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방송사들이 파견·기간제 비정규직 계약서에 원청 방송사의 ‘갑질’ 조항을 여러 건 포함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자가 일하다 다치거나 손해가 발생할 때 책임을 전적으로 파견업체와 노동자에 지웠고, 코로나19 사태 와중에 건강상 이유로 한 계약해지를 정당화하는 조항도 있었다. 이 가운데 파견·기간제 노동자 다수가 정규직과 같거나 비슷한 업무를 한다고 밝혀 불법파견 여지 또는 비정규직 남용에도 지적이 제기된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실이 고용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보고서를 보면, 유니온센터는 지난해 KBS와 SBS의 비정규직 채용을 위한 계약서에 나타나는 특성을 고용 형태별로 분석했다. MBC는 노동부에 자료를 제출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지상파3사 사옥과 로고
▲지상파3사 사옥과 로고

“일체의 고용관계 주장 불가” 적은 KBS


KBS가 파견회사와 맺는 ‘근로자 파견계약서’를 보면, 노동자와 파견회사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계약서는 13조(고용관계 및 책임)에서 “공사에 배치된 파견사의 인원은 공사의 근무 장소에서 근무했음을 이유로 공사에 대해 고용관계를 전제로 한 일체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으며, 파견사는 공사에 파견시킨 근로자가 공사와 고용관계가 없음을 확인한다”고 했다.

파견노동자가 방송사를 상대로 노동자로서 법적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유니온센터는 이에 “고용관계는 실질적인 관계로, 불법파견이나 KBS의 부당노동행위 등 사안에 따라 노동자가 고용관계를 전제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음에도 이같이 밝히는 것은 과도한 조건”이라고 했다.

▲지난해 기준 KBS 근로자 파견계약서. A사는 KBS다.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지난해 기준 KBS 근로자 파견계약서. A사는 KBS다.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산재와 손해에 일체의 책임 안 져” 안전 의무 회피, 파견법 악용 지적


KBS는 일하다 손해가 발생할 경우에도 모든 책임을 파견사와 파견노동자가 지도록 명시했다. 계약서 21조(손해배상 책임)를 보면, 2항과 3항에 각각 △파견노동자가 근무수칙을 위반하거나 △파견노동자가 업무수행과 관련해 제3자에게 손실이나 손해를 입힐 때 파견사가 배상책임을 지고 KBS는 일체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파견노동자가 KBS에서 일하다 상해, 질병, 사망 등 사고를 입는 경우에도 KBS는 “파견사는 산재 업무의 처리는 물론 관련 손해배상의 직접부담 책임을 지며 공사에 관련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고 적시했다(4항).

▲지난해 기준 KBS 근로자 파견계약서.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지난해 기준 KBS 근로자 파견계약서.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이는 근로현장 책임자이자 원청기업인 방송사가 법적인 안전 배려 의무를 위배한 ‘갑질’ 조항이라는 지적이다. 김유경 돌꽃 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원청이 원청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노동자를 보호하고 안전을 배려할 의무가 있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기본적인 산재 관련 책임을 파견사업주가 진다고 하더라도 달라지지 않는 사실”이라며 “그럼에도 KBS는 계약서에 노동자가 KBS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했다.

파견법은 산업안전과 관련된 기본 사항을 원칙적으로 파견업체가 책임 지도록 했지만, 대법원 등 판례는 원청 기업의 안전배려 보호 의무와 추가 손해배상 의무를 인정하고 있다. 김 노무사는 “기업들이 근로자 파견계약을 하면서 (파견업체와 원청, 노동자라는) 3자 사용자 관계로 책임을 회피하는 문제가 항상 발생했고, 이것이 파견법의 근본 문제로 지적돼 왔다. KBS는 파견법의 이 같은 허점을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방송사 부조정실.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방송사 부조정실.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한편 SBS는 기간제 노동자와의 근로계약서에서 계약해지 조건 가운데 하나로 “근로자가 폐질, 불구, 질병, 기타의 사유로 본 계약상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를 명시했다. 유니온센터는 해당 조항에 “코로나19와 같은 감염병 등 재난안전 사유 발생 시 계약해지로부터 예외로 두거나 보호하는 등의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기준 지상파 3사 내 파견직 노동자는 300명으로, 전체 노동자(비정규직과 프리랜서 포함)의 11.1%를 차지했다. 이 중 KBS가 206명으로 가장 많은 파견노동자를 채용하고 있었다. 파견 노동자는 AD와 FD 등 연출지원(133명), 촬영(69명), 보도지원(44명), 뉴미디어(13명), 제작기술(12명) 등 직무에서 일했다. 기간제의 경우 총 197명(전체의 7.3%)으로, 보도지원, 연출지원, 기타 경영지원, 뉴미디어, 편집 등에서 일했다.

“정규직과 유사한 일, 임금 더 낮아”…“기간제·파견법 우회” 지적


파견·기간제 비정규직 당사자들은 자신이 정규직 동료와 같거나 비슷한 업무를 함께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용역연구에서 KBS, MBC, SBS 서울 본사에서 일하는 파견직과 기간제 노동자를 대상으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다.

응답한 167명의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 가운데 ‘정규직과 함께 일하고 동일·유사한 업무를 수행한다’고 답한 비율이 64.7%(108명)에 달했다.

직군 별로 보면 뉴미디어와 뉴스PD에 종사하는 응답자는 모두 ‘정규직과 같은 현장에서 동일한 업무를 한다’고 밝혔다. CG와 방송PD는 모두 동일하거나 유사한 업무를 수행한다고 답했고, 촬영보조와 그래픽, 음향·음악, FD, AD, 기타 제작지원, 인제스트 직군의 경우 과반이 이같이 답했다.

▲KBS 뉴스제작 프로그램에서 부조정실 업무에 참여하는 인력 구성표(지난해 10~11월 기준).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인포그래픽=이우림 기자
▲KBS 뉴스제작 프로그램에서 부조정실 업무에 참여하는 인력 구성표(지난해 10~11월 기준). 자료=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인포그래픽=이우림 기자

방송사 기간제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다수가 정규직과 함께 근무하며 동일·유사 업무를 한다고 답했다. 응답자(41명)의 65.8%다. 직군으로는 재무회계와 기타 경영지원, 방송PD, 자료조사(취재작가), 그래픽, CG, 편집, 음향·음악, 제보접수, 방송광고 업무 등 직무 순으로 이 같은 답변 비율이 높았다. 지난해 3월 조사에 따르면 지상파 3사에서 기간제로 일하는 노동자는 197명이다.

이들 대다수가 임금 차별을 겪는다고 답했다. 동일·유사 업무를 수행한다고 밝힌 총 108명의 파견직 노동자 중 78.8%가 정규직보다 낮은 임금을 받는다고 답했다. 기간제 노동자 응답자의 92.9%도 정규직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는다고 했다.

자신이 맡은 직무가 2년 이상 지속되는 업무라는 응답자는 파견노동자의 56.9% 기간제 노동자의 73.2%에 이르렀다. 방송사들이 방송제작 등 상시지속 업무에 비정규직을 남용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파견법과 기간제법은 기업이 상시 지속 업무에서 비정규직을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파견 또는 기간제 노동자를 2년 이상 사용할 수 없도록 기간을 제한하고 있다.

강은미 의원은 “대형 방송사들이 프리랜서뿐 아니라 파견직, 기간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무에 비정규직을 광범위하게 사용해 방송사를 운영하고 있다. 파견과 계약직 노동자들에 상시지속 업무를 시키면서도 정규직보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하도록 했을 가능성이 구체적으로 확인됐다”며 “방송통신위원회와 고용노동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유관 부처가 적극 관리 감독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