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동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이 특정 방송 사업자와 부적절한 술자리를 갖고 "정권을 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 새로 그려야 된다"는 등 방송의 정치적 독립과 중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발언을 한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예상된다. 방송정책·행정 주무기관인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차관급)으로서 정치적 독립과 중립, 공적 책무 등을 떠올릴 때 자질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강동순-유승민 녹취록  
 
이 같은 내용은 CBS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국가정보 유출 의혹'과 관련해 방송위에 제출한 녹취록 가운데 일부에서 드러났다. 이 녹취록은 검찰도 지난 1월 압수해 수사자료로 삼은 것이다. 이 녹취록은 신현덕 전 경인TV 대표가 지난해 11월9일 강동순 상임위원 등과 가진 술자리의 대화 내용을 직접 녹음한 것으로 A4 분량 68쪽에 해당한다.

미디어오늘이 5일 입수한 이 녹취록에는 한나라당 몫으로 추천된 강동순 위원이 지난해 11월9일 서울 여의도 일식집 '유메'에서 신현덕 전 경인TV 대표, 한나라당 유승민 의원, KBS 현직 간부와 프로덕션 사장 등 KBS 전·현직 인사들과 술자리를 갖고 나눈 대화들이 기록돼 있다.

녹취록에 따르면 이날 강 위원은 유승민 의원을 향해 "뵙기 어려운 분이니까 말씀을 드려야겠다"고 운을 뗀 뒤 "당에서 방송에 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강 위원 "당에서 해달라면 우리도 받아서 해야하고, 당도 지원해줘야" 발언

강 위원은 이어 "정기적으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 "조찬을 하더라도 서로 만나서, 당에서도 해달라고 하면 우리도 그걸 받아서 해야 하고, 우리 애로점이 있으면 당에서 이해도 해주시고 지원도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나라당과 한나라당 추천몫 방송위원의 공고한 유대 관계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방송법 제26조 '위원의 직무상 독립과 신분보장' 조항에서 '위원은 임기중 직무상 어떠한 지시나 간섭도 받지 않는다'는 조항을 무시한 발언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또 강 위원은 김명철 조미평화센터 소장의 KBS 라디오 인터뷰 건을 예로 들며 "방송이 아직도 영향력이 막강하다. 방송위원들도 전육 위원이나 제가 노력을 하는데 모니터 그룹이 없다. 우익 시민단체에 모니터하는 팀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 위원이 말한 인터뷰 건은 지난해 11월16일 방송위원회 산하 보도교양심의위원회에서 김명철 조미평화센터 소장의 인터뷰를 보도한 KBS 라디오 '안녕하십니까 이몽룡입니다'에 대해 '문제없음'을 최종 결정한 것을 지칭한다.

강 위원은 이와 관련 "(방송위에) 보도교양심의위원회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 (인터뷰 건을) 두번 다 무혐의 처리를 했다"며 "우익 시민단체에서 시위를 해야 된다. 좌파들의 끈기 있는 투쟁을 우리가 해야 된다. 목동 방송회관에 와서 '이렇게 하려면 방송위 문 닫아라' 하고 시위를 해줘야 한다. 그러면 조선, 동아에서 기사화한다"고 말했다.

강 위원은 특히 "이제 우리가 정권을 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다 새로 그려야 된다"고 말하는 등 방송위원으로서 매우 부적절한 방송관을 드러냈다. 방송위원은 선임 과정에서 정파적 균형이 반영되지만 직무수행에 있어서는 추천권자와 무관하게 양심과 전문성에 따라 독립적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정면으로 위반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내년 대선 때 KBS 노조가 제대로 들어서면 정연주 견제"

뿐만 아니라 KBS 감사 출신인 강 위원이 KBS 노조에 대해 언급한 발언에서도 방송을 통해 대선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인식을 드러냈다. 강 위원은 "노조가 막강하다. 내년 대선 때 노조가 제대로 들어서면 반은 정연주(KBS 사장)를 견제할 수 있다"며 "지금 KBS 노조가 매우 중요하다. 국회의원 몇 분 당선되는 것보다 KBS 노조가. 걔네들은 쌍권총이다. 채널이 두개고 그러면 뉴스가 두개"라고 말했다.

   
  ▲ 강동순 방송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신현덕 전 경인TV 공동대표 등이 지난해 11월9일 모임을 가진 서울 여의도의 식당 모습. ⓒ미디어오늘  
 
한편 이날 술자리의 성격과 참여자 면면을 볼 때 술자리 자체에 대한 논란도 불거질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술자리에 참석해 대화 내용을 녹음한 신 전 대표는 당시 허가추천 문제로 사회적 이슈가 된 경인TV의 공동대표를 맡았고 최대주주인 백성학 영안모자 회장의 스파이 의혹을 터뜨린 장본인이다. 방송정책의 전권을 행사하는 방송위원이 특정 방송 사업자 등과  민감한 시기에 만나 관련 정보와 내용을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상식과 원칙에 벗어났다는 지적이다. 

강 위원 "사적 의견과 공적 행위는 구분해야"

강 위원은 5일 오후 미디어오늘과의 통화에서 문제의 녹취록을 봤고, 당시 자신의 발언에 대해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사적인 의견과 공적 행위는 구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당시 술자리는 후배들과의 사적인 모임"이었다며 "신현덕 전 대표도 고등학교(경복고) 후배"라고 밝혔다.

강 위원은 "녹취록에 나오는 발언 내용이 방송위원으로서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한 게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일리가 있다"면서도 "전체적 맥락을 봐야 한다. 야당도 문제의식을 갖고 잘못된 방송 보도에 대해서는 문제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야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강 위원은 이어 "사적인 의견으로서 야당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과 방송위원으로 중립성을 갖고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별개여야 한다"며 "공인으로서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의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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