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극우 민족주의자의 테러를 계기로 그리고 아마도 테러범의 주장 가운데 한국이 언급되었다는 이유로, 보수 언론이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 포용과 관용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역설하고 있다.

만약 보수언론의 주장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보수주의와 가부장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같은 것을 헤집는 것이라면 경청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보수언론이 이야기하는 ‘다문화주의’ ‘관용’ ‘포용’ 같은 주장은 다분히 위선적이다.

다문화주의의 반대편에는 외국인 혐오증이 있다. 노르웨이의 테러범은 집권노동당의 이민정책에 대한 반감이 컸다고 한다. 우리 사회의 외국인 혐오증 역시 테러범의 인종주의적 편견과 그 뿌리가 다르지 않다.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 보내는 혐오와 백인 영어 강사에게 보내는 선망의 눈초리가 공존하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극우적이다.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 특히 제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보수언론의 다문화주의는 단순히 ‘불쌍한 사람들을 우리가 포용해줘야 한다’는 식이다. ‘혐오하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자’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비인간적 단속에, 강제추방에, 그 과정에서의 인권침해에 눈감는 보수언론의 ‘다문화주의’는 그래서 위선적이다. 자식 패는 아버지가 가족은 화목한 게 제일이라고 말할 때는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 진실에 가까운 법이다.

게다가 ‘다문화주의’는 사실 자본의 이익과 맞아 떨어진다. 제3세계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한 것 자체가 저임금 생산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한국자본주의의 요구에 의한 것이다. 아울러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정치적 권리는 저임금 노동력을 통제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2등 인간을 상정하는 이런 방식,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노동력을 인종주의적 혹은 식민주의적 발상으로 적당히 관리하고 적절히 포용하는 것 자체가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다.

강자의 포용에 불과한 이런 주장은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위선적 다문화주의는 자본의 이윤추구와 이를 위한 사회적 통합(혹은 통제)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만 유효하다.

만약 불황으로 실업이 증가하고 사회적 불만이 높아질 때, 그 전과는 다른 사회적 관리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외국인은 그 불만의 타겟으로서 극우집단에게 더 할 나위 없이 쓸모가 있다.

“무슬림이 우리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테러범의 주장은 그래서 생소한 것이 아니며 2차 대전 전 경제위기가 한참 일 때 유럽 곳곳에서, 그리고 최근 금융세계화가 몰고 온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역시 유럽 전역에서 등장하는 것이다.

   
강상구 진보신당 대변인
 
아마 한국의 다문화주의자들은 그 때 쯤 되면 “오냐오냐 해줬더니 기어오른다” 정도로 이주민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것이다. 이것이 ‘강자의 포용’의 본질이다. 이들이 정말 다문화주의를 옹호하고자 한다면 마음가짐이나 문화 따위를 옹호하기 전에 이주노동자들과 복지를 공유할 수 있는지, 이들에게 투표권 등 정치권 권리를 정당하게 줄 의사가 있는지를 밝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보수언론의 주장은 테러범이 얘기했던 ‘모범한국’의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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