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문 대주주가 호반그룹으로 바뀌면서 지방자치단체들의 언론사 우회 지원 관행으로 알려진 이른바 ‘계도지 시장’에도 변화 조짐이 일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미 지난달 서울 각 자치구에 예산 배정을 요청하는 공문과 함께 ‘계도지’ 별지를 정기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관언유착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계도지 관행에 대한 지적도 재차 나온다.

조선일보는 지난해 11~12월 서울시 내 각 자치구에 공문을 보내고 “서울 섹션”을 발행할 예정이라며 계도지 예산 배정을 요청했다. 조선일보 CS본부장은 해당 공문에서 “서울시 자치구 구정 홍보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2021년 말부터 조선일보 서울 섹션을 발행할 예정”이라며 “귀 구 관내의 압도적인 구독률 1위 신문으로 서울 섹션 창간을 맞아 ‘통장 등 주민 홍보용 일간 신문’ 본보 배정을 요청드리오니 적극적인 검토를 부탁 드린다”고 밝혔다.

서울지역 내 독자들에게 본보에 끼워 발행하는 자치구 소식용 별지를 발행할 테니 각 자치구의 ‘계도지 예산’을 배정해달라는 것. 조선일보는 지난해 11월22일부터 격주 월요일마다 ‘서울 길라잡이’라는 이름의 4면짜리 별지를 끼워 발행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해당 별지를 각 자치구에 50~100부씩 시안으로 배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1월22일 조선일보가 서울지역 내 별지(간지)로 첫 발행한 ‘서울길라잡이’
▲지난해 11월22일 조선일보가 서울지역 내 별지(간지)로 첫 발행한 ‘서울길라잡이’

공문에 따르면 조선일보는 각 자치구에 섹션 내용으로 △발행 주에 이슈가 되는 지자체 정보(공동기획/취재) △인물 정보(구청장 인터뷰) △구정 소식 (각종 문화, 생활 정보 등)을 비롯해 구청이 게재를 요구하는 내용도 게재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서울 지역에 약 40만부를 발행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조선일보는 “본보는 서울시 내 압도적인 개인독자 배달부수를 자랑한다”며 “앞으로 발행할 서울 섹션은 자치구의 훌륭한 홍보 채널로 가장 많은 주민에 정보가 도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밖에도 본보는 TV조선이라는 1위 종편 채널 뿐만 아니라 다양한 뉴미디어(네이버, 유튜브)에서 활약하고 있기에 연계된 많은 홍보 사업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홍보했다.

계도지는 박정희 정권이 1970년대부터 정부에 유리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통·반장 등에게 나눠주던 신문이다. ‘권언유착’ 대표 사례로 지적받아 왔지만 현재도 각 지방자치단체에 ‘주민 홍보지’, ‘주민 구독용 신문’이란 이름 아래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25개 자치구는 해마다 100억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특별한 명분 없이 신문을 구매해 통반장에게 지급하고 있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이들 자치구의 계도지 구독 배정 현황은 월 최소 896부(종로구)에서 최대 1953부(강남구)에 이른다.

▲2019년 서울 25개 자치구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연간 계도지 예산 자료 그래픽. 25개 자치구에서 연간 1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신문을 구입해 통반장에게 지급했다. 디자인=이우림 기자
▲2019년 서울 25개 자치구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연간 계도지 예산 자료 그래픽. 25개 자치구에서 연간 100억 원 이상의 예산을 들여 신문을 구입해 통반장에게 지급했다. 디자인=이우림 기자

[ 관련 기사 : 서울시 예산 100억 원 잡아먹는 ‘계도지’를 아십니까 ]

서울시 내 지자체는 서울신문·문화일보·내일신문 등 지자체 소식 지면이 있는 중앙일간지를 구독해 통반장에게 지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울신문은 이른바 계도지 예산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해 다른 일간지에 비해 대략 10배 가량이다. 박정희 정권 당시 대표적인 시책 홍보 역할을 하던 관행이 잔재로 남아 있는 영향이다. 사실상 정부가 서울신문을 소유했다는 점도 이른바 계도지 시장 내 서울신문의 독보적 위상에 영향을 줬다.

그러나 호반건설이 지난 2019~2021년에 걸쳐 의결권 기준 서울신문 지분의 과반을 차지하고 정부 지분(기획재정부·KBS)은 후순위로 밀리면서 사실상 민간기업이 된 상황에서 현 계도지에서 서울신문 위상에 명분이 없어진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조선일보도 서울신문의 지분 구조가 ‘계도지 시장’에 미칠 여파를 고려해 계도지 발행 움직임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일보가 연말연초 자치구를 상대로 어필에 나선 건 올해 6월 지방선거 결과 판이 변할 것을 예상한 움직임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 일간지의 독자국 관계자는 “현재는 서울시 자치구 25곳 가운데 24곳 구청장이 민주당 소속이지만 올해는 보수 정당의 구청장 당선이 늘 것이라는 판단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지방선거로 판이 바뀌면 계도지 예산을 통한 수익을 꾀할 공간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소영 바른지역언론연대 사무국장은 “계도지는 지자체가 국민 세금을 들여 명확한 기준 없이 입맛대로 특정 언론사에 혜택을 몰아주는 언론 길들이기의 대표 사례다. 전국에서 ‘계도지’란 이름의 관행이 남아있는 지역은 서울과 강원뿐”이라고 지적했다. 모 국장은 “더구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언론사인 조선일보까지 서울 지역에서 세금 독식에 나서겠다니 더 문제”라며 “지역민의 시민의식과 구정 감시 강화로 계도지 근절을 앞당겨야 한다. 언론사의 자성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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