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시절 목에 힘주고 거리를 활보하던 권력주변 정치꾼과 공직자들. 그러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뇌물을 몇억원씩 챙기고 횡령했던 부패·비리의 주역들. 이들이 챙긴 검은 돈이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단지 본인들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오직 노출돼서 법의 심판을 받은 액수만 알 뿐이다.

이들은 ‘권력’의 가면을 썼지만, 파렴치범치고는 보통 시정잡배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질이 나쁜 파렴치범들이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두차례의 특별사면·복권으로 지탄받는 ‘과거’를 없던 일로 흘려보내게 됐다.

보도된 것처럼 “이들에게 사회복귀의 기회를 주고, 화합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라면 그들보다 훨씬 죄질이 가벼운 모든 뇌물·횡령범, 그리고 좀도둑이나 사기꾼들에게 사면·복권의 은전을 베풀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영삼정부의 깜짝쇼는 끝났다. 공직자 재산공개로 시작된 사정바람이 ‘약 주고 병 주고’로 끝난 것이다. 3당합당으로 권좌에 오른 김영삼정부의 한계다.
그러나 김영삼정부도 여론의 압력에 밀려 전두환·노태우 등 군사정권 최고핵심부를 법정에 세워 1심 선고공판이 26일 잡혀있다. 이들의 단죄는 김영삼정부가 치러야할 최소한의 정치적 비용이다. 그 부담까지 지지않고는 정치적으로 설 땅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제는 바로 언론이다.
놀랍게도 신문이건 방송이건 상층부는 군사정권시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5공시절 따뜻한 햇볕을 즐겼던 사람들이 지금도 주류를 이루고 있다. ‘문민정부’를 외고, ‘군사독재’를 소리높여 비난하는 오늘날 한국 언론의 행태에 비추어 볼 때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이들은 5공 치하에서 제작일선의 주요 관리직에 올라 승승장구 ‘높은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또 5공 집단에 접근해 출세길에 나선 사람도 있다. 이들중에서 지금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믿기 싫지만 한국 언론은 지금도 80년대에 뿌리박은 ‘5공 언론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상태에 있는지는 그동안의 언론계를 뒤돌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명분상 또는 사실상 ‘5공 청산’ 바람이 불고 지나갔지만, 언론계만은 유일한 ‘예외지대’로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권력에의 굴종이 체질화된 이들 5공시절 ‘보직(補職)기자’ 출신 고위 간부들은 오늘날 한국 언론의 체질을 규정하고 있다. 언론이 정치권력의 뒤를 따라 ‘국제화·세계화’에서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이르기까지 앵무새처럼 합창을 하는 것도 이런 체질의 재생산 결과다.

이들 5공 언론인들이 언론의 고위층을 구성하고 있는 한 언론이 사회의 공익을 대표하는 ‘독립적’이고, 지적인 제도로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전두환·노태우가 고무신을 신고 재판받는 이 마당에 과거 이들의 하수인 역할을 맡았던 사람들이 언론을 지휘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명회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낸 수양대군 쿠데타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세조)의 손자인 성종 25년동안에 그는 자그만치 1백7회의 탄핵을 받았다. 언관(言官)인 대간(臺諫)들은 권세의 우두머리 한명회를 25년동안 한해 평균 4차례 이상 탄핵했던 것이다. 그것이 언론에게 지워진 준엄한 사명이요, 규율이다.

물론 5공시절에 부끄럼없이 이런 사명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언론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5공시절 햇볕을 즐겼다해도 ‘어쩔 수 없이’ 하수인 노릇을 했노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민정부’를 입에 침이 마르게 외고, ‘역사 바로 세우기’를 앵무새처럼 합창하는 언론이 그 자신은 아직도 5공 치하에 머물러있다는 치욕적 아이러니를 똑바로 봐야한다.
이상과 꿈이 없는 사회나 집단은 망할 수밖에 없다. 오늘 한국의 언론과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이상과 꿈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는 길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있어선 안될 것이다.

과거 군사정권의 파렴치범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사면·복권을 어느 신문, 어느 방송이 비판할 수 있단 말인가?
‘사이비’는 결국 ‘가짜’일 뿐이다. 늦었지만 언론 스스로 5공 언론인, 다시 말해서 사이비 언론인들을 청산하는 노력이 급하다. 그래서 언론인의 긍지와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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