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노동자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 완화를 골자로 한 대법원 판결로 일명 ‘노란봉투법’의 입법 취지가 인정됐다는 평가가 나오자 일부 신문에서 대법관, 대법원장 등 개인을 타깃으로 한 비판 보도가 연이어 나왔다. 개인의 정치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이례적으로 대법원이 입장문을 내고 개인을 겨냥한 인신공격을 멈춰달라고 했으나 해당 신문들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 지난달 11일 전원합의체 선고가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 연합뉴스
▲ 지난달 11일 전원합의체 선고가 열린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 연합뉴스

지난 15일 대법원 3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현대자동차가 전국금속노조 현대차 비정규직지회 노조원 4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에 돌려보냈다. 지회가 2010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울산공장 일부 라인을 점거했고, 이에 현대차가 손해 일부인 20억 원을 배상 청구한 사건이다. 앞선 1‧2심은 노동자들의 손배 책임 청구액 20억 원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이와 달리 노동자들이 노조와 같은 손배 책임 범위를 갖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개별 조합원에 대한 책임 제한의 정도는 노동조합에서의 지위와 역할, 쟁의행위 참여 경위 및 정도, 손해 발생에 대한 기여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며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손해배상 책임 범위를 동일하게 보는 것은 헌법상 근로자에게 보장된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번 판결은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의 입법 근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파업노동자를 향한 무분별한 회사의 손배 청구를 제한하자는 것이 노란봉투법의 입법 취지이기 때문이다. 노란봉투법은 지난 2월 국회 환노위 통과 후 현재 본회의 회부를 앞두고 있다. 민주노총은 선고 직후 성명을 내고 “국회는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본회의에 상정된 노조법 2‧3조 개정안을 신속하게 통과시키라”고 했다.

경향, 한겨레, 한국일보 “판결로 노란봉투법 반대 근거 약해져”

▲ 지난 16일자 한겨레 4면 기사.
▲ 지난 16일자 한겨레 4면 기사.
▲ 지난 16일자 한국일보 사설.
▲ 지난 16일자 한국일보 사설.

여권의 강한 반발로 노란봉투법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가능성이 거론되는 가운데 경향신문, 한겨레, 한국일보는 이번 판결로 노란봉투법 반대 근거가 약해졌다고 봤다. 한국일보는 16일 사설에서 “여권과 재계는 노조원 책임을 일일이 따지려면 소송 자체가 어려워져 파업이 조장될 수 있다며 노란봉투법에 반대해왔으나 이번 판결로 반대 근거가 약해졌다”고 했다. 아울러 “손배 청구는 파업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는 나쁜 제도란 비판이 많았다”고 했다.

한겨레도 같은 날 “대법원의 새로운 법리 제시로 노란봉투법 없이도 유사한 입법 효과가 발생하는 셈이어서,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할 명분도 사라졌다”고 했고 경향신문은 “이제 국회와 행정부가 답할 차례다. 국회는 조속히 노란봉투법 입법 절차를 마무리하고, 윤석열 대통령은 마땅히 이를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 지난 16일자 국민일보 사설.
▲ 지난 16일자 국민일보 사설.

다른 일간지는 사법부에 대한 평가 대신 지켜보자는 입장을 취했다. 국민일보는 “불법 파업에 면죄부를 주자는 게 아니다. 불법 파업에 대한 손배 청구의 길을 열어두되 책임 소재를 엄격하게 가려야 한다는 것”이라며 “판결 취지를 존중하고 공정한 노사 관계를 정립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했고, 서울신문은 “이 판례가 불법파업의 면죄부가 되는 일이 없도록 정부의 세밀한 후속 대책이 긴요하다”고 했다.

판결 주체 인신공격성 보도… 대법원 “받아들이기 어렵다”

▲ 지난 16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 지난 16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11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달 11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보수신문은 이전 정부에서 임명한 노정희 대법관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판결 내용 대신 판결 주체를 공격하는 보도를 냈다.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다. 이번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에 김명수 대법원장은 포함되지 않았지만 이를 가리지 않았다. 중앙일보는 16일 1면에 <판례로 노란봉투법 김명수 대법 ‘알박기’> 기사를 내고 “김명수 대법원장의 퇴임을 3개월 앞두고 대법원이 개별 조합원에게 불법 파업의 책임을 묻는 것을 제한하는 취지의 판결을 15일 쏟아냈다”고 했다.

▲ 지난 16일자 조선일보 사설.
▲ 지난 16일자 조선일보 사설.

조선일보는 16일 사설에서 “이 사건 주심 재판관은 노정희 대법관이다.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이라며 “대법원은 현재 대법관(대법원장 포함) 14명 중 우리법‧인권법‧민변 출신 등 이른바 진보 성향 대법관이 7명이다. 이런 전례 없는 인적 구성이 이번 판결을 낳았다고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개인을 타깃으로 한 인신공격성 보도는 경제지에서도 이어졌다. 노란봉투법은 기업 등 재계에서 “불법파업조장법”이라며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법이기도 하다. 한국경제는 16일 사설에서 “김명수 대법원이 결과적으로 불법 파업을 조장할 편향적인 ‘친노조 판결’을 또 내놨다”고 했고, 19일 사설에선 “말년에 부쩍 거세진 김명수 사법부의 친노조 판결은 ‘사법 폭주’라 부를 만하다”며 “김명수 대법원의 일련의 노사 판결에서 공정과 상식은 실종됐다”고 했다.

▲ 지난 16일자 매일경제 4면 기사.
▲ 지난 16일자 매일경제 4면 기사.
▲ 지난 16일자 매일경제 사설.
▲ 지난 16일자 매일경제 사설.

매일경제 또한 16일 <與 “사법부가 사망한 날”> 기사에 이어 <공장 점거 노조원에 사실상 면죄부, 불법 부추긴 ‘노정희 판결’> 사설을 냈다. 매일경제는 “주심인 노 대법관은 우리법연구회 출신으로 ‘이재명 선거법 무죄판결’의 주심이자, 선관위원장 시절인 작년 3월 대선 때 ‘소쿠리 투표’ 사태로 물러난 당사자이기도 하다”고 했다. 이어 “이러니 시중에선 ‘대법원이 노란봉투법 무산에 대비해 정치적 판결을 내린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고 했다.

쏟아지는 비판에 대법원은 이례적으로 입장문을 냈다.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개인에 대한 비난을 멈춰달라는 것이다. 판결 내용에 대한 논쟁 대신 판결 주체의 이념을 주요한 비판 대상으로 삼으면, 사법부가 정치권에 종속됐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법원에 따르면 이번 판결은 기존 판례와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이번 판결로 손배 청구가 봉쇄되는 것이 아니어서 불법파업을 조장하지 않는다.

김상환 법원행정처장은 지난 19일 “최근 상황에 대한 대법원의 입장”이라며 “재판 과정에서 제기됐던 법적 쟁점들과 판결 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신중한 검토가 전제되지 않은 채 판결의 진의와 취지가 오해될 수 있도록 성급하게 주장하거나, 재판부를 구성하는 특정 법관에 대하여 판결 내용과 무관하게 과도한 인신공격성 비난을 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했다.

김 처장은 “이러한 잘못된 주장은 오직 헌법과 법률의 해석에 근거하여 판결을 선고한 재판부에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사법권의 독립이나 재판절차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제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여 말씀드린다”고 했다.

▲ 19일 입장문과 함께 나온 대법원 설명자료.
▲ 19일 입장문과 함께 나온 대법원 설명자료.

대법원은 이날 추가 설명자료까지 내며 적극 해명했다. 대법원은 “기존 판례를 변경한 것이 아니고, 쟁의행위 사안에도 기존 판례 법리를 적용한 것”이라며 “민법 제760조의 공동불법행위자들 간 공동 배상책임 원칙은 유지하는 것이고, 책임의 비율만 노조원별 달라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결이 공동불법행위책임에 관한 민법 제760조에 어긋난 것이라는 주장은 판결을 정확하게 이해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어 “이번 판결 이후에도 기업은 여전히 위법한 쟁의행위에 가담한 피고들을 상대로 전체 손해를 입증하여 배상을 청구할 수 있으므로, 입증책임 부분에서 달라지는 점이 없다”며 “다만 기업이 입증한 손해 중 피고들이 개별적으로 부담하는 책임 비율이 서로 달라지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법원의 입장문과 설명자료는 대법관 개인을 공격했던 신문에선 다뤄지지 않았다. 주요 일간지 중 경향신문, 국민일보, 서울신문, 한겨레, 한국일보가 20일 지면에서 대법원의 입장을 전했고,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매일경제, 한국경제 등은 침묵했다. 매일경제는 대법원 입장문 대신 <고용부 “대법 판결, 노란봉투법 근거안돼”> 기사를 내고 “불법 파업을 조장하고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시도는 결코 용인될 수 없다”는 이정식 고용부 장관의 발언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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