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법 파문과 한보사태에서 촉발된 위기정국은 김영삼대통령이 세간의 의혹을 사고 있는 92년 대통령선거자금에 대해 입을 다물기로 해 또한번 고비를 맞게 됐다.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23일 청와대 주례보고를 다녀와서 “국민들의 정서를 잘 알고 있으나 4년전 대선자금에 대해 지금와서 국민에게 속시원히 밝힐만한 자료가 없어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김대통령의 뜻을 전했다.

한마디로 해명하고 싶어도 해명할 자료가 없어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김대통령의 침묵이 당초 뜻대로 정국 수습의 해법이 될지는 미지수이다. 오히려 국민들의 분노와 반발만을 증폭시킬 가능성이 훨씬 많아 보인다.

김대통령의 이같은 태도로 한보사태에서 김현철사건, 그리고 다시 92년 대선자금 의혹으로 꼬리에서 꼬리를 물고 전개된 권력형 비리및 특혜사건, 그리고 국정농단사건은 그 어느 것 하나 속시원히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채 정치불안요인으로 내연하게 됐다. 김대통령의 ‘침묵’이 혼미한 정국수습책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사태를 더 어렵게 할 것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그것이 단지 대선 자금 의혹 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제기된 한보의혹, 김현철의혹 모두를 덮어버리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92년 대선자금 문제가 한보특혜비리 사건과 깊숙이 연관돼 있다는 것은 세인들이 처음부터 짐작해왔던 바이지만 언론의 보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그 윤곽이 드러나면서 파장을 더해왔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지난 8일과 9일자 보도를 통해 각각 검찰관계자의 말을 인용, 지난 92년 대선 때 한보그룹이 김영삼후보측에 6백억원에서 1천억원에 이르는 대선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이 검찰 수사 때 증언했다고 보도했다.

한보비리의 실체와 그 ‘몸통’이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기사들이었다. 한보에 천문학적인 특혜성 융자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92년 대선 때 한보가 김영삼후보측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데 따른 것이며 이는 곧 ‘김현철의혹’과도 직결돼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보도에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던 청와대는 조선일보의 보다 구체적인 보도가 나오자 서석재의원과 검찰을 통해 부인에 나섰다. 서의원은 조선일보의 보도가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하면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신청을 냈다. 청와대는 이른바 ‘음모설’을 제기하면서 조선일보의 의도가 수상쩍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청와대의 이같은 역공은 엉뚱한 책임전가라는 것이 또 백일하에 드러났다.

이 기사를 취재해 보도했던 동아일보의 기자는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보의 정총회장이 김대통령측에 대선자금을 제공했다는 진술을 했다는 검찰고위관계자의 말을 듣고도 당장 기사화하지는 못했다”며 “김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대선자금을 기사화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 기자는 무엇보다 “진실을 계속 묻어둘 수는 없었다”고 뒤늦은 기사화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조선일보 기사에 대한 “청와대의 음모론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기자는 이어 “김대통령이 한보에서 대선자금을 받은 사실이 전혀 없다면 명예회복을 위해서라도 이를 보도한 언론과 야당에게 응분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며 진실공개를 촉구했다.

김대통령은 최소한 이 취재 기자의 공개적인 물음에라도 응답해야 한다. “한보에서 대선자금을 받은 사실이 전혀 없는가?”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