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대중문화 이론서의 첫 두어 챕터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 할애된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프랑크푸르트대학 사회조사원(Institute for Social Resarch)에 모였던 일군의 맑스주의자들을 일컫는다.

설립 초기, 자본주의 경제와 노동운동사에 집중했던 사회조사원은 1930년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당시 독일의 진보 정당들이 지나치게 ‘경제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자본주의가 영속화되고 독일은 히틀러의 선전·선동으로 전체주의로 추락하는 와중에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사회변혁을 위해 ‘정통’ 맑스주의가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경제가 아니라 문화에 주목하였다.

특히 ‘문화산업’이 비판의 대상으로 설정된 바, 호르크하이머와 공저자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문화 생산물은 모든 사람들을 일하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휴식 시간에도 잡아 놓는 거대한 경제 메커니즘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문화 산업은 하자 없는 규격품을 만들 듯이 인간들을 재생산하려 든다.”고 일갈한다. 지금이야 의미가 변질되었지만, 이들이 최초로 ‘문화산업’이란 말을 창안한 이유는 결코 산업화될 수 없는 문화가 공산품을 찍어내듯 제조되고 일터와 일상 모두가 이윤추구와 가진 자의 착취 대상이 되며 사회 전체가 무비판적으로 마비되는 현상을 개탄하기 위함이었다.

대중문화 이론서들이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이유는 이들이 사실상 최초로 대중문화론을 체계화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사회 위기의 핵심 징후로 간주했고 그 해결책을 대중문화 영역에서 발굴한 서사적 매력이 컸던 탓이다. 동시에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로 대중문화를 폄하한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대중문화를 애정하는 후속 연구자들의 반발을 사며 도전적인 연구의욕을 고취시켰다. 평범한 이들이 대중문화에서 누리는 즐거움을 정교화하고 산업논리를 우회하며 얻을 수 있는 대안적 욕망과 희망을 밝히는 가운데, 대중문화는 공산품의 문화(mass culture)가 아니라 여러 모순과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문화(popular culture)로 긍정되었다.

▲4월24일(현지 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대표를 접견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4월24일(현지 시간) 윤석열 대통령이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대표를 접견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하지만 대중문화 이론서 바깥에서 현실을 볼 때 과연 대중문화는 ‘문화산업’에서 얼마만큼 이탈되었는지를 단언하기가 쉽지 않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고 온 뒤 내세운 주요 외교적 성과 중 하나로 넷플릭스의 4년간 3조3천억 원 투자 유치를 꼽았다. 대통령실은 “콘텐츠 산업은 국가 이미지를 끌어올리면서 국내 산업과 제품 수출에 커다란 연관 효과를 일으킬 것”이라 평했다. 이와 같은 인식 속에서 문화와 공산품의 경계는 희미해진다.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문화산업’과 크라이슬러, 제너럴 모터스와 같은 자동차 제조업과의 동일성을 간파했다. 공히 이윤 축적에 맞춤된 경영 체계를 갖고 있으며 규격화, 양산화에 힘입어 도식에 따라 대량의 물건들을 쏟아냈다. 넷플릭스라고 다를 것인가. 팡(FAANG)은 미국 IT 업계를 주도하는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넷플릭스, 구글을 통칭하는 말로 사실상 문화산업과 IT산업이 동일 논리로 작동 중임을 폭로한다. 지배적 산업분야가 제조업에서 IT 분야로 바뀐 것을 제외한다면 100년 전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말한 ‘문화산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

대중문화가 산업논리로 점철되고 엇비슷한 즐거움을 양산하는 것과 사회의 전체주의화가 명확한 인과관계를 갖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적어도 상관관계는 지적할 수 있겠다.

최근 한국의 대중문화 이야기는 과도하게 넷플릭스에 집중되었다. 유료 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넷플릭스를 빼 놓고는 대중문화를 말하는 게 불가능해 보일 정도다. 나조차도 여러 차례 넷플릭스로 이 지면을 채웠다. 긍정과 비판은 구분되어야 하겠지만, 넷플릭스에 편중된 대중문화 담론이 그리 건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 넷플릭스.
▲ 넷플릭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문화산업’을 ‘대중 기만으로서의 계몽’으로 간주했는데, 그 말의 무게감은 여전하다. 쿨하고 번쩍이는 넷플릭스가 인도하는 우리의 대중문화가 그리 낙관적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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