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치매 환자가 자신의 전성기 시절인 30~40대에 봤던 드라마 MBC ‘사랑이 뭐길래’를 본다. 드라마를 한참 보다가 최민수(이대발)의 아버지 이순재(이병호)가 화내는 모습에서 화면이 정지된다. “아버지가 화난 이유는?” ① 딸이 모델 한다고 해서 ② 반찬이 맛없어서. 정답은 ①번이다. 치매 환자가 영상을 보면서 드라마의 맥락을 파악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단기 기억’ 능력을 테스트한 것이다.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과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뇌건강센터 공동 개발팀이 MBC ‘사랑이 뭐길래’ 드라마를 활용해 치매 환자를 위한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MBC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과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뇌건강센터 공동 개발팀이 MBC ‘사랑이 뭐길래’ 드라마를 활용해 치매 환자를 위한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MBC

지난달 28일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양효걸·염규현 공동대표)이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뇌건강센터(센터장 임현국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함께 공동 개발팀을 구성해 MBC 드라마를 활용한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제작해 시범 운영했다고 밝혔다. 현재 60대 이상의 치매 환자들이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에 봤던 드라마들을 보고 줄거리를 떠올릴 수 있는 회상요법 치료를 개발했다.

종합병원에 내원한 외래 환자들을 대상으로 방송 드라마를 활용한 회상요법을 진행한 건 국내 첫 사례다. 이번 회상요법 프로그램에 탑재된 드라마는 MBC ‘사랑이 뭐길래’(1991년~1992년) ‘한지붕 세가족’(1986년~1994년) 2개로 46개의 인지 과제도 테스트를 할 수 있도록 치료 목적의 콘텐츠로 각색됐다. 지난 7일 전화로 만난 염규현 딩딩대학 공동대표는 “치매 환자들은 의자에 앉는 것부터가 큰 미션이다. 집중 자체가 잘 안되더라. 옛날 드라마는 치매 환자들을 자리에 앉게 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방송 아카이브를 치매 환자 치료에 활용한 이유를 밝혔다.

▲여의도성모병원 의료진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MBC 과거 드라마 아카이브로 개발한 치료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MBC
▲여의도성모병원 의료진이 치매 환자를 대상으로 MBC 과거 드라마 아카이브로 개발한 치료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하고 있다. ⓒMBC

다음은 일문일답.

-치매 치료에 과거 드라마 영상을 활용하게 된 계기가 뭔가.

“요즘 드라마는 넷플릭스 등 OTT에 주도권을 뺏긴 면이 있다. 예전만큼 지상파가 드라마를 주도하던 시기는 지났다. 30~40년 전에는 IP(지적재산권)를 주도했었다. 그 IP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을까? 고민을 시작했다. 치매 환자 치료 영역에서 최근 기억보다 과거 전성기 시절 영상이 자극이 많이 된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해외 다른 방송사도 찾아봤는데 BBC도 회상용 사진 자료를 홈페이지에 제공하고, NHK도 옛날 가옥 VR 영상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모두 공영방송들이다. 공영방송들의 공통점은 역사가 깊어서 다양한 자료가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KBS MBC가 가장 역사가 길어서 서비스할 수 있다고 봤다.”

-여의도성모병원에 치매 치료 개발 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자고 먼저 제안했다.

“기존의 지자체치매센터 등을 가보니 회상요법에 쓰이는 사진 자료가 구글에서 가져온 사진이었다. 한강 다리 사진을 가져와서 다리 순서 외우기가 치매 프로그램이더라. 단순 암기식으로 시키니까 그건 저도 외우기 힘들더라. 과거 자료를 보며 회상할 수 있는 게 중요한데 방송사에 자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희가 여의도성모병원에 먼저 제안했다. 병원과 문제 개발을 같이 했다.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다양한 테스트가 가능했다. 등장인물이 왜 화가 났는지 알려면 드라마의 맥락을 알아야 하고, 사람들이 입고 나오는 의복의 변화를 보고 계절도 맞힐 수 있다. 한강 다리 순서 외우는 것보다 훨씬 부담 없는 치료법이라고 생각했다.”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과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뇌건강센터 공동 개발팀이 MBC ‘사랑이 뭐길래’ 드라마를 활용해 치매 환자를 위한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MBC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과 서울 여의도성모병원 뇌건강센터 공동 개발팀이 MBC ‘사랑이 뭐길래’ 드라마를 활용해 치매 환자를 위한 인지 재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MBC

-실제로 드라마 영상은 치매 환자를 자리에 앉게 했나.

“치매 환자들은 의자에 앉는 것부터가 큰 미션이다. 뭘 하려고 해도 딴소리하고 일어나려고 한다. 치료를 위해 붙들어 놓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지자체치매센터며 병원이며 공통적으로 겪는 어려움이었다. 옛날 드라마는 치매 환자들을 앉게 하는 데 효과적이다. 의료진 입장에서는 치료 프로그램에 몰입하게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보호자들도 가족을 집중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았다. 우선 문제를 드라마 두 개로 만들어봤다. 문제 유형을 좀 더 확대해보고 필요하면 내년에는 개인용으로도 개발하려고 하는 과정 중에 있다.”

“특히 영상을 보면서 이야기하다 보면 삼천포로 많이 빠진다. 그거 자체가 되게 좋은 거라고 하더라. 아무말도 않고 앉아있기 보다 드라마 보다가 이순재가 나오면 ‘저 양반 젊었네’, ‘저 양반 어디서도 나왔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프로그램 영상이 단초가 돼서 딴 데로 이야기가 새면 대화를 더 풍성하게 해주고, 그런 것들이 오히려 자극을 많이 줄 수 있는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하더라. 우리가 설계한 문제대로 가도록 하는 것보다 그분들을 참여시키고 대화를 이끌어 내고 자극하는 수단으로서 충분히 효과성을 확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떻게 개발했나.

“딩딩대학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3명, 인지재활치료사 등 의료진이 상반기부터 지난 8월까지 문제를 기획해 출제했다. 지난 9월부터 두 달간 대학병원을 방문한 12명의 외래환자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개발팀이 심층 인터뷰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 반응을 5점 척도로 산출한 결과, 지루하지 않다는 의견에 5점 만점에 4점, 환자의 기분이 좋아졌다는 지표는 3.92점으로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 총 46개의 인지항목 테스트에서는 정답률이 79%로 높게 나타났다. 보호자 역시 해당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쓰고 싶다는 ‘재사용 의지’ 항목에서 5점 만점에 4.83점을 줬다.”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팀이 지난 1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는 ‘2023 차세대 미디어 대전’에서 수상한 모습. ⓒMBC
▲MBC 사내벤처 딩딩대학팀이 지난 11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주최하는 ‘2023 차세대 미디어 대전’에서 수상한 모습. ⓒMBC

-치매 치료 프로그램을 주로 이용하는 연령대는 어떻게 되나.

“1940~1950년대생 분들이다. 40대를 전성기로 보니 20~30년 전 영상이 그분들이 전성기 때 즐겨보던 영상이다. 그래서 1990년대 중후반 영상을 우선적으로 살폈다. 나중에 제가 이 치료를 받는다면 ‘무한도전’을 보며 전성기를 보냈기 때문에 저도 나중에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무한도전’이 교재가 될 수 있다. 20~30년 동안 유사한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할 수 있다.”

-두 개의 드라마 말고 또 어떤 드라마를 활용할 계획인가.

“MBC 드라마들이 시대극이 많다. 육남매(1998~1999년)는 1990년대 후반에 방영됐지만, 1960년대 초반을 다룬 이야기다. 20년 넘게 방영된 전원일기(1980~2002년)도 농촌의 20년 변천사가 다 들어가 있다. 농기계 등 농촌문화가 바뀌는 모습이 다 담겼다. 연령대와 세대에 맞춰서 치매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다.”

-‘한지붕 세 가족’은 무려 8년이나 방영했던 드라마다. 어떤 기준으로 드라마 장면을 뽑았나.

“과거 방대한 양의 드라마를 다 보고 있을 순 없다. AI 메타데이터 색인 프로그램을 통해 시간을 단축시켜서 필요한 장면을 선별했다. 인물, 대사, 자막 등을 자동 검색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장면을 선별했고, 치료 프로그램 제작 시간을 단축했다.”

[관련 기사 : 젊은 시절 봤던 방송으로 기억 떠오르게 하는 치매 관리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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