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 목사(수원 영광제일교회)는 2019년 8월 31일 인천퀴어문화축제에서 축복식을 집례했다는 이유로 지난 2020년 6월 기독교대한감리회(이하 감리회) 내에서 기소됐다. 감리회 헌법에 해당하는 ‘교리와 장정’은 마약·도박 같은 중대한 법 위반과 더불어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범과(종교적인 범죄와 윤리·도덕적인 허물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로 규정한다.

재판은 느리고 복잡하게 흘러갔다. ‘교리와 장정’에 따르면, 판결을 맡은 재판위원회는 2개월 내 판결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이번 사안이 2심 판결까지 가는 데 걸린 기간은 무려 2년 4개월이었다. 그렇게 지난해 10월에 나온 판결은 ‘정직 2년’. 감리회가 정직으로 판결할 수 있는 최장기간이다. 역설적으로 재판이 길어진 탓에 판결은 실효성이 없었다. 기소되면 바로 직이 정지되는데, 재판 기간이 이미 정직 기간을 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다음 달인 지난해 11월 감리회 목사와 장로들이 다시 ‘권면서’를 보냈다. 권면서는 고발을 예고하는 일종의 내용증명이다. 이번에는 이동환 목사가 축복기도 이후에도 퀴어문화축제에 참가하고 지난해 4월 기독교 성소수자 인권단체 ‘큐앤에이(Q&A)’를 만든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결국 올해 6월부터 두 번째 재판이 시작됐다. 그동안 이 목사는 지난 2월에 첫 번째 재판의 ‘정직 2년’ 판결에 대한 징계무효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이쯤 되면 주변에서도 걱정이 담긴 만류와 증오 섞인 압력이 가해지기 마련이다. 이동환 목사는 어떤 마음으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까?

▲ 이동환 목사 ©박영록
▲ 이동환 목사 ©박영록

– 두 번째 감리회 재판이 진행 중이다. 어떻게 대응하고 있나.

“이번에는 두 번째 재판이기도 하고 이미 그간의 활동으로 인해 제가 ‘확신범’처럼 되었다. 그래서 진짜 직을 걸어야겠다 싶어서, 방어적으로 나가지 말고 동성애가 왜 죄인지 질문을 던지자는 각오로 재판에 임했다. 그런데 웬걸, 그럴 틈도 없이 절차에 하자가 너무 많더라.

검찰 역할을 하는 심사위원회는 기소장에 어떤 조항을 적용했는지만 적어놓고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적지 않은 ‘백지 기소장’을 냈다. 게다가 심사위에는 규정상 피고발인과 같은 지방회(교단에서 정한 행정구역) 소속 목사가 있으면 안 되는데, 재판 도중에 저와 같은 지방회 목사가 심사위에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때문에 심사위가 기소를 포기해 공소가 취하됐는데 갑자기 재판이 부활했다. 이후 재판정에 나가서 가장 어이없었던 것은 재판위원장이 마치 결론을 정해놓은 것처럼 ‘이동환이 교리와 장정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고발됐다’고 말한 것이다. 이러다 보니 감리회 결정에 불복하고 사회의 일반 법정으로 가서 징계무효확인소송을 해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성소수자 인권 활동이 범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재판에 임하는 이유는 감리회 절차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교단은 절차를 어겨가며 재판을 강행하고 있다.”

– 긴 시간 스트레스와 압박, 온갖 음해에 시달리면서 공황장애 등으로 약을 먹고 안면장애 등도 겪었다는데 그간의 상황이 어땠나?

“작은 일에도 심장이 두근두근하고, 울렁증이 있어서 사람들이 쳐다보면 다리가 풀린다(웃음). 처음 재판 때는 진짜 고생했다. 몸도 정말 안 좋았고 배탈을 달고 살았다. 감리회 내에서 동성애 관련 징계를 다투는 첫 사건이라 내가 뭘 잘못하면 다 망할 것처럼 부담이 들었다. 결정 하나하나가 살얼음판이었다. 내가 그다지 똑똑한 사람이거나 대단한 운동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목사일 뿐인데…. 그때는 순교자 마인드로 ‘내 한 몸 불살라서라도’ 이런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두 번째 재판에 오면서 먹는 약은 늘었어도 스트레스는 덜하다. 지금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충실하게 운동하자고 생각한다.”

–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을 텐데, 무엇이 이 길을 계속 가게 하나?

“가까운 사람들이 많이 말렸다. 교단은 못 바꾸고 너만 다친다고 하더라. 일종의 거래나 회유가 들어오기도 했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래도 사회적 관심이 많이 떨어지니까 ‘사람들이 다 잊었구나. 나 혼자 어떻게 싸워나가지?’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워낙 첨예한 이슈다 보니, 이를테면 저를 지지한다고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가 재판받을 뻔한 일까지 생기면서 제가 조금씩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거다. 고립감과 우울감이 진짜 심했다.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해서라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포기하면 제 안의 무언가가 망가질 것 같았다. 그리고 활동하다 보니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거다. 주변에 성소수자 성도도 많고 성소수자 후배들도 목회를 꿈꾸고 있다. 교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목사직을 준 것이기에 ‘직’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가 이 일로 교단을 떠나면 그냥 저한테 벌어진 불행한 일로 사건이 끝난다. 성소수자 성도들이 이 사건을 보고 있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게 제 역할이다.”

▲ 2019년 8월 인천퀴어문화축제 중 ‘함께하는 축복식’에서 이동환 목사가 꽃잎을 뿌리고 있다. © 주피터
▲ 2019년 8월 인천퀴어문화축제 중 ‘함께하는 축복식’에서 이동환 목사가 꽃잎을 뿌리고 있다. © 주피터

– 가족이나 교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나.

“원래부터 아내는 나보다 더 열심이었다. 아내가 인천퀴어문화축제 개신교 준비팀에서 활동했는데 사람이 부족하다고 연락이 와서 제가 축복기도를 하게 되었다. 이후에 제가 흔들릴 때도 아내는 ‘역사에 부끄럽게 남지 말라’고 하더라(웃음). 우리 교인들은 재판 기간 내내 방치됐다. 원래 재판으로 담임목사 자리가 비면 교단에서 목사를 보내주는데, 우리 교회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다행히 심지가 굳은 분들 중심으로 잘 뭉쳐서 ‘목사 없는 예배’로 버텼다. 교인들이 성소수자 의제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됐고, 기자회견 발언도 해주시고 성명도 내주셨다.”

– 성소수자 인권단체 큐앤에이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어쩌다 만들었나?

“제가 성소수자 당사자도 아닌데 비난이 너무 컸다. 재판을 받기 전에는 성소수자들이 이렇게 많은 혐오에 노출됐는지 몰랐는데 ‘당사자들은 얼마나 힘들까’ 생각하게 됐다. 첫 번째 재판 당시 감리회 본부 앞에서 천막농성을 했는데, 농성장에 모인 사람들과 밤새 얘기하다가 이런 단체가 필요하다고 의기투합해서 만들게 됐다.”

“큐앤에이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교회를 변화시키고 당사자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단 성소수자 친화적인 예식서를 만든다. 지난해에는 장례예식서를 만들고 올해는 커플예식서를 만들었다. 기존 예식서가 성별이분법적이고 가부장 중심이어서 이를 바꾸고 평등한 예식을 만들자는 취지다. 교회 내에서 성소수자 인권을 교육할 수 있는 자료도 만들고 교단 내 차별법을 개정하는 운동도 한다. 목사가 퀴어를 죄인이라고 하니 퀴어 기독교인은 ‘나는 죄인인가’ 고민하고 그 때문에 교회를 떠나거나 자신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래서 당사자들 무료상담을 진행한다. 또 당사자들이 모여 영화모임 등 다양한 활동도 한다.”

– 기독교 내 혐오 세력에 대해서 “교세가 줄면서 종북·이슬람·동성애 등 외부의 적을 만든다”는 비판이 나온다. 그러나 이러한 혐오로 오히려 기존 신자들마저 교회를 떠난다.

“2000년대 초엔 교단 내에서 반동성애 움직임이 별로 없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안이 나오면서 2013년 이후 반동성애 단체들이 교계 안으로 들어와 주도권을 잡았다. 교단 총회 산하에 이주민·난민·이슬람·성소수자 관련 대책위가 만들어진 것이다. 총회 구성원들은 대부분 ‘60대 이상’, ‘남성’, ‘대형교회 출신’이다. 그들의 정치적 성향이나 신앙관, 선입견이 고스란히 교회법에 반영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차별금지법 제정 찬성 의견이 더 높지만, 교회법에 이런 여론이 반영되기엔 벽이 견고하다.”

– 반면 새로운 움직임도 눈에 띈다. 사건 대책위에 참여한 교인·단체가 많아졌고 신학대 내 성소수자 인권활동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성소수자 이슈 외에도 교회의 성차별적 구조와 문화를 바꾸려는 단체 ‘믿는페미’, 교회 내 성폭력에 대응하는 ‘기독교반성폭력센터’, 목회자 노동권을 외치는 ‘전국민주기독노조 추진위’ 등의 단체도 생겼다.

“너무 좋은 일이다. 저의 재판을 겪으면서 ‘차별너머’라는 목회자·신자 모임이 생겨 차별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또 목회자도 노동자라는 인식이 생겨서 전국민주기독노조 추진위가 꾸려졌다. 그러나 아픔을 겪고 나서야 단체들이 생긴다는 점은 속상하다. 기독교반성폭력센터는 성범죄를 저지른 목사가 교회를 떠나자 해당 교회가 성폭력 피해자 지원을 위해 설립한 단체다. 또한 퀴어신학·여성신학·생태신학 등을 공부하는 무지개신학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생들이 학내에서 무지개 퍼포먼스를 하고 징계당한 이후 만들어진 단체다.”

▲ 2021년 6월 감리회 본부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이동환 목사 © 이동환목사재판공동대책위원회
▲ 2021년 6월 감리회 본부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이동환 목사 © 이동환목사재판공동대책위원회

 

– 한때 선교사를 꿈꿨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노동 인권활동을 열심히 했고 지금은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고 있다.

“고3 때 교회 수련회에 갔다가 밤새 울면서 기도하는 ‘은혜 체험’을 했다. 그 뒤로는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살았다. 학교 다닐 때는 운동권 친구들도 별로 안 좋아했다. 술 먹고 담배 피워서(웃음). 그러다가 기독교의 ‘희년’(50년마다 돌아오는 ‘해방과 회복의 해’. 노예가 자유를 얻고 빚을 탕감받으며 모든 경작지는 휴경하게 된다.) 개념을 배우면서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실천하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다 자기만 구원받고 자기만 부자 되고,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거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선배 SNS에서 ‘해고 노동자 투쟁 기도회’ 소식을 보고 연락해서 기도회 현장에 갔다. 처음에는 목사로서 뭐라도 말하고 싶으니까 ‘도와드리러 왔어요’라고 했는데 ‘도와줄 거면 가셔라. 우리는 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이게 당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같이 투쟁하고 연대하자’는 말을 들으면서 혼이 났다(웃음). 그렇게 뭣도 모르게 현장에 나가다 보니 어느새 그 중심에 있게 되고 동지들도 생겼다.”

– 되게 모범생인 것 같다(웃음). 예전에는 성소수자 인권 문제도 잘 몰랐다고 들었다.

“고등학생 때 교회에 크로스드레서(사회에서 반대 성별이 입는다고 인식되는 옷을 입는 사람)가 있었다. 남자인데 화장하고 치마도 입고 하이힐을 신고. 다들 싫어했고 저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그분은 꿋꿋하게 교회를 다니다가 어느 날부터 안 보였다. 그 뒤에도 기본적으로 부정적 인식이 있었는데, 2014년인가 우리 교회에 다니는 지인이 자기 정체성을 얘기한 거다. 진짜 식은땀이 나더라. 혼란스러운데 티를 낼 수도 없고. 신앙을 떠나서 도의적으로 ‘당신은 죄인이다. 교회는 못 다니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기도해볼 테니 한두 주만 있다가 얘기하자’고 하고서는 급하게 성소수자에 대해 공부했다. 그렇게 해서 문이 열렸다.”

▲ 이동환 목사 ©박영록
▲ 이동환 목사 ©박영록

– 앞으로 어떤 목회자가 되고 싶나?

“미래는 알 수 없다. 30대 때는 ‘노동자들과 연대하며 살겠구나’ 했는데 이제는 성소수자들과 연대하며 지평이 넓어졌다. 신앙의 관점으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곳이 이곳’이라고 생각하기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운동을 한다는 느낌도 있지만 그보다는 예수의 길을 따른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저는 그리스도인이고 목사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인권 문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를 바꾸는 일은 사회를 바꾸는 일과 다르지 않다. 목사답게, 내 신앙의 양심을 포기하지 않고 살고 싶다.”

– 성탄절이 있는 12월이다.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아기 예수는 비혼모에게서 태어났고 마구간의 말 밥통에 몸을 뉘었다. 탄생부터 ‘퀴어’했다. 그렇게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목수로 살았고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가난한 사람 편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이 예수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야 하는지 생각해보는 12월 성탄이었으면 좋겠다.”

※ 이 인터뷰는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가 참여연대 월간 매거진 ‘참여사회’ 인터뷰어로 참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참여사회 2023년 12월호(통권 311호)에 실렸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미디어오늘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인용 시 ‘참여사회’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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