로 경성일보사의 일부 시설을 이용케 되어 방금 준비중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일보 역시 1945년 11월 23일 속간사에서 ‘우리 조선일보는 군정청의 우호적 지지와 이해있는 알선에 의하여 오늘부터 재기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적산이었던 서울신문사의 시설을 이용하여 복간될 수 있었다. 미군정의 좌익신문에 대한 탄압과 우파신문에 대한 지원으로 우파신문은 지배적인 신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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