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친척댁에 갔다. 그간 이모에게는 기별만 겨우 건너 전하던 터였다. 봉오리 맺힌 이야기가 활짝 펴 한참 화기애애했다. 그참에 “미디어오늘에 고정 칼럼을 쓰게 됐다”고 넌지시 뽐냈다. 이모는 속삭이는 자랑을 크게 맞받아쳤다.

“오, 김 기자! 드디어 서울로 진출하는거야?”

나는 일단 짐짓 반달눈을 지었다. 그러고는 “하하, 그렇게 됐네요”라고 답했던가.

며칠 뒤 회사 선배 차를 얻어타고 가던 중이었다. 약간은 깔깔대며 이 일화를 말해줬다. 선배는 저의를 알아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얼추 20년 된 이야기가 봉인 해제됐다. 요컨대 마지막 말은 이랬다.

“서울 파견가서 청와대 출입할 때는 ‘오~’라며 인정해주더군. 하하하!”

검은 밤을 가르는 적막한 차 안, 서로 별 말 없이 깔깔 웃었다. 이심전심이었으리라.

지역신문 기자라면 한번쯤, 아니 열 번도 넘게 들었을 아리송한 칭찬류가 있다.

“지방에 있으실 분이 아니신데요.”, “더 큰 물에서 노셔야죠.”, “지방에도 이렇게 훌륭한 기자가….”

이런 말을 듣는 지역신문 기자는 불편한 마음을 애써 삼킨다. 상대는 호의로 한 말이겠지만 그 밑바닥에는 두가지 생각이 깔려 있다. 첫째는 서울이 중앙이고, 지역은 변방이라는 인식이고 둘째는 지역신문을 불신하는 마음이다. 두 전제와 “지방에 있을 분이 아니신데요”라는 말 사이에는 ‘당신도 서울에서 일하고 싶으실 테죠’라는 추측이 끼어있다. 한마디로, 서울에 진출하지 못해서 지역신문으로 ‘일보후퇴’한 것이라 넘겨짚는 것이다.

▲ 기사 작성, 취재. 사진=gettyimagesbank
▲ 기사 작성, 취재. 사진=gettyimagesbank

지역신문 기자는 서울을 꿈꾸는가? 언론계도 온갖 인간 군상이 망라된 곳인지라, 사람마다 다르다고 싱겁게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MSG를 좀 첨가해서 지역신문 기자의 성향을 오직 세 부류로 나눠본다. 첫 번째 유형은 ‘지역사랑형’이다. 두 번째는 ‘노다지 추구형’, 세 번째는 ‘일보후퇴형’이다.

지역사랑형은 대개 본인이 나고자란 곳의 지역신문에 일하고, 지역 대소사에 빠삭하며 또 지역에 애정이 깊다. 이들은 이른바 ‘지역밀착형 기사’를 동경하며 ‘이야기’를 사랑한다. 지리적으로 한정된 범위에서 좀 더 지역 이야기를 깊고 세심하게 들여다볼 줄 아는 능력이 특출나다. 또 서울지에서는 자주 보기 어려운 사람 냄새 풀풀 나는 기사를 곧잘 쓴다. 예를 들어 서울지가 정부 정책을 논하고 한국경제가 나아갈 길과 같은 거대담론을 논할 때, 이들은 동네 사람을 찾아간다. 동네사람의 이야기를 길어 올려서 비로소 큰 이야기로 나아간다. 이를테면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다룰 때 이들은 해녀를 찾아간다. 남석형 경남도민일보 기자가 그랬다.

‘해녀들은 바닷속이 곧 삶의 터전이다. 이들은 물과 살을 맞대고, 또 원치 않게 마셔야 한다.’

지난 9월14일 1면에 보도된 ‘위태로운 숨비소리’라는 기사 머리말이다. 남 기자는 거제로 달려가 평생을 바닷물과 함께해온 해녀들의 삶을 엿보고, 생생한 목소리를 기사에 담았다.

“해녀들은 들숨날숨하다 보면 바닷물을 마시게 돼 있어. 그게 하루이틀도 아니고 작업할 때마다 누적되는 거잖아. 일본에서 방류한 물이 언젠가는 여기로 올 건데, 진짜 그런 걸 생각하면 겁나지. 해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걱정을 많이 해.”

▲ 9월14일 경남도민일보 1면 갈무리
▲ 9월14일 경남도민일보 1면 갈무리

[관련기사 : 경남도민일보) ‘위태로운 숨비소리’ 경남 해녀들 원전 오염수 목소리 낸다]

노다지 추구형은 서울에서의 속보 경쟁에 치이기보다는 지역에서 자신만의 기사를 쓰기를 택한 이들이다. 지역사랑형과 결과물만 놓고 보면 교집합이 있지만 직업적 동기는 차이가 있다. 지역사랑형은 지역과 지역민에 대한 애정이 가장 큰 동기라면 노다지 추구형은 기획·발굴 기사를 꾸준히 쓰면서 고유의 영역을 만들어간다. 또 ‘나’라는 기자의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데서 주로 보람을 찾는다. 지역신문은 보통 경쟁사라고 할만한 곳이 서울만큼 많지 않아서 스트레이트형 기사 속보 경쟁이 덜하다. 또 지역신문사 안에서는 늘 인력이 부족해서 비교적 저연차에도 기획·발굴 기사를 써야할 일이 많다. 이런 환경을 슬기롭게 잘 활용하는 ‘노다지 추구형’ 기자들이 곳곳에 있다.

26일 자 강원도민일보 17면 ‘폐광이 폐업으로… 문 닫는 탄광에 존폐기로 선 연탄공장’ 기사는 훌륭한 사례다. 탄광에서 무연탄을 공급받아 연탄을 생산하는 연탄공장이, 폐광 계획에 따라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기사는 ‘다시쓰는 폐광지역 리포트’라는 이름의 기획으로 올해 1월 11일 연재를 시작해서 26일 31회를 맞았다. 이 연재를 쓰는 김정호 기자는 재작년 4월에 입사한 3년차 기자라고 한다. 지역신문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김정호 기자처럼 연차가 높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영역을 찾아서 꾸준히 능력을 펼쳐나갈 기회가 있다. 물론 저연차 기자에게 성장할 기회를 충분히 주는 강원도민일보의 저력은 더 말하지 않아도 되겠다.

▲ 10월26일 강원도민일보 갈무리
▲ 10월26일 강원도민일보 갈무리

[관련 기사 : 강원도민일보) 폐광이 폐업으로… 문 닫는 탄광에 존폐기로 선 연탄공장]

마지막, 일보후퇴형은 사직서를 품고 있다. 소위 말하는 ‘중앙지’에 가고 싶지만, 모종의 이유로 일단 지역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한다. 지역신문 경력을 발판 삼아 서울로 가겠다는 ‘빅플랜’을 갖고 있다. 의도야 어떻든 대개 이들은 기자 커리어를 쌓고자 열심히 일한다. 지역신문사는 기자로서의 떡잎이 보이면서도 일보후퇴형이 아닌 사람을 뽑고자 부단히 애를 쓴다.

다수의 사람들이 지역신문 기자는‘일보후퇴형’일 거라고 여기겠지만, 그렇지 않다. 지역사랑형이든 노다지 추구형이든 저마다의 신념을 품고 현장을 누비는 기자들이 도처에 있다.

누군가는 ‘지역신문은 끝났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조금만 지역신문에 관심을 가져본다면 반짝이는 기사를 금세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야심한 밤에 편집국 책상에 앉아서 기사를 타닥타닥 작성하고 있는 동료 기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