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는 고질병이 있다. 북쪽과 관련해서다. 엄연히 주권국가인 북쪽에 대고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두고서는 자기 말이 먹혀들어가지 않으면 손가락질을 해댄다. 북쪽이 훈수대로 따라간다면 통일을 운위할 필요도 없다. 남과 북이 하나가 돼 움직이는 상태, 이미 통일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과정을 밟고 있는데 마치 통일이 된 양 착각하는 이 증세는 지식인층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이 고질병의 뿌리는 북쪽 깔보기에 있다. 지난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이후 단기간 내 자멸할 것이라는 ‘집단 오보’가 대표적 사례이다. 지금도 이른바 격변설을 내돌리며 마치 낼 모레면 북쪽에서 무슨 큰 일이 벌어져 난민이 떼거리로 몰려올 듯 법석을 피우고 있다. 조기와해설이 나돈 지 16년 가까이 북쪽이 건재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격변사태에 귀를 쫑긋 세우는 이들이 있다. 참으로 고치기 어려운 병이다. 

요즘 ‘3대세습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더 정확히 말해 ‘3대세습을 비판해야 한다’는 주제로 이른바 진보진영 내부에서 토론이 뜨겁다.

토론이 제대로 되려면 용어의 개념부터 정확히 정리해야 한다. 그런데 ‘3대세습’의 당사자인 북쪽에는 아예 이 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남쪽 일부에서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내린 평가일 뿐이다. 당사자는 쏙 빼놓고 국외자가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하는 것은 역시나 턱없는 우월감에서 비롯된 오만한 행위이다.

   
  ▲ 북한의 3대 세습 비판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0일 조선노동당 창건 65주년 대경축야회에 참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후계자 김정은. 연합뉴스.  
 

북쪽에는 ‘세습’의 개념이 없다. 자동으로 어떤 직위가 승계되는 ‘세습’은 없으며 나름의 엄정한 절차를 밟아 진행하는 ‘후계 계승’이 있을 뿐이다. 북쪽에서 후계자 문제는 ‘후계자론’으로 정립돼 있을 정도로 중차대하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 중 하나는 후계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김정일 총비서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세습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김정은 대장의 등장을 두고 ‘2대 세습으로도 모자라 3대 세습까지냐’며  허공에 대고 종주먹을 흔들기도 한다. 뒤늦게 바로잡혀지고 있지만, 김 총비서의 경우 아버지의 후광은 부차적이고 기실은 자신의 능력이 후계자 발탁의 제1요인이었다. 아버지의 후광이 있었다 하더라도 능력이 없었으면 안 됐다는 것이다.

그 능력은 후계자 수업 시절에 공인 받았고 김 주석 사망 이후 여실히 입증됐다. 전문가란 전문가들 모두가 입 모아 ‘3일, 3개월, 3년 내 자멸’을 떠들 때 보란 듯이 나라를 지켜낸 업적은 솔직히 인정해야 마땅하다. 

지난 2009년 9월 세계적 투자은행 골드만 삭스가 보고서를 냈다. 이에 따르면 2008년 기준 북 주민 1인당 소득(구매력 평가 기준)은 1700~2200 달러로 베트남, 인도와 비슷하며 중국의 약 3분의 1 수준이다. 실제 생활수준이 비교국가보다 떨어지는 것은 경제의 약 4분의 1을 군사 분야가 차지하기 때문이라고 이 보고서는 지적했다.

자위력을 완성했다는 북은 이제 경제분야에 눈을 돌리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한사코 경제협력을 거부하는 남쪽 대신 중국을 선택, 경제 활로를 뚫고 있는 중이다. 

일부에서는 왜 진보주의 운운하며 북쪽 인권상황에는 침묵을 지키느냐고 조롱하고 진보진영 내 일부 인사 또한 동조한다. 그러나 인권 문제는 ‘보편적 가치’로 간단히 재단하기 어렵다. 보편적 가치로 인권 문제를 거론할 때 문제가 되지 않을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미국이, 영국이, 프랑스가, 아니면 남쪽이 이상향인가. 미국 국무부가 세계 인권 현황을 발표할 때마다 중국 역시 반박 보고서를 낸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인권 중의 인권이라면 먹을 권리, 식량권, 또는 생존권이다. 우선은 살아 있어야 인권을 논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먹을 것이 남아돌아 처치 곤란이라고 아우성치면서 바로 옆집에서 굶어죽는다고 호소해도 모르쇠로 외면하는 게 이른바 ‘인권 모범국가’들의 행태다. 인권 문제를 지적하지 않는다고 자책하기에 앞서 식량부터 보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인권주의자의 참모습일 것이다.

북쪽에서 후계자 공개는 그럴만한 준비가 갖춰져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후계자가 나와 주민의 삶이 더 피폐해진다면 초장부터 민심과 유리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강성대국 대문을 열어 제끼는 해에 ‘선물’을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 이번에 김정은 대장이 등장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만약 이 후계자가 나서 북 주민의 삶이 윤택해지고 남북 간의 관계가 진전되며 평화통일에도 기여하게 된다면 그 때에도 ‘3대세습’ 운운하며 도리질을 할 것인가. ‘3대세습 비판론’을 제기하려면 그 결과를 지켜보고 난 뒤에 하는 게 적절하다. ‘세습’도 안 된 상태에서 ‘세습 비판론’을 제기하는 것은 경박하고 성급하다.        

더욱이 ‘세습’이라는 게 21세기에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기괴한 사례가 아니다.  미국의 부시 부자 대통령, 대만의 장개석 총통 부자, 싱가포르의 이광요 부자를 비롯해 일본, 영국, 스웨덴, 태국 왕실 등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세습’이 이뤄지고 있다. 중국 지도부의 성씨만 다른 세습은 어떻고, 쿠바의 카스트로 형제의 경우는 또 어떤가. 세계 유일의 ‘3대 세습’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60여 년간 지속되는 ‘친미정권의 세습’을 지겹도록 지켜보고 있다.   

북쪽 문헌을 보다 보면 낯선 표현에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김일성 주석이 아들 김정일 총비서를 “김정일 동지”라고 호칭하는 대목이다. 문헌상으로 보면 직접 대면해 있을 때도 그렇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할 때도 그렇게 부른다. 김정일 총비서 또한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수령님”이라고 나온다. 정말 그러는지 알고 싶었지만 아직까지 확인은 못했다. 그러나 북의 혈육관계를 넘어선, 독특한 ‘수령-전사 관계’의 일단을 보는 듯 했다. 북쪽에서는 이 수령의 존엄을 해치는 자는 지구상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징벌을 하고야 말겠다고 소리치고 있다. ‘3대세습’을 비판했다고 해서 남북관계에 무슨 영향이 있으랴 하는 것은 무지 아니면 순진 그 자체라 할 것이다. 그렇게 했다가는 대화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화조차 안 되는데 남북관계가 나아질 턱이 없다.    

나라마다 정치체제가 다르고 특색있는 작동방식이 있다. 남쪽의 시각으로 재단하고 판단해서는 북쪽으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없다. 왜 호응을 얻어야 하느냐고? 같이 함께 살아야 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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