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부장과 모든 프리랜서 업무 도급계약을 종료함에 있어 (…) 향후 본 계약과 관련된 일체의 민형사상의 소송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다.”

YTN에서 6년간 일했던 VJ(영상촬영 저널리스트) A씨는 지난해 말일 YTN 경제부장으로부터 한 장짜리 문서를 건네받고 할 말을 잃었다. A씨로선 YTN으로부터 ‘해고’ 당하는 당일이었다. 한 달 앞서 YTN은 보도국 경제부에서 영상 담당으로 일해온 그에게 ‘계약 연장 불가’를 통보했다.

문서 제목은 “프리랜서 업무도급 계약종료 확인서”였다. A씨가 “왜 써야 하느냐”고 묻자 경제부장은 “영업비밀” 때문이라고 했다. A씨는 “여기서 얻은 비밀이 무엇이 있나”, “안 쓰겠다”고 말하자 부장은 “알아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A씨는 ‘계약종료 확인서’가 단순한 계약종료 문서가 아님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른바 ‘부제소 확약서’였다.

2020년 2월 고 이재학 PD 사망 이후 방송사들이 전체 인력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른바 프리랜서 계약을 ‘쉬운 착취‧쉬운 해고 수단’으로 남용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방송사들이 이 같은 지적에 고용책임 회피 수법을 고도화하는 가운데, YTN이 최근 ‘프리랜서’들에게 적용하는 부제소 확약서가 노동계 비판을 사고 있다.

▲YTN이 ‘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 계약연장 불가(해고)를 통보하며 서명 요구한 부제소 확약서. 디자인=안혜나 기자
▲YTN이 ‘프리랜서’ 노동자들에게 계약연장 불가(해고)를 통보하며 서명 요구한 부제소 확약서. 디자인=안혜나 기자

YTN은 올 초 6년차 VJ와 보도국 방송제작 노동자 B씨 등 복수의 상근 ‘프리랜서’들을 내보내는 과정에서 부제소 확약을 요구했다. 확약서는 “본인은 2023년 ○월○일자로 YTN ○○부장과의 모든 프리랜서 업무 도급계약을 종료”한다며 “본 계약과 관련된 제반 비용이 정산되고, 채권·채무 등 일체의 법률적 관계가 모두 종료하였음을 확인하였으며, 향후 본 계약과 관련된 일체의 민·형사상의 소송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을 확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확약서는 또 “업무로 인해 알게 된 YTN의 영업 비밀 및 중요 정보 등의 비밀을 보호하고, 업무의 인수인계와 관련 없는 어떠한 YTN 내외 제3자에게도 누설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부제소 확약서는 사측 계약 당사자를 ‘부장’ 개인으로 밝히고 있다. 그간 YTN 인사팀은 노동자성을 주장하는 프리랜서들에게 ‘회사 인사팀은 계약 주체가 아니라 모르는 일’이라는 취지로 답변해왔다. 그러나 회사가 각 부서에 동일한 내용의 확약을 요구한 점에 미뤄 회사 차원에서 도입한 제도로 추정된다. YTN 측은 관련 문의에 “일반 프리랜서는 논의 대상이 아니므로 답변 드리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I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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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늬만 프리랜서’ 정리과정서 노무전략 일환

부제소 확약은 사내 노동자성 인정 여지가 높은 프리랜서를 상대로 한 ‘노무 전략’ 일환으로 보인다. 실제 YTN이 부제소 확약을 요구한 두 노동자는 모두 회사로부터 일방으로 계약해지 통보를 받았고,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두 노동자 직종은 모두 노동자성 인정 소지가 높은 업무로 분류된다. 일례로 VJ A씨는 YTN 사옥 보도국 경제부에 출근해 상근하며 기자들 요청에 따라 현장에 출동, 스케치 촬영과 시민 및 경제 전문가 인터뷰 등을 수행해왔다.

YTN은 이와 동시에 사내 방송 비정규직들을 상대로 다층적 대응을 해왔다. 앞서 2021년 말 CG‧그래픽디자이너와 PD 12명은 YTN을 상대로 근로자지위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이후 YTN은 선고 한 달 뒤인 지난해 초 ‘계약직 PD 공개채용’을 진행했다. 채용 결과 2년 넘게 일한 PD 5명이 전부 합격해 ‘기간제’ 계약을 맺게 됐다. 2년 미만 PD는 ‘프리랜서 계약종료’ 방식으로 잘렸다. 최대 7년간 일해온 PD들을 정규직 전환하지 않고 기간제 계약을 맺으면서 고용책임을 해소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문제는 방송 노동자들이 회사 요구에 따라 부제소 확약에 응하면서 법적 구제에 불리해진다는 점이다. B씨는 회사 요구로 퇴사 과정에서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하고 부제소 확약에 응했고 확약서를 교부 받지 못했다. 노동위원회는 심문 과정에서 B씨가 부제소 확약에 서명한 점을 노동자 측에 불리한 조건으로 들면서 회사와 합의를 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KBS가 매주 일요일 55분 분량으로 방송한 A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인력구성 조직도(2021년 10~11월). 자료=고용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인포그래픽=이우림 기자
▲KBS가 매주 일요일 55분 분량으로 방송한 A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인력구성 조직도(2021년 10~11월). 자료=고용노동부 방송산업 비정규직 활용 실태조사 용역연구, 인포그래픽=이우림 기자

“되레 노동자성 반증, 명실상부 도급이면 필요 없어”

앞서 MBC 등 방송사들은 프리랜서 업무 도급계약서에 “본 계약은 갑(MBC)과 을(프리랜서) 간의 업무위임계약으로 어떤 경우에도 을은 갑에 고용관계를 주장할 수 없다”고 규정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법적 구제를 차단하는 독소조항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법원과 노동위원회에서 계약서 조항이 아닌 실제 일한 양태(근로실질)를 근거로 노동자성을 인정하는 사례가 나오면서 방송계에 부제소 확약서까지 등장하기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김세정 돌꽃 노동법률사무소 노무사는 “YTN 입장에서 노동자와 계약관계가 정말 도급 관계라 다툼 여지가 없다면 확약서를 쓸 필요도 없을 것”이라며 “더욱이 12명의 프리랜서가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뒤 이를 도입했다는 점에서 무늬만 프리랜서들의 법적 다툼을 원천 차단하려는 시도로 보인다”고 우려했다.

▲방송국 주조정실 자료사진
▲방송국 주조정실 자료사진

부제소 확약은 다른 업종에서도 사례를 찾을 수 있는 ‘레퍼토리’다. 특히 불법 파견이 확실한 사안에서 사측이 노동자들에게 제시한다. 현대자동차는 불법 파견해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정규직 전환 및 일한 기간 3년마다 근속 1년 인정’을 조건으로 제시해 그간 임금 차액과 근속에 따른 법적 권리를 포기하도록 제안했다. 현대모비스는 자회사를 설립해 사내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수행하던 업무를 전환하겠다며 부제소를 확약한 이들을 대상으로 입사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사례는 모두 회사가 노동자에 대한 직‧간접고용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YTN 측의 확약서와도 다르다. 방송계가 오랜 기간 노동권이 취약하고 사각지대에 놓인 데다, 밖으로부터 감시도 없다시피 한 탓에 노동자에 일방으로 불리한 부제소 확약서와 서명 사례가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김기덕 변호사(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는 “일반 사업장들은 사내하청 (불법파견) 노동자들이 법적 다툼하는 동안 일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점 등을 회사가 악용해 부제소 합의를 제안한다”며 “이 (YTN의) 확약은 노동자에 협상책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노동자들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써선 안 될 확약”이라고 우려했다.

▲ⓒGettyimages
▲ⓒGettyimages

김세정 노무사는 “형식상 프리랜서 계약이라면 사인 간의 거래라 보지만, 고용관계로 보면 매우 불평등한 상황인 데다 법률 지식이 없는 노동자가 ‘좋게 나가라’는 회사 회유에 서명을 거부하기 어렵다”며 “더욱 문제는 업계에 이 관행이 퍼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된다면 방송계 직종 불문 프리랜서가 많은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다툴 수조차 없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고 했다.

YTN 담당자는 관련 문의에 “회사와 당사자 간 합의 그리고 회사의 인사 원칙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답변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며 “프리랜서는 2년이 도과됐다고 모두 정규직 전환 대상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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