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이 임명한 이현주 신임 사무총장이 과거 KBS에서 박정희 정권 친일 행적 관련 보도가 불방되는 사태를 주도했다고 지목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현주 신임 사무총장은 1990년 기자로 입사한 KBS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장, 경제부장, 편집주간, 시사제작국장, 대구방송총국장 등을 지냈다. 방통심의위는 지난 24일 이 사무총장 임명 소식을 전하면서 “이현주 사무총장은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 참 언론인 대상을 수상하고 최근 방송 분야 저서(방송 필살기: 방송스킬)를 출간하는 등 방송 언론 분야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무총장 임명 소식에 그가 KBS 시사제작국장었던 시기 ‘시사기획 창-친일과 훈장’ 불방 사태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훈장’은 제작진이 2013년부터 정보공개 청구와 행정소송 등으로 입수한 자료가 기반이 된 보도로, 2015년 1월 탐사보도부 업무계획에 포함돼 그해 6월 방영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5월 ‘메르스 사태로 밀린 아이템을 먼저 내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방영이 미뤄진 뒤 편성 연기가 거듭됐다.

▲이현주 신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사진=방송통신심의위원회
▲이현주 신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사무총장. 사진=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영 연기가 장기화되자 9월 탐사보도팀 평기자들은 사내 게시판을 통해 ‘훈장 프로그램을 방송하라’는 입장문을 밝혔다. 그리고 다음날 안양봉 탐사보도팀장이 네트워크부 팀장으로, 일주일 뒤에는 제작진 중 선임인 최문호 기자가 라디오제작부로 발령됐다. 최 기자는 이 사태를 계기로 이듬해 3월 퇴사했다.

당시 제작진은 이 같은 인사발령 이후 통상적 수준을 넘어서는 데스킹이 시작됐다고 밝혔다. 관련 경위는 KBS 진실과미래위원회(진미위)가 2019년 발간한 보고서에 기재돼있다. 진미위는 2018년 7월2일~7월23일 당시 시사제작국장과 탐사제작부장 및 제작진 면담과 서면조사, 관련 기록물 조사를 거쳐 “통상 이틀, 길어야 사흘 정도 소요되는 데스킹이 모두 10차례 총 20시간이 넘는 동안 이뤄졌다”고 밝혔다.

특히 이현주 당시 시사제작국장 등 책임자들이 2편 ‘친일과 훈장’ 원고에서 유독 박정희 정부 시대의 수정과 삭제를 요구하면서 기존 원고의 3분의1이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와 KBS노동조합 등 양대 노조의 공정방송위원회 개최 요구, KBS 기자협회의 보도위원회 정례회의 개최 요구 등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방송이 미뤄지는 사이 2016년 1월 JTBC ‘스포트라이트-대한민국 훈장의 민낯’이 방영됐고, KBS는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2월2일 기존 1화로 예정됐던 ‘간첩과 훈장’ 편을 ‘훈장’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방영했다. 2편 ‘친일과 훈장’은 방영되지 못했다.

▲자료=KBS 진실과미래위원회 보고서
▲자료=KBS 진실과미래위원회 보고서

진미위 보고서는 ‘훈장’ 데스킹 과정에서의 수정 및 삭제 요구가 박정희 정부 시절에 집중된 실제 사례를 공개했다. 일례로 국·부장이 기시 노부스케 전 일본 총리에게 보낸 박정희 전 대통령 친서 중 ‘귀하에게 이 서신을 보내게 돼서 극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쓴 문구를 인용한 대목을 삭제하라고 요구한 일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일본인 수교 훈장에 대해선 ‘수교 훈장과 친일은 상관 없으니 삭제’, 백선엽 장군에 대한 무공훈장 등에 대해선 ‘무공훈장과 친일은 상관 없으니 삭제’하라는 등의 지시가 이뤄졌고 실제 해당 대목들이 삭제됐다.

관련 조사에서 이 총장(당시 시사제작국장) 등 책임자들은 ‘팀장-부장-국장으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적극적 데스킹이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이는 정상적인 과정’이고, ‘박정희 관련 부분이어서 삭제를 지시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고서는 데스킹 과정 녹취에서 수정하라거나 삭제하라는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으나 ‘연관성이 적어 기사에 필요하지 않다’ ‘중요한 내용이 아니다’라는 등 사실상의 수정과 삭제 지시가 다수 발견됐다고 밝혔다. 또한 실제 ‘친일과 훈장’ 원고에서 책임자 측의 수정과 삭제 지시 부분이 유독 바정희 시대에 국한됐고 결국 수정과 삭제가 이루어졌다며, 데스킹 과정 녹취록을 통해 확인된 수개월 간의 데스킹 과정을 정상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자료=KBS 진실과미래위원회 보고서
▲자료=KBS 진실과미래위원회 보고서

진미위는 관련 당사자와 기록을 조사한 끝에 △제작진 의사에 반하는 수정·삭제 지시 등 ‘제작자율성 침해’(편성규약 위반) △담당 팀장과 기자들을 타 부서로 인사조치한 ‘인사권 남용’ △사측의 공정방송위원회 거부 등 ‘편성규약 절차 위반’ △JTBC보다 보도 시점이 늦춰지면서 KBS 탐사보도를 낙종으로 만든 ‘공사 재산 피해’(연구용역 등 2700만 원 직접 제작비와 간접제작비, 기회비용 허비 등) △KBS 제작자율성·공공성·공정성에 의심이 제기된 상황으로 인한 ‘공사 명예 훼손’ △제작진들의 피해 등이 확인됐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행보를 들어 전국언론노동조합은 2017년 ‘박근혜 정권 언론 장악 부역자 명단’(2차)에 이 사무총장(당시 KBS 대구방송총국장)을 추가한 바 있다.

방통심의위 사무총장은 방통심의위 사무를 처리하고 사무처 직원을 지휘·감독하는 역할을 맡는다. 최근 방통심의위 독립성과 심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고 있는 가운데 이 사무총장 임명이 방통심의위 운영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주목되고 있다. 이 사무총장은 ‘시사기획 창-친일과 훈장’ 불방 등을 둘러싼 제작자율성 침해 비판, 언론노조의 ‘부역자 명단’ 등에 대한 질의에 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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