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재능 있는 배우가 꾸준히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시장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배우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곳이다.” (한국영화배우조합 박근태 위원장)

미국 영화·TV 배우들의 파업이 전 세계 이목을 끌고 있다. 미국 배우와 라디오 진행자, 유튜버 등 16만 명이 가입한 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은 지난 7월14일부터 파업 중이다. 물가상승에 맞춘 최저출연료 인상과 스트리밍 반복 재생에 따른 잔여 출연료 지급, AI 확산에 따른 배우 보호 등을 제작자연맹에 요구하면서다. 미국배우조합은 웹사이트에서 “우리 직업의 생존을 위해서 파업하고 있다”고 밝혔다.

같은 달 한국에선 영화배우들이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요구를 모은 노동조합을 띄웠다. 한국영화배우조합은 지난 7월31일 총회를 열고 설립신고를 마쳤다. 한국 영화엔 배우의 최저출연료가 없다. 제작사연맹과 맞서 영화배우들이 교섭에 나설 노동조합과 협상 테이블도 없었다. 박근태 초대 위원장은 “배우들의 필요와 요구를 배우들 간의 협력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고자 만든 단체”라고 한국영화배우조합을 소개한다.

엔터테인먼트산업에 20년 몸담은 박 위원장은 당초 신인에게 ‘공정한 기회’를 줄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을 지향했다고 했다. 하지만 배우 개인의 실력 향상이나 컨설팅으로 처우를 개선하기엔 역부족임을 느꼈다고 했다. “모든 신인 배우들이 겪지만, 스타가 되고 나면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부조리한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영화배우조합 박근태 위원장. 한국영화배우조합은 지난 8월 서부지방고용노동청에 설립신고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한국영화배우조합 박근태 위원장. 한국영화배우조합은 지난 8월 서부지방고용노동청에 설립신고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박 위원장은 대다수 영화배우가 겪는 주요 문제로 소속사 유무에 따른 차별을 꼽았다. 한국 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회사는 배우의 ‘일감’인 캐스팅과 오디션 정보를 수단으로 불공정한 전속계약을 이끌어낸다. 다수는 일감을 바라보고 수년간 부당한 계약에 휘둘린다. 일을 하고도 생계가 어렵거나 아예 오디션 기회를 얻지 못한다.

지난달 27일 서울 은평구 한국영화배우조합 사무실에서 박근태 위원장을 만나 노동조합을 꾸린 계기와 요구를 들었다. 영화배우조합은 △표준 출연계약서 도입 △최저출연료 제도 실시 △공인에이전시 제도와 수수료 상한제 도입 △산업재해보험 전면 적용 등을 요구로 걸었다. 눈앞의 과제는 고용노동부의 노조 설립필증 교부다. 노동청이 배우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기약 없이 설립신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부당함 호소하던 또래들, 대표 돼 반복하더라”

- 한국영화배우조합을 설립하게 된 계기는.

“처음엔 사회적 기업이나 협동조합 같은 조직을 생각했다. 특히 연예인과 배우 지망생들에게 기회를 넓히도록 도움 주는 활동을 준비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배우와 상담했다. 배우들의 고민을 들을수록 시스템을 바꾸지 않으면, 개별 기회 제공이 이뤄지거나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기획사들이 신인 연기자를 착취하는 구조를 없애지 않으면 변화가 없겠다는 생각이다.

함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종사하던 또래들이 지금은 엔터테인먼트 기업을 하고 있다. 20년 전 ‘우리는 저렇게 되지 말자’고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고 있더라. 본인이 매니저 생활을 하면서 겪은 부조리와 ‘신인’ 연예인들이 겪던 부당함을, 자신이 기성세대이자 엔터사 대표가 되니까 반복하는 것이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유명하지 않고 소득이 적을 때 힘든 점들을 토로하다가 유명해지면 잊게 되고 ‘환경상 어쩔 수 없다’는 얘기를 한다.”

- 조합 설립 전엔 어떤 일을 했나.

“음악을 전공하고 가수 연습생을 하다가 대표 비리로 회사가 없어지는 일을 겪었다. 이후 SM과 JYP 엔터테인먼트, 엠넷 등에서 공개오디션 시스템과 신인 연습생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1명만 승리하고 모든 연습생은 낙오하는 시스템인데, 경쟁 구도를 설계하는 데 일조하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이후 콘텐츠 제작으로 분야를 옮기면서 배우 오디션 시스템을 알게 됐다. 일부 기업의 공개오디션 제도 설계에도 참여했다. 서울시 지원을 받아 관련 협동조합 또는 사회적 기업을 시작하게 됐다가, 노조로 방향을 틀었다. 현재는 시 지원이 끊긴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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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태 한국영화배우조합 위원장이 소속사와 배우 간 불공정한 전속계약서 사례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배우가 일하는 환경이 어떻기에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나.

“대다수 배우는 연기 활동만으로는 생계가 어려워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처지다. 특히 매니지먼트기업(소속사)과 계약했는지에 따라 차이가 크다. 소속사들이 제작사나 캐스팅디렉터와 친분으로 오디션 정보를 독점하고, 소속사 없는 배우는 오디션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소속사가 있는 경우 배우는 표준계약서에 따라 최장 7년 전속계약에 묶인다. 소속사는 해당 배우에 독점 권한을 행사하고 활동 방향을 정한다. 출연 교섭과 협상도 대신한다. ‘신인’ 배우는 제작사와 2대8 또는 3대7로 수익을 나누는 불공정한 계약이 대부분이다. 물론 유명 배우는 반대 비율로 계약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조·단역 위주이거나 출연 회차가 적은 이름 없는 배우는 생계가 어려워도 아르바이트를 포함해 어떤 겸업도 할 수 없다.

결국 소속사가 오디션과 캐스팅 정보를 독과점하면서, 주연급 배우 출연계약을 하며 ‘우리 회사 소속 누구를 조연, 단역에 넣어달라’고 요구해 성사시킨다. 이를 수단으로 배우가 얻은 수익 대부분을 소속사가 차지한다. 능력이 있는 배우도 이를 통해야 일할 수 있다.”

- 배우 일감인 영화 출연은 어떻게 진행되나.

“제작사가 직접 캐스팅을 진행하는 경우엔 소속사나 배우가 직접 프로필을 제출하고 오디션을 해 출연계약서를 쓴다. 다른 경우 캐스팅업체나 캐스팅디렉터를 통해 배우를 추천받는데, 이 경우 제작사가 아닌 캐스팅업체나 디렉터와 출연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체불이나 횡포가 많이 발생한다.

제작사가 직접 캐스팅디렉터에 수수료를 제공해야 하지만, 캐스팅업체나 디렉터가 배우 출연료의 일부를 수수료로 가져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영향력이 작은 배우는 이 ‘기회’ 때문에 출연료를 빼앗겨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캐스팅 디렉터는 캐스팅을 연결하는 연기학원을 세우고, 배우는 연기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연 기회를 얻기 위해 한 달에 30~60만 원을 내고 학원에 다니게 된다.”

“미국배우노조, 공인 에이전시 둬
제작사가 어기면 전면 보이콧
한국 콘텐츠 업계에도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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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 파업 요구를 알리는 웹사이트 첫 화면. 미국배우조합은 현재 제작자연맹에 최저출연료 인상과 반복 스트리밍서비스에 따른 잔여출연료 지급 등을 요구하며 7월부터 파업 중이다.

- 이런 캐스팅 구조가 해외에도 보편적인가.

“미국, 일본과 비교해도 시스템 차이가 매우 크다. 일본은 노조는 없지만 성우와 배우가 함께 가입하는 협동조합이 있다. 투표로 이사장을 뽑고, 수익을 조합원들에게 배분한다. 조합원이라면 활동이 없더라도 최소한의 소득이 보장된다는 얘기다. 일본 엔터테인먼트회사는 배우와 연봉계약하는 ‘고용’의 형태가 많다. 이건 한 그룹이 방송사와 영화사 등 콘텐츠 제작사를 여럿 소유하고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미국의 시스템이 한국에서 가능할지를 많이 고민했다. 미국엔 감독, 작가, 배우들의 조합이 각각 존재한다. 이들이 미국영화·TV제작자연맹과 해마다 단체교섭해 노동조건과 최저임금을 정한다. 조합이 공인한 3대 에이전시가 모든 배우 캐스팅과 작가, 감독, 스태프 고용을 중개한다. 특정 제작사가 조합이 공인한 에이전시를 거치지 않고 1명이라도 캐스팅하면 배우 전체가 그 제작사와 작업을 보이콧한다. 이번 파업도 작가 고용안정과 배우 캐스팅 관행 등을 두고 제작자연맹과 교섭이 결렬돼 돌입했던 것이다.

이번 파업을 지켜보며 깜짝 놀란 건, 맷 데이먼과 메릴 스트립 같은 배우들이 파업 기간에 배우조합에 기금을 낸다. 작가와 배우들이 함께 파업했는데, 그 기간에 벌이가 없으면 유명 배우는 괜찮은데 무명·저소득인 배우들은 어려운 환경에 놓인다. 대배우들이 연대하는 기금을 내며 동참한 것이다. 한국 콘텐츠 업계에도 그런 연대가 필요하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여성 배우에게 남성과 동일 임금을 지급하지 않는 프로젝트는 출연을 거부하겠다는 보이콧 선언을 했다. 한국에서도 찾아보고 싶은 연대이지만, 그런 장면을 본 적 있나?”

“최저출연료 없던 한국 영화배우의 노동
물가 오르며 보조출연료와 역전현상까지”

- 조합원은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하다.

“850명을 넘어섰다. 특히 30대 여성 조합원들이 많다는 데 놀랐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첫 전속계약에 묶였다 풀려나는 시기가 대개 30대 초반이다. 20대 중반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배우가 소속사와 전속계약을 맺으면 7~9년 간다. 소속사는 일감을 보장해주지 않지만 배우는 계약 탓에 다른 직업 활동도 못한다. 제대로 된 경험이 없이 30대 초반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소속사에서 나오면 오디션 정보를 얻기 힘든 데다, 30대 여성 역할은 더 기근이다. 많은 영화가 20대 배역 또는 주부 역할을 할 수 있는 40대 이상의 배역을 주로 찾는다.”

- 한국영화배우조합의 목표는.

“유명해지지 않더라도 배우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는 시장이다. 배우 일에 뛰어드는 모두가 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특히 대중영화의 주·조연은 노력이나 능력만으로 되지 않는, 운이 따라야 하는 극소수의 일이다. 그래서 조언을 구하는 배우들에게 ‘환상을 가지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재능 있는 배우가 꾸준히 직업적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정도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노동연대 등은 본회의 개최를 앞둔 9월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문화예술노동자의 실질적 사용자인 ‘진짜 사장’이 책임지도록 노조법을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박근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서부지방고용노동청이 배우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영화배우조합의 설립필증을 교부하지 않는 상황을 설명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문화예술노동연대 등은 본회의 개최를 앞둔 9월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문화예술노동자의 실질적 사용자인 ‘진짜 사장’이 책임지도록 노조법을 개정하라”고 촉구했다. 박근태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서부지방고용노동청이 배우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한국영화배우조합의 설립필증을 교부하지 않는 상황을 설명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한국영화배우조합의 최우선 요구는 무엇인가.

“최저출연료 제도다. 미국 배우조합의 경우 매년 제작자연맹과 교섭해 최저출연료를 정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정해진 출연료가 없다보니 영화배우의 경우 회차 당 출연료가 10년째 동결 수준이다. 대사가 없는 ‘이미지 단역’의 경우 회차 당 평균 30만 원인데 10년 전과 다를 바 없는 데다 캐스팅 디렉터에 드는 수수료나 체불이 발생하기도 한다. 물가상승으로 인해 보조출연 배우의 출연료보다 오히려 더 적은 역전 현상도 나타난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 이를 위한 눈앞의 과제는 무엇인가.

“노조 설립필증 교부다. 지난 8월에 노조 설립총회를 열고 신고를 했지만 노동청이 두 달이 되도록 필증 교부를 미루고 있다. 검토가 필요하다는 이유다. 노동청이 출연계약서 등 각종 서류를 추가로 요구해 모두 제공했다. 배우 전속계약은 배우 입지가 약할수록 종속적이다. 신인 아티스트에게 교육 명목으로 ‘매일 사무실 출퇴근’을 요구하는 표준계약서 부속 조항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노동청은 소속사 있는 조합원에 대해서는 소속사를 이유로 근로계약이 아니라고 하고, 전속계약서가 없는 배우는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노조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소속사 문제를 민감하게 여긴다는 생각도 든다. 노동부 입장에서 감독 대상이 매니지먼트 회사까지 확대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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