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래로 언론계에서 일어난 지각변동은 기자의 위상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변화의 서막은 총칼을 가진 자들의 엄포로부터 시작됐다. 1961년 11월 방미중이던 박정희는 미국 ‘프레스 클럽’에서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했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비난했다.

또한 1962년 6월 최고회의 공보담당 강상욱 위원은 “과거 일부 언론의 부패 요인이 기업의 부실에 의한 부정 자금의 반입, 보수 부족에 의한 부정기자의 발호에 있다”고 말했다.

1962년 6월 발표된 군사정부의 언론정책에서도 기본 방침 5개항 중 제2항이 ‘언론인의 품위와 자격’으로 됐을 정도로 군사정부는 언론인의 부패와 자질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당시에 무수히 존재했던 군소언론 내지 사이비언론을 감안할 때 부패 언론인이 존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계속된 문제제기는 무엇보다도 언론을 통제하고 장악하기 위한 꼬투리잡기의 성격이 짙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군사정권의 의도는 <언론윤리위원회법>으로 나타났다. ‘언론윤리위원회법 파동’으로 말미암아 기자 또는 언론인과 사주 사이의 동지적 결합이 깨져가고 있다는 것이 표면에 드러나게 됐다. 전국의 모든 언론인들이 동법에 반대하여 철폐운동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언론사주들은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에 찬성하는 답신을 보냈던 것이다. 기자협회가 생긴 것도 바로 이 때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군사정권은 언론사주와 언론인을 분리통치하게 된다.

언론인은 우선 테러의 대상이 됐다. 1965년경에 이르면 박정권은 취재기자나 제작 직원 등 언론인들에게 무서운 ‘테러’를 가해 언론계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데모 관련 취재를 하던 기자들이 경찰이나 군인에 의해 폭행을 당했다. 기자들에 대한 테러는 1966년에도 계속됐다.

기자들의 위상 변화는 언론계 내부에서도 일어났다. 군사정권의 경제적 특혜에 힘입어 언론사들은 기업화의 길을 걸었다. 한때는 언론이 기업화되자 운영의 합리화를 위해 사원간에 상하 위계질서가 생기고 기자들의 샐러리맨화가 더욱 가속화됐다.

이와 동시에 사주는 인사권 뿐만 아니라 편집권까지도 장악하게 됐다. 그 결과 일종의 내부검열 메커니즘이 생겨나게 된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언론이 기업화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소유와 경영과 편집이 전혀 분리되지 않은 채로 사주의 수중에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론이 기업화되고 기자가 샐러리맨화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기자들의 부패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들의 낮은 임금수준은 그대로 유지됐다. 보수를 받지 못하거나 저임금을 받는 기자는 각종 유혹이나 압력에 빠져서 부패언론인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저임금구조는 언론부패의 구조적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기자협회는 1964년 창립과 함께 무보수기자 일소운동에 나섰으며, 1967년부터는 각 회원사의 급료와 경영실태를 조사한 후 이를 바탕으로 면세점 이상 급료지급과 최저생계비보장을 위한 캠페인을 지속적으로 벌여나갔다.

1965년 11월 30일 문공부가 발표한 전국 무보수기자 현황을 보면 전체 7천9명의 기자 가운데 1천 5백 67명이 무보수기자인 것으로 집계됐다. 1968년도 문공부 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언론인 중에서 면세점 이하의 급료를 받거나 무보수 언론인의 비율이 전체의 22.35%에 이르고 있다.

특히 이것이 문공부의 조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1960년대 후반 언론인들의 보수수준은 더욱 열악했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1969년도 기자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중앙종합일간지 본사 기자의 12.1%(313명), 지방주재기자의 51%(743명)가 면세점이하의 급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면세점이라고 해보아야 월 8천원이었기 때문에 지방기자의 압도적 다수가 사실상 생활급에 미달하는 급료밖에 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지방주재기자의 급료는 대개 지대 또는 광고료에서 공제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에 지대나 광고료의 연체는 그대로 급료 지급의 연체로 이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1969년 11월 2일 동아일보 마산주재 박성원기자의 자살사건은 당시 기자들의 열악한 생활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월급 1만7천원(당시 최저생계비 2만 5천 7백 90원)으로 부인과 4남1녀를 부양하던 박기자는 계속되는 생활고로 가정불화가 잦자 이를 비관해 부인 아들과 함께 음독자살했다.

기자들의 인사 또한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기자협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저널리즘>(1969)은 기자들의 인사가 사규에 의해 엄격히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실시되지 않으며, 인사권이 사실상 경영자 한 사람의 손에 장악되어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경영이 편집을 서슴없이 압도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의 궁극적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경영자가 편집에 종사하는 피고용자를 마음대로 임의 전보할 수 있는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고 지적했으며 경영자의 철저한 인사권장악에도 불구하고 피고용자의 효과적인 자위책은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고 평가했다.

군사정권의 언론통제정책과 언론인에 대한 탄압, 그리고 기자들의 낮은 임금수준과 사주의 인사 전횡 및 편집권 장악 등은 1970년대의 언론노조의 결성과 언론민주화운동이라는 외길 수순을 마련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