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교에는 1만4000명에서 2만 명 정도의 학교 경찰관이 상주한다. ‘학교 자원 담당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1999년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격 사건 이후 학교 내 경찰 배치가 본격화됐는데, 이 과정에 10억 달러 이상의 예산이 투입됐다.

일종의 학교 보안관이다. 총기, 마약, 싸움, 성폭력 등을 단속하고 징벌한다. 사회의 사법화를 넘어 ‘학교의 경찰화’가 구축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학교 내 강력 범죄가 줄어든 듯 보이지만, 되려 범죄 규모와 처벌이 증가했다. 침 뱉기, 작은 다툼, 휴대폰 사용, 복장 문제 등 예전엔 교사들에 의해 교정되었을 소소한 행위들까지 경찰의 실적을 위해 낱낱이 범죄로 규정하고 정학과 처벌을 종용하기 때문이다. 학교 보안관이 복도를 활보하는 기이한 서부 시대가 펼쳐진 셈이다.

▲7월2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시민들이 고인이 된 교사 A씨를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7월24일 서울 서초구 서이초등학교를 찾은 시민들이 고인이 된 교사 A씨를 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응보적 정의’가 만연했다. 미국 우익들은 질서가 들어섰다며 열광했다. 하지만 학교 불평등은 더욱 심화됐다. 흑인 학생은 2015~2016년 전체 학생의 15%였지만, 체포된 학생의 36%를 차지했다. 워싱턴 DC에서 흑인 소녀는 백인 소녀보다 정학 받을 확률이 거의 6배 더 높다. 유색인종, 장애, 성소수자 학생이 더 높은 비율로 징벌됐다.

이렇게 정학과 퇴학을 당하거나 교도소로 인계된 학생들은 사회에 나와서도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학교에서 감옥으로 가는 파이프라인’이라는 비판이 쇄도했다. 노동계급, 유색인종, 부적응 아이들을 감옥으로 실어 날라 범죄자로 만드는 악순환이 증가한 것이다. 경찰관과 사법 질서에 학교 마당을 내어준 결과였다.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건으로 촉발된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의 가장 선명한 구호 중 하나는 ‘경찰을 퇴출하라(Defund the police)’였다. 학교에 주둔하는 경찰들을 쫓아내라는 것이다. 불평등과 인종차별 등 사회적 모순을 반영하는 학교 문제를 그저 경찰력으로, 권위와 사법적 질서로 질곡함으로써 외려 갈등과 모순을 극대화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경찰 예산을 중단하고, 그 대신 교육 정의에 예산을 편성하라는 목소리가 한층 거세졌다.

현재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응보적 정의’ 대신 ‘회복적 정의’로 조타수를 조금씩 옮기는 중이다. 권위와 사법적 질서에 의존하기보다 미리 갈등을 예방하고, 가해자/피해자라는 단순 구도가 아니라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고 관계의 끈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다. ‘회복적 정의’는 전 세계 원주민 공동체들의 오랜 지혜로 주조된 삶의 방식이다.

▲시카고교사노동조합(Chicago Teachers Union)이 지난 6월3일 ‘전국 총기폭력 인식의 날’을 기념해 올린 사진. 시카고교사노조 트위터 갈무리
▲시카고교사노동조합(Chicago Teachers Union)이 지난 6월3일 ‘전국 총기폭력 인식의 날’을 기념해 올린 사진. 시카고교사노조 트위터 갈무리

최근에는 학교 경찰관을 줄이는 대신, 정신 건강 상담사와 ‘회복 정의 카운셀러 (Restorative Justice Coordinators)’를 고용하고 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 학생, 가해 학생, 부모 등 대면 서클을 구성하고 어떻게 책임질지 함께 모색하도록 돕는 게 회복 정의 카운셀러의 역할이다. 또 사건 해결에 그치지 않고 학생들에게 각자 자신의 의견과 상처를 이야기하도록 한다.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지, 또 각자의 상처는 어떻게 연결되고 보듬어야 되는지 의논하는 것이다.

학교 경찰 시스템에서는 정학, 퇴학, 기소 같은 징벌로 끝났겠지만, 회복 정의 시스템은 문제의 근원과 맥락을 성찰하게 한다.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공동체 전체가 상처를 회복하고 건강해지는 게 이 시스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교사노조인 시카고교사노조(CTU) 역시 회복 정의 시스템을 강조한다.

“교사의 노동 조건은 곧 학생의 교육 조건입니다.”

교사의 양질의 노동 조건이 곧 양질의 교육이 된다는 것이다. 교육 민영화에 맞서 공교육을 사수해왔던 시카고교사노조는 2011년의 교사 파업을 주도했다. 임금 인상은 물론 갖은 업무로 얼룩진 근무 환경의 고통을 토로하며 간호사, 사서, 정신 상담사, 그리고 바로 회복 정의 코디네이터를 일선 학교에 배당해달라고 요청했다. 파업 끝에 결국 노조가 역사적 승리를 일궈냈다. 또 지난 4월에는 이 노조 출신이 시카고 시장에 당선되는 이변이 발생했다. ‘노동계급의 쾌거’라는 환호가 뒤따랐다. 현재 시카고 공립학교에 정신 상담사와 회복 정의 코디네이터들이 늘고 있다. 교사들의 업무는 줄어든 반면에, 교사와 학생들을 위한 보건-정신 건강의 자원은 더 증가하게 된 것이다. 학교뿐 아니라 도시 전반에 걸쳐 누구도 낙오하지 않는 건강한 공동체를 위해 회복 정의 시스템을 정착시키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시카고교사노동조합(Chicago Teachers Union)이 프라이드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사진. 시카고교사노조 트위터 갈무리
▲시카고교사노동조합(Chicago Teachers Union)이 프라이드 축제에 참여하고 있는 사진. 시카고교사노조 트위터 갈무리

이처럼 교사의 노동권과 학생인권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사가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은 학생들에게 보다 이롭다. 교육청 중심의 관료적 절차주의와 학교 문제를 교사 개인에게 전가해 악성 민원과 업무 스트레스로 숨통을 조이는 현재의 고통스러운 노동 환경을 뜯어 고쳐야 교육의 질도 더불어 향상된다.

그런데 여기 한국에서는 한 젊은 교사의 비극 이후 정부와 여당, 보수 언론들이 ‘교권 vs. 학생인권조례’라는 프레임을 필사적으로 밀어붙이는 중이다.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학교가 망했고 나라마저 붕괴되고 있다는 기상천외한 헛소리들을 쏟아낸다. 교권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권위의 귀환을 요청하는 것이다. 응보적 정의를 꿈꾸는 것이다. 경찰복을 입은 교사가 진압봉을 들고 학교를 활보하면 무너진 공교육이 다시 살아나는 걸까? 어떻게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육을 한다는 걸까?

이미 공교육의 기능은 무너지고, 징벌과 사법적 질서만 앙상하게 남은 한국의 학교 공간은 자녀의 징벌을 피하고자 학부모들의 변호사 고용, 고소-고발의 남발, 악성 민원 폭탄 등의 갖은 송사로 얼룩진 재판정이나 다름없다. 더 나아가 그에 따른 업무와 스트레스를 오로지 교사들에게 전가하는 지독한 관료주의가 학교 자체를 송사의 감옥으로 만들었다. 상황이 이럴진대, 고작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이 학교인권조례 폐지, 아동학대법 개정, 교권의 강화, 학교 치안의 경찰화 같은 이야기들뿐이다. 지금도 충분히 사법 지옥인데 여기에 감방 수를 더 늘리자는 어리석은 주장들이다. 교사들에게 교정봉을 들게 하자는 말이다. 대체 이 나라의 교사는 교사인가, 교도관인가?

학교는 우리 모두의 ‘공유지’다. 공교육이 고작 능력주의를 배양하는 교육 서비스 상품으로 전락한 이 서글픈 현실을, 갖은 송사와 법 절차만 판치는 사법 지옥이 된 현상태를, 교사들이 갖은 업무와 민원 홍수 속에 허덕이는 이 고약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 망가진 학교를 회복시킬 수 있을까.

경찰봉을 드는 게 아니라 둥글게 모여 앉아 허심탄회 함께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을까. 선생이 죽어나가고, 학생들이 연쇄적으로 희생되는 이 죽음의 파이프라인을 이제는 끊어내야 하지 않는가. 무한경쟁과 상품화된 교육 시스템을 위해 교사와 학생들이 무참히 갈려나가는 학교는 공유지는커녕, 그저 K-지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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