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직원이 기자를 사칭해 민주노총 금속노조 조합원들을 불법촬영하다가 발각돼 민간인 사찰 논란이 일고 있다. 기자 사칭은 국정원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앞세워 금속노조 경남본부 압수수색에 나선 상황에 이뤄졌다. 경남경찰청 기자단은 27일 “기자 사칭이며 민간인 사찰”이라며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지난 23일 현장에 있던 복수의 기자와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 간부 설명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은 이날 자신의 신분을 “기자”라고 밝히며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금속노조 경남본부 간부와 조합원들을 촬영하다 적발됐다.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 행위는 형법상 직권남용에 해당한다.

민주노총 경남본부는 이날 오전 국정원이 경남 창원에 있는 본부에 급습해 압수수색을 강행하는 가운데 본부 앞에서 이를 규탄하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현장 목격자들에 따르면 한 사복 와이셔츠 차림에 가방을 멘 남성이 기자회견 중 스마트폰 셀카봉과 같은 거치대에 스마트폰을 끼운 채 돌아다니며 조합원들을 촬영했다. 노조 간부가 그에게 “기자시냐”고 묻자 이 남성은 “네”라며 “기자다”라고 답했다.

간부가 “그럼 기자 신분증을 보여주세요”라고 묻자 이 남성은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간부들이 그를 붙잡아 실랑이 끝에 주머니에 있던 국정원 직원 신분증을 발견했다. 당시 20여명의 기자가 기자회견에 참석하다 현장을 목격했다.

▲지난 23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 기자회견 현장에서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조합원들을 촬영하다 발각됐다. JTBC 보도 갈무리.
▲지난 23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 기자회견 현장에서 국정원 직원이 신분을 속이고 조합원들을 촬영하다 발각됐다. JTBC 보도 갈무리.

국정원의 상급자는 이날 낮 노조가 압수한 신분증을 찾기 위해 본부를 찾아 “(해당 남성은) 직원이 맞다. 국가정보원 본청 소속”이라고 밝힌 뒤 해당 직원이 현장을 촬영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해당 직원은 “처음 현장에 온 직원”이며 “얼결에 놀라서 기자라고 한 것 같다”고 했다.

최희태 금속노조 경남본부 정책국장은 “국정원 직원이 기자회견을 몰래 촬영한 것은 명백하게 업무 범위를 벗어난 민간인 사찰이라고 보고 있다”며 “압수수색 범위를 벗어난 행위를 왜 하느냐고 항의하자 (현장 책임자가) ‘이런 것까지 할 수 있다’는 억지 주장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몇 시간 뒤 국정원은 기자 사칭을 부인하고 나섰다. 국정원 대변인은 이날 공식 입장을 묻는 JTBC 취재진에 “기자라 사칭한 사실이 없고 오히려 노조로부터 신분증과 휴대폰을 강탈당하고 이 과정에서 직원이 다쳤다”고 주장했다.

경남경찰청 기자단 일동은 성명을 내고 국정원에 진상규명과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기자단은 “국정원의 기자 사칭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라며 “압수수색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국정원 직원이 몰래 촬영한 것은 민간인 사찰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기자를 사칭한 것은 민간이 사찰을 합법화시키고, 앞으로도 ‘기자사칭’을 그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만연해지면, 취재 영역의 제한은 물론, 언론 자유의 위축은 자명한 일”이라고 했다.

기자단은 국정원이 진상을 밝히고 기자 사칭과 거짓 공식 해명을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또 민간인 사찰에 대해선 관련자를 처벌하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밝혔다.

▲국정원은 23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 사무실을 급습해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사진=노동과세계 제공
▲국정원은 23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남지역본부 사무실을 급습해 압수수색을 강행했다. 사진=노동과세계

경남경찰청 기자단 간사를 맡는 MBN 기자는 “국가권력이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장소, 감시하러 들어온 장소에 몰래 신분을 속이고 들어온 것”이라며 “이것이 허용되면 국가기관이 이를 도구로 사용하고, (노동계) 기자회견 주최 측도 기자들을 믿지 못해 취재 영역도 제한될 것”이라고 했다.

성명에 참여한 JTBC 기자는 “만약 우리가 직접 보지 않고 노조가 그렇게 주장했다면 ‘논란’이라고 기사화됐을 것이다. 기자들도 현장에서 다 듣고 목격한 것을 발뺌하니 기자단은 넘길 수 없는 일”이라고 성명 발표 배경을 밝혔다.

이 기자는 “해당 직원은 안에서 압수수색할 때에는 국정원임을 가리키는 점퍼를 입었다”며 “국정원이 선택적으로 대외에 신분을 노출하며 노조 사찰 논란이 될 만한 일에는 점퍼를 벗고 촬영한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 대변인실 담당자는 28일 통화에서 “기자라고 사칭한 사실은 없으며 조합원들로부터 사법경찰관증 및 후대폰을 강탈 당하고 상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직원이 앞서 해당 직원의 사칭을 인정한 사실과 현장 촬영 여부를 묻는 질문에는 “별도의 입장은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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