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서 ‘진보’라는 말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진보=빨갱이’라는 등식은 오랜 세월 한국사회를 짓눌러왔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상식은 한국사회에서 상식이 아니었다.

진보의 가치를 말하는 사람들은 ‘불순한 인물’로 분류되곤 했다. 그리고 “너 빨갱이지”라는 굴레가 덧씌워졌다. 빨갱이로 지목받은 사람은 자신이 빨갱이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굴레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경계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빨갱이 논리’는 권력에 저항하는, 권력을 비판하는 이들을 옭아매는 전가의 보도였다. 정부를 비판하면 여지없이 의식이 불순한 인물로 낙인찍히곤 했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은 정치인, 언론인, 학자 등을 억눌렀다. 사고의 다양성은 희망사항에 머물렀다.

   
  ▲ 지난 3월 17일 동아투위 35주년 기념 토론회 후 임시로 마련된 추모공간에 돌아가신 동아투위 위원 14인의 영정이 놓여졌고 참석자들은 그 앞에 헌화했다. 이치열 기자 truth710@  
 
'빨갱이 논리'가 지배했던 한국사회

세월이 흘러 한국사회는 많이 변했다. 진보정당이 국회에 진출했다. 진보언론도 오프라인(종이신문), 온라인(인터넷신문)에서 나름 지평을 열어가고 있다. ‘진보=빨갱이’라는 등식은 많이 약화됐다. 이는 곧 한국 사회 민주화의 지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거저 온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해진 것이다. 그들의 오늘이 어떻든, 이들의 헌신과 투쟁은 정당하게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 민주노동당 총선후보들이 2004년 3월 29일 오전 당사에서 열린 출정식에서 공약을 제창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물론 갈 길이 멀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기에, 수많은 산을 넘고 또 넘어야 하기에, 그들은 신발 끈을 다시 묶고 머나먼 길을 떠나야 한다. 때로는 손을 잡아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응원해주고, 같이 땀을 닦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기도 하고, 비바람을 함께 이겨내야 할 터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 영역에서는 보수가 판치는 척박한 한국 정치 현실에서 진보의 씨앗을 뿌리고 일궈낸 이들이기도 할 것이다.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냉소적 시선으로 보고, 심지어 ‘개량주의’로 낙인찍던 시절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실천하고, 창당하고 밭을 일구어 진보정당을 만든 그들이다.

그들의 노력 덕분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이 원내진출 정당으로 자리하고 있고, 원외에도 사회당이라는 진보정당이 자신의 영역을 다지며 꿈을 키우고 있다.

진보정당 진보언론의 오늘을 만든 땀과 눈물

언론 영역에서는 모두 숨을 죽이던 시절, 권력을 향해, 자본을 향해 ‘바른 말’을 하고자 했던 언론인들이 있다. 모든 것을 걸고 언론 자유를 위해 떨쳐 일어났던 이들이다. 동아투위, 조선투위가 그렇고, 80년 해직 언론인들이 그렇다. 그들의 땀과 노력, 그 열정이 있었기에 말지가 진보언론의 명맥을 잇고, 1988년 한겨레신문이 탄생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그 전진을 이뤄낼 수 있었던 데에는 한겨레와 경향신문, 그리고 독립적인 다수 진보적 인터넷 언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다가 ‘광고 한파’를 경험하고, 결국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환경에 처했지만, 꼿꼿하게 그 초심을 지켜나가는 모습에 이름 없는 독자들도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나는 것처럼 한국사회에서 진보와 보수가 생산적이고 건전한 경쟁을 하려면 진보의 분발이 더욱 요구된다. 진보의 기본은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북한 세습체제 둘러싼 진보진영 논쟁

하지만 진보진영의 오랜 논쟁의 대상인 ‘북한 문제’가 불거지면 기본이 흔들린다. 상대를 낙인찍고 그 대상의 항변을 귀담아듣지 않는다. 냉소적 시선까지 곁들여지면 합리적 대화는 실종되고 감정적 앙금과 상처만 남을 뿐이다.

최근 북한 세습체제를 둘러싼 진보진영의 논쟁은 많은 교훈과 과제를 안겨줬다. 열린 대화는 보이지 않고 상대를 낙인찍고 공격하는 행위가 더욱 각인됐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난무하는 그런 싸움이 돼 버렸다.

‘북한 문제’는 보수진영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유용하게 써먹는 사안이다. 북한과 관련한 사안이 불거지면 “너희들은 왜 비판하지 않느냐”,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북한을 옹호하는 것이냐, 동조하는 것이냐”는 말도 뒤따른다.

이번에도 그랬다. 조선일보 9월 30일자 <3대 세습 못 본 체하는 좌파는 가짜 좌파다>라는 사설이다.

“3대 세습과 그 아래 신음하는 북한 동포의 참상을 못 본 체하는 국내 좌파의 모습은 그들이 좌파의 근본정신을 잃어버린 무늬뿐인 가짜 좌파, 엉터리 좌파라는 점을 온 세상에 알렸다.”

   
  ▲ 조선일보 9월 30일자 사설.  
 
민주노동당을 향한 '대답 강요' 논란

민주노동당 대변인 논평이 나온 9월 29일 바로 다음날 조선일보 사설이다. 우위영 민주노동당 대변인은 논평에서 “북한 후계구도와 관련하여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 하더라도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입장을 밝혔었다.

민노당은 “우리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이 있다”고 지적하면서도 “북한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라고 보는 것이 남북관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말 한 것이다.

불똥은 진보진영으로 튀었다. 경향신문이 10월 1일자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사설을 내보내면서 민노당의 반론과 이에 대한 진보진영 논객들의 재반론이 줄을 이었다.

북한 3대 세습체제가 문제 있다고 비판하는 언론의 행위 자체는 무리가 없다. 민노당에 대해서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접근 방식이다. 사설에 담겨진 또 다른 ‘낙인찍기’다. 민주노동당 논평은 북한 세습체제가 잘했다, 못했다라고 밝혔다기보다는 남북관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 사안의 대응에 신중해야 한다는 시각과 입장이 담겨 있다.

민주노동당 '종북' 낙인찍기, 그 위험성

하지만 경향신문은 민주노동당의 ‘전략적 고려’에 대한 이해에 앞서 ‘낙인찍기’에 나선 측면이 있다. 경향신문 사설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북한은 무조건 감싸주어야 하는 생각이라면…”, “민노당은 북한 체제를 비호하고 나아가 상부로 간주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분당이라는 아픔까지 겪은 바 있다” 등의 지적이다.

   
  ▲ 경향신문 10월 1일자 사설.  
 
‘민주노동당이 북한 체제를 비호하고 상부로 간주한다는 비판’이라는 언급이나 ‘북한은 무조건 감싸주어야 하는 생각’이라는 표현은 생각해 볼 대목이다. 그런 ‘비판’과 ‘생각’이 있는 만큼 민노당이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낙인’이고, ‘강박’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이 ‘북한은 무조건 감싸주어야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근거가 무엇인지도 살펴볼 일이다.

경향신문의 접근 방식은 실제 민주노동당을 ‘종북주의 정당’으로 낙인찍는 효과로 이어졌다. 이번 논란이 불거진 이후 경향신문 논설위원과 진보 논객들의 글도 ‘종북주의’에 초점이 맞춰진 것들이었다.

민주노동당은 무조건 북한은 감싸주는 정당이 아니라는 점을 항변해야 할까.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는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국가보안법 법정 안의 논리가 일부 변형돼 진보언론 안에도 스며들어 온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진보논객 논쟁 합류, 생산적 논의 이끌었을까

하지만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바라건대 민노당이 북한 지배세력의 이익보다 남한 시민들의 이익, 북한 사람들의 이익을 더 중시해주기를 당부한다”고 촉구했다.

경향신문 사설이 민주노동당에 종북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와 무관하게 민주노동당은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북한의 ‘3대세습’을 분명한 어조로 비판하지 않는다면 민주노동당은 꼼짝없이 ‘북한지배세력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정당이 되고 말 형편이 된 것이다. 또 진보의 가치를 배반한 정당으로 매도당할 처지로 내몰렸다. 민주노동당이 분명한 어조로 북한의 ‘3대세습’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민노당이 진보의 가치를 포기하고 북한을 옹호 또는 추종하는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지는 따져볼 대목이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교 교수, 홍세화 한겨레 기획위원, 진보논객 진중권 씨 등이 경향신문과 함께 민주노동당 비판 대열에 동참했지만,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졌는지도 의문이다. 진보 지식인 주장에도 ‘낙인찍기’, ‘상대비하’의 성격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중권 씨는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공당은 대중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와 이념적 성향을 분명하게 밝힐 의무가 있다”면서 “한마디로 이(정희) 대표의 논리는 허접하다. 아마 본인도 자기 말을 안 믿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절독 운동'의 부적절성

주목할 대목은 이명박 정부도 북한 세습체제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명박 정부의 행위는 받아들일 수 있다는 논리다. 손호철 교수는 이정희 대표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저도, 경향신문도 진보세력 보고 세습비판을 하라고 한 것이지, 정부보고 세습 비판하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면서 “만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 세습을 비판하고 나선다면 남북관계는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노당이나 사회단체들이 북한의 세습을 비판한다고 해서 남북관계는 악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민노당에게 세습비판을 요구하는 근거라고 한다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이명박 정부의 침묵은 용인이 되는데 민주노동당은 안 된다는 논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설득력이 있는가. 민주노동당은 왜 말을 하지 않는가, 왜 대답하지 않는가라고 압박하는 태도를 놓고 ‘사상검증’이라는 시각도 있다. 자기고백을 강요하는 행위는 진보의 가치에 기준을 뒀을 때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민주노동당의 부적절한 행동도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은 경향신문에 대해 ‘절독 운동’이라는 방법을 선택했다. 경향신문 압박을 넘어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겠다는 의도를 보여준 행동이다.

진보언론도 진보정당과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고 비판할 수 있다. 그것이 진보정당 입장에서 부당하게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독 운동’이라는 선택은 섣불리 꺼낼 카드가 아니다. 더 많은 국민이 진보언론(경향신문)을 보지 않는 사회, 그런 상황이 진보정당에 유리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진보언론 싹을 짓밟으면 진보정당에 부메랑

경향신문은 오늘도 어려운 환경에서 권력의 감시와 견제라는 언론의 기본 사명부터 진보언론으로서 적극적인 의제설정까지 본연의 역할을 다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특정한 사설이나 기사가 불만이라고 경향신문을 끊어야 한다는 주장은 진보언론의 싹을 짓밟는 행동과 다름없다. 진보정당이 힘들고 여전히 갈 길이 멀 듯이, 진보언론은 더 힘들고 갈 길 또한 첩첩산중이다.

북한 세습체제를 둘러싼 논쟁은 여러 가지 교훈을 안겨줬다. 다름을 존중하는 진보의 기본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또 다른 의미의 ‘폭력’이 진보진영 내부에서 오고 감을 확인해야 했다.

북한체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세습체제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는 토론할 대상이다. 논쟁의 대상이다. 공론화 속에서 바람직한 해법을 모색할 일이다. 비판도 할 수 있고, 다른 의견도 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이의 생각이나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아니 진보의 기본 원칙을 저버리는 행동일 수 있다. 낙인찍기는 더욱 안 된다.

민주노동당 일부의 ‘절독 운동’이 경향신문과 진보 논객을 자극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말과 행동은 스스로 책임지는 게 옳다. 그런 점에서 경향신문 주장이 타당했는지, 그것이 결과적으로 경향신문을 아끼고 응원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갔는지는 생각해 볼 대목이다.

경향신문 '3대 세습'을 둘러싼 비판과 인정

경향신문은 10월 1일자에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이번 논란을 증폭시킨 바로 그 사설이다. 민주노동당은 전략적 고려 속에 3대 세습에 대한 분명한 언급을 자제했는데 그것을 비판한 내용이다.

경향신문 논리가 일관성을 가지려면 북한의 3대 세습을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용인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경향신문 10월 14일자 30면 이대근 논설위원의 <김정은을 우습게 보지 마라>라는 칼럼은 의문을 던진다. 그 칼럼의 일부다.

   
  ▲ 경향신문 10월14일자 30면.  
 
“냉정해야 한다. 김정은이 등장한 북한을 외면해서도, 김정은을 무시하고 우습게 봐서도 안 된다. 김정은의 북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의 미래, 한반도의 미래를 김정은과 함께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

3대 세습이라고 지적받은 김정은 체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인가. 그렇다면 10월 1일자 사설을 통해 <민노당은 3대 세습을 인정하겠다는 것인가>라고 비판한 이유가 궁금해진다. 나는 ‘바담 풍’ 해도 너는 ‘바람 풍’하라는 이야기인가.

진보의 기본은 '다름'에 대한 존중이다

   
  ▲ 지난 13일 오전 노회찬(사진 오른쪽) 진보신당 대표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를 예방해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진보정치 정택용 기자  
 
경향신문과 진보 논객들이 북한 세습체제와 관련해 견해를 밝힌 대목, 비판적으로 바라본 대목은 의미 있고 경청할 내용도 있다. 하지만 논리 전개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진보적 색깔론’, ‘역 매카시즘’이라는 비판을 자초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이번 논란이 뚜렷한 성과는 없이 민주노동당에 ‘종북 정당’이라는 굴레를 덧씌우는 것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진보진영 전체에 불행 아닌가. 비판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다름’을 존중하면서 합리적인 논쟁, 생산적인 논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보수가 오랜 시절 장악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균형을 잡으려면 진보의 성찰 그리고 분발이 필요하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아야 한다는 교훈, 그것을 이뤄내는 세상이 돈 없고 힘없는 이들도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세상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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