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로웠다. 대한축구협회가 조광래 경남FC 감독을 신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지난 21일, 허정무 전 대표팀 감독은 뜻밖의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달성, 국내 지도자가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허 감독이었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 축구를 말아먹었다고 말했다'고 전한 월간지 인터뷰 기사 탓에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과 관련해 외국인 감독 이야기가 나오는 상황에서 과거 한국 대표팀을 맡았던 외국인 감독에 대해 냉정한 평가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을 밝힌 것이 잘못 전달됐다"는 게 허 감독의 해명이다.

허정무 곤욕, "차기 감독, 외국인 여부 중요하지 않다는 점 말하고 싶었을 뿐"

허 감독은 “차기 대표팀 감독이 외국인이냐 한국인이냐는 이제 더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팬들 사이에 여전히 실력있는 외국 지도자가 그의 후임으로 오기를 바라는 정서가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 조광래 경남FC 감독  
 

국가대표 사령탑에 외국 지도자를 영입하는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비단 한국만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축구계에서는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외국인 지도자의 효용성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는 형국이다. 무려 110억원의 연봉을 주고 이탈리아의 명장 파비오 카펠로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기고도 졸전 끝에 8강 진출에 실패한 잉글랜드 등 용병 감독을 활용했던 대부분의 나라들이 효과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회 개막 3개월 전 족집게 과외 선생님 모시듯 스웨덴 출신의 스벤 예란 에릭손 감독을 영입한 코트디부아르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것을 비롯, 이번 대회에서 외국인 지도자를 감독으로 내세운 12개국 가운데 16강 진출에 성공한 나라는 25%인 3개국에 불과했다. 특히 출전 6개국 가운데 5개국이 외국 지도자를 쓴 아프리카의 경우 개최국 남아공을 포함한 4개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세르비아 출신의 밀로반 라예바치 감독이 이끈 가나가 8강까지 올랐으나 그걸로 끝이었다.

2010남아공 월드컵 계기로 고액연봉 외국감독 효용성 의문 제기

이번 대회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에 따르면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지 토종 감독이 이끄는 팀과 용병 감독이 지휘한 팀이 본선에서 치른 총 232 경기에서 토종 감독이 110승46무76패를 기록, 용병 감독을 압도했다. 또 외국 감독이 사령탑을 맡은 팀은 월드컵 본선에 80차례 올랐지만 4강 7회, 준우승 3회를 기록했고 우승은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다. 물론 브라질 이탈리아 등 축구 강국들이 외국인 감독을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나 외국인 감독=성적으로 볼 수는 없는 셈이다.

‘감독의 세계화’로까지 이야기됐던 외국 지도자 영입 붐은 1990년대 초부터 본격화한 현상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머리는 빌릴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된 까닭이다. 세르비아 출신의 보라 밀루티노비치 감독이 86년 월드컵에서 멕시코를 8강에 진출시키는 등 몇몇 외국 지도자들이 뛰어난 역량을 발휘한 것도 힘이 됐다. 외국인 지도자는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4명에서 94년 미국 월드컵 7명, 98년 프랑스 월드컵 9명, 2002 한일 월드컵 10명으로 늘었고,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절반에 가까운 15명(46.8%)이나 됐다.

외국 지도자 영입 붐 90년대 초반 본격화 "승리 위해 머리 빌리자"

91년에는 심지어 북한도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 대비, 헝가리 출신의 팔 체르나이를 영입한 바 있고, 잉글랜드는 2002년과 2006년 월드컵 때는 에릭손, 2010년 월드컵에는 카펠로에게 사령탑을 맡기는 등 성적을 위해선 ‘축구 종주국’의 자존심을 따지지 않을 정도가 됐다.

한국 또한 히딩크 감독부터 움베르투 코엘류, 본프레레, 딕 아드보카트, 핌 베어벡 등 5명의 외국인 지도자에게 7년여 동안 대표팀을 맡기며 세계화 바람에 동참했다. 그리고 히딩크, 아드보카트 감독을 제외한 나머지 감독은 불명예스럽게 중도퇴진, 외국인 지도자의 효용성에 회의를 느낄 만한 상황도 겪었다. 외국인 감독의 장단점은 국내 축구팬들도 익히 봐 온 셈이다. 히딩크처럼 앞서가는 선수단 운영 능력과, 전략 전술 등 탁월한 지도력으로 성적은 물론 전체적인 축구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도 있으나 코엘류, 본프레레, 베어벡처럼 다양한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뉴스위크, 몸값못한 외국인 지도자 문제 꼬집어 "시간적 여유없어 새로운 역할 소화못해"

이 같은 시각은 외국도 비슷하다. 최근 남아공 월드컵에서 비싼 몸값을 하지 못한 외국 지도자 문제를 꼬집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외국인 지도자들이 문화적인 충돌을 야기하거나 그 나라 실정에 맞지 않는 전략과 전술을 시도하다 새로운 역할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또 허정무 감독이 “코앞의 성적에만 몰두했지 유망주들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없었다"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그럴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처지“라고 분석했다.

히딩크 감독의 기억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한국팬들로선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선호가 남다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외국 유명 감독을 모셔오는 차원의 세계화가 능사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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