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이 ‘베트남이 올해 자유로운 노조 설립을 보장하는 유엔(UN) 협약을 비준한다’는 외신 기사를 인용한 보도에서, 삼성 베트남법인 전 부사장이 결사의 자유에 반대하는 공식 활동을 해왔다는 대목을 누락했다. 선택적 인용 보도가 사실상 삼성 봐주기 보도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뉴스통신사 로이터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베트남이 무역 난제를 피하기 위해 노조 개혁을 계획하고 있고, 외국기업의 불안을 낳을 위험이 있다(Vietnam plans union reform to avert trade woes, risking foreign firms' unease)>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 로이터는 “베트남이 올해 노동자 권리에 관한 ILO 협약 87호를 비준할 예정이라고 UN 관료들과 외교관들이 밝혔다”며 “이는 무역 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한 행보이지만 몇몇 외국 기업들을 불안하게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로이터 보도 갈무리
▲지난달 27일(현지시간) 로이터 보도 갈무리

87호(결사의 자유 및 단결권 보호) 협약은 ILO 기본협약의 하나다. 로이터는 협약 비준이 “오랫동안 지연됐던 조치”라며 “공산당 구조 안에서 전국 노조만 유일하게 운영해온, 엄격하게 통제되는 일당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공식 조치”라고 했다. 동남아의 제조 허브인 베트남은 삼성전자와 인텔, 폭스콘 등 글로벌기업 공장을 두고 있는데, 낮은 인건비로 인해 캐나다 등 무역 파트너와 거래에서 불공정 경쟁이라는 ‘소셜 덤핑’ 분쟁 위험이 커져 이를 피하기 위해 비준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로이터는 “일부 기업은 불만을 가질 수 있다”면서 그 대표 사례로 삼성을 들었다. “로이터가 확인한 2016년 방현우 전 삼성 베트남 부사장의 연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노조설립의 자유는 ‘무질서한 노조 확산’과 노사관계 악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한다”며 “이 기록은 방현우의 견해가 삼성의 견해를 반영하지 않는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로이터는 특히 이 대목을 기사 핵심으로 꼽았다. 기사 도입부 ‘세 줄 요약’ 란에 “삼성 베트남 전 부사장, 2016년 연설문에서 복수노조 제도 비판”이 언급됐다.

▲ 기사는 도입부 ‘세 줄 요약’ 란에 “베트남 삼성 전 부사장, 2016년 연설문에서 복수노조 제도 비판”이라고 중심 내용 중 하나로 밝혔다.
▲ 기사는 도입부 ‘세 줄 요약’ 란에 “삼성 베트남 전 부사장, 2016년 연설문에서 복수노조 제도 비판”이라고 중심 내용 중 하나로 밝혔다.

보도가 나온 직후 29일(한국시간) 다수 한국 언론도 일제히 인용 보도를 냈다. 연합뉴스와 뉴스1, 한국경제 등이 <“베트남, 노조설립 자유 협약 올해 10월 비준…외국기업들 불안감”>, <베트남 ILO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 하나…외국기업 ‘촉각’> 등 제목으로 로이터 기사 내용을 전했다.

이 기사들은 모두 ‘외국 기업의 경영 악화에 대한 불안감’을 강조했다. 뉴스1은 “문제는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노조 권한이 커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는 점”이라며 “베트남 RMIT 대학의 공급망 전문가인 응웬 훙이 (…) 국내 최대 투자자인 삼성을 포함한 외국인 투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했다. 연합뉴스는 “베트남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은 노조 난립으로 인해 경영 환경이 악화할까 우려하는 분위기”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로이터 기사의 핵심 내용 중 하나인 삼성 베트남법인 부사장의 ‘자유로운 노조 설립 비판’ 활동을 언급한 국내 언론 기사는 없다.

▲지난달 28일 연합뉴스 보도 갈무리.
▲지난달 28일 연합뉴스 보도 갈무리.
▲지난달 28일 뉴스1 보도 갈무리.
▲지난달 28일 뉴스1 보도 갈무리.

삼성 고위 경영진이 베트남의 ILO 협약 비준 반대 논리를 펴온 사실은 국내에도 알려져 있다. 한겨레는 2019년 <삼성 상무, 베트남 국회서 “결사의 자유, 사회 혼란 부를 것”>에서 삼성전자 베트남법인 상무가 베트남 공산당 주최 포럼이나 베트남 국회 워크숍에서 수차례 베트남 정부의 ILO 기본협약 비준을 반대하고 ‘서구 질서를 따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할 경우 베트남 사회에 혼란이 야기될 것’이란 취지로 발언했다고 전한 바 있다.

▲2019년 6월26일 한겨레 보도 갈무리
▲2019년 6월26일 한겨레 보도 갈무리
▲삼성 깃발. ⓒ연합뉴스
▲삼성 깃발. ⓒ연합뉴스

이는 다른 외신이 같은 기사를 인용하며 삼성 관련 대목을 가감없이 보도한 것과도 크게 대조된다. 일례로 ‘BBC 베트남’은 27일 “방현우 전 삼성전자 베트남 부사장은 2016년 연설에서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가 ‘무질서한 노동조합 확산과 관계 악화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공유정옥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자원활동가(직업환경의학 전문의)는 “언론이 삼성 이미지에 부정적인 내용을 누락함으로써 ‘맥락 제공’이라는 기본 기능을 저버렸다”고 우려했다. 공유 활동가는 통화에서 “언론은 삼성 입장에서 (ILO 협약 비준하면) 곤란하다고 쓰면서도 삼성이 이를 막는 로비활동을 해온 핵심 사실을 누락했다. ‘삼성이 그렇게 해도 되느냐’라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책무, 입지와 연결되는 중요한 논의를 막은 셈”이라고 했다.

공유 활동가는 이어 “기사들은 정책결정권자들에게 베트남의 협약 비준을 부정적으로 대하거나, 삼성에 반대급부를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신호로 작용할 수 있다”며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언론은 삼성 홍보를 자처한 것이며 언론소비자로선 자존심 상하고 걱정되는 일”이라고 했다.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국제유해물질추방네트워크(IPEN) 등 16개 단체는 지난해 3월29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협력업체 메탄올 중독 사망 사고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반올림
▲반올림과 노동건강연대, 국제유해물질추방네트워크(IPEN) 등 16개 단체는 지난해 3월29일 서울 강남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삼성전자 베트남 공장 협력업체 메탄올 중독 사망 사고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반올림

스웨덴 소재 국제비영리단체인 국제유해물질추방네트워크(IPEN)의 조 디간지 특별고문은 반올림을 통해 본지에 전한 답변에서 “삼성의 결사 자유에 대한 무시는 한국에 기업 인권환경실사를 의무화하는 법률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며 “한국언론이 UN 협약 비준을 막는 삼성 역할을 정직하게 보도하는 것보다, 삼성으로부터 받는 광고 수익이 더 중요해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국내 보도에서 눈에 띄는 또다른 특징도 있다. 로이터는 올해부터 베트남에 글로벌 최저한세가 도입된다고 간단히 언급한 반면, 한국 언론은 이를 우려하는 해설을 덧붙였다. 글로벌 최저한세는 다국적기업의 조세 회피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로, 연결매출 1조 원 이상 기업이 특정 국가에 내는 실효세율이 15%보다 낮으면 본사 소재지 정부에 차액을 내도록 하는 제도다.

연합뉴스는 “베트남 정부는 투자 유치를 위해 실제로는 5%까지 낮춰서 적용하는 한편 다양한 세제 혜택을 제공해왔다”며 “이런 상황에서 최저한세 제도가 도입되면 현지 진출 글로벌 기업들은 세금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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