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가 파견 비정규직 문제를 다루며 ‘불법파견’을 주로 다뤄온 데 비해, 간접고용을 용인하는 ‘파견법’이 그 자체로 불안정 노동을 양산한다는 실태조사 결과가 나왔다.

전국의 사무직 파견노동 실태를 최초로 조사한 결과 발표회가 25일 서울 정동 사무금융노동조합 회의실에서 열렸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와 4.9통일평화재단이 행사를 주최했다. 이들은 210명의 사무직 파견노동자를 상대로 설문과 면접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사무직은 상시 파견노동 직종 가운데 3분의1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엄진령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집행위원은 조사 결과를 요약하며 “파견 노동자의 업무 내용은 정규직과 맞물리지만 권리를 보장할 책임 구조는 복잡하게 얽혀, 노동자들이 무권리 상태에 내몰린다”고 말했다. 엄진령 집행위원은 “그러나 규모가 작다는 점과 무엇보다 합법이라는 배경이 이 노동자들의 고용 상태를 제대로 비추지 못하도록 한다”고 했다.

엄진령 집행위원은 “파견 노동자들은 일터 안 관계, 임금·복지, 경력이 되지 않는 업무배치까지, 고용형태로 인한 한계를 계속 마주한다”고 했다. 우선 시간외 근무를 하면서도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조사 응답자 가운데 50.5%가 주당 법정노동시간인 40시간을 넘겨 일했는데, 이 중 급여가 최저임금 미달인 노동자가 7.9%였다. 사용업체(원청)가 추가노동을 지시하지만 파견업체가 수당 책임을 지는 구조 탓이다. 엄 집행위원은 “노동자는 업무량이 그대론데 ‘일 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거나 공짜노동에 내몰린다”고 했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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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직 파견 노동자들은 절반이 200만원 안 되는 월급을 받는 등 저임금 구조에 놓였다. 응답자의 46.2%가 200만원을 밑도는 급여를 받는다고 답했고, 이 가운데 4명 중 1명꼴로 최저임금에 못 미쳤다(11%포인트). 간접고용 구조는 여기에도 작용한다. 사용업체가 ‘보조업무’란 이유로 직속 노동자의 경우보다 낮은 임금을 책정하는데, 파견업체는 여기에서 다시 수수료를 떼 간다. 지난해 통계청 자료에 기반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파견직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62.7% 수준이다.

사무직 파견 노동자들은 고용불안에도 시달린다. 응답자의 67%가 자신이 정규직 전환이 불가능하거나 안 될 가능성이 크다고 답변했다. 이들은 파견으로 가장 힘든 점에 전망 없는 생활의 반복(25.2%)과 고용 불안감(24.3%)을 가장 많이 꼽았다. 복지와 처우 면에서도 열악한 환경에 놓였는데, 휴가가 있지만 사용하기 어렵다는 답변은 38.6%, 휴가 자체가 없다는 답변은 15.7%에 달했다.

한 응답자는 면접 조사에서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을 봐도 계약직 전환도 거의 안 된다더라. 검토된다고 해도, 또 2년 동안 더 신경 쓰고 심적 스트레스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면접자는 “지금 다른 일을 준비하고는 있지만, 이 직업을 유지하면 파견 혹은 프리랜서 사업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이는 “월급이 적더라도 (고용이) 쭉 가면 아끼면서 해 보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돈을 마음대로 쓰기 힘들다. 계약이 끝난 뒤에, 그 때 쓸 것을 생각해야 하니까”라고 했다.

고용안정과 임금, 복지, 업무 주도권 등에서 모두 취약한 ‘철저한 을’이다 보니 업무 안팎 차별도 일상적으로 겪었다. 응답자 대다수가 업무 능력을 무시당한 적 있고(70.5%), 힘들거나 귀찮은 일을 떠맡으며(76.2%), 일을 잘 해도 성과를 인정받지 못하고(61.4%), 회사 공식 소통망에서 빠져 있다(57.7%)고 밝혔다.

엄진령 집행위원은 “파견에선 고용과 사용이 분리돼 노동자가 일하면서 발생하는 고충을 해결할 통로를 찾기 어렵다. 파견업체는 고용주라지만 파견계약 뒤 거의 역할이 없고, 사용업체 내 문제 해결 능력이 없거나 회피한다”며 “직접고용이라면 쉽게 해결될 문제도 파견노동자에게는 해결이 불가능해지는 이유”라고 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파견업체를 통한 일자리에 들어서는 배경은 뭘까. 응답자 3분의 1이 파견업체를 통한 취업에서 만족하는 부분으로 ‘빠른 취업과 재취업’을 꼽았다(29.5%). 선택 가능한 여러 회사 소개, 원하는 조건에 맞는 일자리 소개, 만족하는 점 없음 등이 뒤를 이었다. 파견업체는 안정적 직장을 구할 가능성이 극히 낮은 환경에서 당장의 일자리를 위해 택하는 수단인 셈이다.

▲한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했던 방송사 주조정실 모습. 그는 인력파견업체 소속으로 4년, 사내 계약직으로 2년 일하다 계약이 끝나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법적 싸움을 시작했다.
▲한 방송계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했던 방송사 주조정실 모습. 그는 인력파견업체 소속으로 4년, 사내 계약직으로 2년 일하다 계약이 끝나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법적 싸움을 시작했다.

엄 집행위원은 이어 “합법이란 명목 아래 노동자는 권리를 빼앗기고, 보장을 요구하기도 어려운 구조가 이어진다”며 “파견법 폐기는 무권리 노동자를 남겨두지 않기 위해, 또 유사한 무권리 노동의 양산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엄 위원은 정부가 비정규직 고용 규제뿐 아니라 고용에 대한 공적 책임을 다시 확립해, 노동권 교육과 직업탐색 기회 제공, 기업과 사회가 이를 책임지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도 했다.

토론자로 나선 진재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은 방송사들도 다양한 직종에 파견노동자를 쓰지만 실태조사는 이뤄진 적이 없다고 짚었다. 방송사 내에 주조정실 MD, 연출팀 FD, 보도국 번역업무, 방재실, 중계차 기술지원 등이 파견 직종으로 알려져 있다. 진 국장은 “주조정식 MD와 같이 방송에 핵심적인 업무임에도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정규직들이 기피해 외주화한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진 국장은 이어 “현장에선 사측이 노동자에게 입맛에 맞게 계약형태를 바꾸도록 요구해 노동자들이 이들 계약형태를 넘나들며 일하는 경우가 많다. 파견, 도급, 위탁, 프리랜서 모두 방송사가 고용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택하는 길”이라며 “‘파견법’으로 인한 합법파견을 시작으로 간접고용이 합리화된다는 점에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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